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28장 지부겐 대왕
마포이를 위시하여 옷치긴의 사자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실 그들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려 측의 신경은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웠으나 용케도 참아내고 있었다.
만약 사전에 절대 화를 내지 말라는 지시가 없었다면 벌써 폭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야율설도가 배신했다? 아니, 내가 아는 한 그는 이 상황에서 이런 짓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은데….’
서북면이 침공받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하여도 유갑수를 비롯하여 여러 장수들이 동요국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왕검을 비롯한 일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그들이 동요국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동요국이 지금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라는 판단이었다.
가령 동요국의 목적이 지난번과 같이 ‘강동 6주를 취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와서’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우행(愚行)이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모산의 전투가 시