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268
268화
16장 준비
탐라.
부산히 움직이고 있는 포구에서 사람들은 수선스레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거 못 보던 요리인데 이걸 뭐라 하우꽈?”
“메밀로 만든 떡이우다.”
“메밀?”
“엉. 고려에서 온 건데, 이번에 대국으로 돌아가신 대국 판관 나리께서 떠나기 전에 이걸 길러보라며 나눠주셨우이다.”
“맛있수꽈?”
“직접 잡수보우다. 나리께서 말씀하시길 메밀은 찬 성질이 있어 그냥 먹음 배가 살살 아프니 반드시 무와 함께 넣으라 하여 이번에 전을 부치고 삶은 무채, 쪽파, 참기름, 참개 등을 넣고 버무린 뒤 부친 전위에 얹어 말아 떡으로 만들었수다.”
그것은 아직 이름은 붙지 않았지만 현대에도 전해지는 제주도의 전통 음식 중 하나인 ‘빙떡’이라 할 수 있었는데 본래 제주도의 빙떡은 원 간섭기에 고려에서 메밀이 들어오면서 생겼다가 메밀의 찬 성질로 복통을 경험한 후에 겨우 무를 넣으면 독성이 사라지고 맛이 좋아진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온 음식이었다.
그러나 이번 왕자의 난으로 제주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죄인으로 고려에 끌려가고, 성주에 의해 땅의 절반이 개발당할 피해를 목격한 김구는 이 사태의 뒷사정을 알던 이로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하여 농토가 사라지며 줄어든 작물과 끌려간 인구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떠나기 전에 제주도에 도움 될 만한 곡식을 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메밀’이었다.
그리고 선의로 주는 선물인 만큼 찬 성질을 알고 있던 김구는 메밀의 모종을 나눠주면서 독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설명해 주었고, 그 덕분에 탐라인들은 원 역사와 달리 복통을 경험하지 않고 바로 자기 나름의 맛을 추가하고 늘린 빙떡을 원 역사보다 다소 이른 시기에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럼, 어디 한번… 음!”
그렇게 말한 ‘경양’은 따끈따끈한 빙떡 하나를 먹었는데 과연 제주도 전통 음식이자 특별식이 될 만하였다.
그는 처음 맛보는 빙떡의 별미(別味)에 감탄을 하면서도 내심 겸연쩍은 듯 중얼거렸다.
“허, 참. 맛은 있는데 판관 나리께서 주고 간 떡이라, 진짜 대국에서 떠난 것 맞는 거지? 지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군.”
“경 씨는 또 그 말이오? 언제는 여기는 고려가 아니라 탐라인데 고려 놈들이 뭔데 여길 자기들의 군이니 현이니 하며 관리를 파견하냐고 뿔내놓고 정작 대국의 관리가 떠나 집 나간 여편네처럼 맨날 그 소리요?”
“그치만 믿기지가 않아! 우리 섬이 대국의 땅으로 들어간 지가 100여 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빠지다니….”
“경 씨. 요전에 (성주)전하와 판관 나리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대국의 군현에 들어간 것은 대국에서 아조의 소란을 없애기 위해 한 것이라고 말이야.
실제 군에 들어간 후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런데 이번 판관 나리께서 보시니 대국에서 파견된 지방관들 중에 탐관오리가 많은데 이건 천자님의 뜻과 달라 건의했고, 성주도 지방관이 없더라도 대국과 화호를 나눌 수 있다고 설득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고 말이네.”
“그러니까. 한마디로 성주 전하께서는 이번 공으로 본국이 대국의 군현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고, 대국에서도 딱히 본국을 취할 생각은 없었던 것 아니오. 형님.”
“그렇다고 해도… 아니, 정말 그렇다면 이번에 군을 일으킨 왕자 전하와 탐라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왕자 측에 의해 강제로 참가하게 되며 그 대가로 난 이후 강제로 서쪽으로 이주하게 된 경양이었지만 거사를 일으켰다가 일어날 뒷감당이 겁나 뒤로 빼고 있었을 뿐 내심 왕자를 지지하고 있었던 마음은 진실이었던 그로서는 지금의 사태가 너무나 믿기지 않았다.
“경 씨. 착잡한 기분은 이해하지만 결국 안타까운 진실이오. 대국과 성주가 말한 대로 성주 전하를 시해하고 자리를 취하려고 하였거나 아니면 평소 종종 말하던 대국이 우리 탐라를 정복하기 전에 몰아내야 한다는 오해로 일어난 것 말이오. 후자라면 그 대가가 터무니없긴 하나… 결국, 본국은 대국과도 큰 불화 없이 예전에 돌아온 것이니 불행 중 다행이오”
“…그렇긴 하나 정말 착잡하군.”
경양은 그 말에 대해 반박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라를 뒤흔들던 그 대군과 이 참상이 고작 양원 왕자의 욕심이나 혹은 오해로 일어났고 그 결과가 자신을 비롯한 희생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착잡했다.
고려에서는 정식으로 탐라국에 내린 제주현을 폐지한 것이다.
“어이. 경 씨. 착잡한 소리는 이제 그만하고 일루 와서 떡이나 마저 잡숴.”
누군가의 말에 일행들은 마저 떡을 먹기 시작했다.
이미 진상은 명백했고, 지나간 일이다. 불만이 있고 미심쩍다고 해도 일개 백성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순응하기로 했고, 경양도 얼마 안 가 다른 일행들처럼 이번에 고려에서 들어온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제길. 맛있기는 지랄 같이 맛있어.’
그런 그들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탐라국에 머물 고려군이 머물 건물과 보다 크고 많은 배들을 정착시킬 인공 포구들이 건축되고 있었다.
고려국 제주현에서 다시 성주가 통치하게 되며 세금도 내지 않는 탐라국이었지만 섬에 머물던 고려군은 전부 사라지진 않았다.
이전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병력이 섬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번 왕자의 난과 같은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주둔한 것이라는 것이다.
탐라인들은 그것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큰 반감과 반대는 적었다.
어차피 제주현이었을 때에도 있었으니 사라지지 않아도 과거보다는 나았고, 이번 사태로 고려국의 힘을 모두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고 위험하다며 반대를 주장한 식자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결국 어차피 고려가 마음만 먹는다면 굳이 군을 보내지 않아도 손쉽게 정벌할 수 있는 이상 그게 의미가 있느냐는 말만 들을 뿐이었다.
그렇게 탐라국은 고려군의 주둔에 대해 큰 반발을 하지 못한 채 그 처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 * *
이 시기 고려와 인연이 없을 것이니 위치를 알아내는 데에 시간이 다소 걸릴 것이라는 왕검의 예상과 달리 고려는 오키나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검이 변명 삼아 말했던 상인들에게 탐라 남쪽에 섬이 있다고 들었다는 이야기가 실제 아주 거짓말은 아닌 것이다.
즉,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적당히 말한 왕검은 몰랐지만 이 시기 남송과 일본 그리고 고려에서도 오키나와 쪽으로 상인들이 가서 무역을 하거나 혹은 남송으로 가는 도중 중간 기착지로 이용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남송과 일본의 상인들도 오키나와로 많이 가지는 않았고, 고려는 그런 송과 일본보다도 더 적어 사실상 가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남방의 섬이 있는 것을 아는 이가 없던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사실을 정안연이 알게 된 것은 서남해 수적들을 소탕하면서 수적들과 해상과 조운을 업으로 삼고 있는 서해와 남해 상인들이 용강상단 산하로 들어오게 되면서였다.
“유구국… 이라고 하셨사옵니까?”
“그렇다. 탐라 이남에 수백 리에 바다 한복판에 있는 섬이라고 하였다. 아는 자가 있느냐?”
산하로 들어온 상단의 주인들을 소집시킨 정안연은 이전에 왕검에게 들었던 유구국을 물었는데 여기서 바로 반응이 나온 것이었다.
“유구국인지는 모르겠으나 알려주신 탐라와 왜국보다 아래에 있는 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사옵니다. 분명 예전에 금주(김해), 아니, 동경(김해)에 왔던 왜상들이 탐라 남쪽, 그리고 왜국의 구주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바다 한가운데에 섬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기억이 있사옵니다.”
“탐라 이남에 바다 한복판에 있는 섬이라면 소인도 송상에게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길쭉한 섬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곳이 지금 저하께서 하문하신 유구국이 아닌가 생각되옵니다.”
“호오. 아예 모르진 않는 것 같으니 참으로 다행이로군. 그렇다면 너희들 중 그곳에 가본 이는 있는가?”
이번에 용강상단에 들어온 상인들이 당시 고려에서는 아는 이들도 적은 오키나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 고려에서 바다를 오가는 상인들은 공무역으로 사신과 함께 가는 상인들을 제외하면 주로 북방 벽란도에 있는 상인들과 전라도와 경상도의 상인들이었는데 그중에서 서남해를 자주 가는 이들은 당연히 전라도 상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깐 이내 정안연은 실망을 하였는데 회의장에 모인 상단주들 중에도 유구국, 정확히는 제주도 남쪽의 섬에 대해 아는 이는 있어도 직접 가본 자는 없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계를 떠나 여수현(麗水縣)에 사는 호(㚼) 노인이 옛날 남방의 어느 섬에 가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거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노인을 데려오거나 못해도 그 섬에 대해 알아봐야겠구나. 여기 모인 상단주들은 듣도록 하라. 유구국에 대한 항해와 정보를 될 수 있는 한 전부 수집하고 오라. 만약 그 정보가 우리 상단에 도움이 된다면 그자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로다.”
이후 호 노인이 갔다는 곳이 유구국이 아니라 오도열도(고토열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노인도 그곳에서 유구에 대해 들은 것이 없지는 않아 그 이야기를 들려주어 아주 헛고생이 되지는 않았다.
* * *
내가 정안연으로부터 오키나와에 대해 듣게 된 것은 아직 화포가 완성되기 전이었는데 이 오키나와의 정보를 알아내는데 정안연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일본 상인 요시아키 겐킨과 대마도 도주의 도움도 컸다.
둘은 정말 자신들 일인 것마냥 열심히 도와주었는데 물론 고려에 진심으로 충성하여 그런 것은 아니고, 그들 입장에서도 일본이 오키나와 쪽으로 밀무역이 늘면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양자의 이해가 합일되어 도움을 받으며 알게 된 것이 남송과 일본 상인이 고려를 거치지 않고 무역을 할 때 보통 명주―주산군도―오도열도―큐슈 노선으로 항해를 하는데, 가끔은 명주―유구군도―오도열도―큐슈 노선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갈 바에는 고려나 탐라를 거쳐 가는 것이 안전하고 빨라서 남송이나 일본에서도 자주 이용은 안 한다고 한다.
사족이지만 일본이나 남송에서 고려를 중간 기착지로 하여 직접 무역을 하러 갈 때는 남송-벽란도 or 전라도―동경(김해)―대마도―큐슈 노선을 이용하거나 혹은 남송-탐라-동경-대마도-큐슈로 간다고 한다.
해금령 이후 동경의 세수가 예상보다 늘어나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정보를 들어보니 지금의 오키나와는 내 예상보다 발전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알아낸 것이 유구에선 이미 철을 사용하고, 벼를 농사하고 있으며 성들도 돌로 만들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각 성은 아지(阿只 오키나와 구스쿠 시대의 성주 혹은 족장들을 부르는 단어. 안지라고도 부른다.)라고 하는 성주들이 다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철기를 쓰는 구스쿠 시대가 12세기 전후라고 한 만큼 석기 시대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점치고는 있었지만 새삼 석성을 건축하고 철기를 사용하며 농사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니 조금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성벽을 가진 부족 내지는 원삼국 시기 제대로 된 행정체계를 아직 갖추지 못한 소국들에 가깝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직 쉬운 편이다.
“그래서 사람은 보냈나?”
“아직 고려에서 유구로 가는 항로를 이용하지는 않았으나 왜상과 왜국을 거쳐 보내어 위치를 파악해 놓긴 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언제든지 고려에서 유구로 바로 가는 배가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 또한 마친 상태입니다.”
“바로 보내도록 하라! 구주가 아무리 본국의 조공을 보내고 있다곤 하나 엄연히 왜국의 땅이니 본국의 군선을 보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설령 한두번은 괜찮다 하더라도 유구는 차후 본조의 치외에 넣을 것인데 언제까지 외국(外國)의 땅을 거쳐 가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다. 본국에서 갈수 있는 항로와 항해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구의 물산과 풍토,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습속 등 모든 정보를 알아내야 할 것이다.”
오키나와의 문화가 어찌 되었든 오키나와에 사람을 보내기는 해야 한다. 바다가 얼마나 험한지, 대규모로 갈 수는 있는지 확인을 해야 유사시 군대라도 보내 병탄을 하든 국교를 맺든 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이미 교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고려도 오키나와와 무역을 할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려에서 잉여 품목이나 혹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을 팔고 오키나와에 구매한 것을 다시 일본이나 남송에 팔아 이익을 얻을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조만간 남조에 다녀와 주었으면 한다.”
“예?”
남송에 다녀오라는 나의 말에 정안연이 진심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측근으로 들인 후 정안연 보고 직접 외국에 가보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구나.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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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일. 탐라 사람인 정일(貞一) 등이 일본으로부터 귀환했다. 애초 정일 등 21명이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동남쪽 멀리 있는 섬까지 표류해 갔는데, 섬사람들은 체격이 장대하고 온몸에 털이 났으며 말이 우리와 달랐다. 7개월 동안 그곳에 억류되어 있던 중 정일 등 일곱 명은 거룻배를 훔쳐 타고 동북쪽 일본 나사부(那沙府)에 당도했다가 생환하게 된 것이다.
– 현종 20년(102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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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과 일본 간 항로는 보통 명주―주산군도―오도열도―큐슈 노선을 활용하였다고 보지만, 가끔 명주―유구군도―오도열도―큐슈 노선을 이용하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 시기 오키나와는 간간이 교역을 했다는 흔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작중 근시기의 고려기와로 추정되는 계유년 기와가 오키나와에 출토됨에 따라 근시기 고려와도 교역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긴 합니다. 하여 작중에선 대부분은 남송과 일본 상인이긴 하나 고려 상인 일부도 중간에 들른 적이 있다고 잡았습니다.
***제주도 ‘빙떡’에 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원 간섭기 몽골인들이 삼별초와 함께 자신들을 애먹인 제주도 사람들이 얄미워서 골려줄 생각으로 그냥 먹으면 배탈이 나는 메밀을 들고 왔는데 제주도 사람들이 먹다가 이건 무랑 먹으면 문제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생긴 별미가 빙떡이란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빙떡은 메밀가루를 물에 풀어 전을 부치고 삶은 무채, 쪽파, 참기름, 참깨 등(개인 취향에 따라 고기도 좋습니다.)을 넣고 버무린 뒤 부친 전 위에 얹어서 말면 끝인 요리로 비교적 만들기 편하니 먹고 싶은 분들은 한번 만들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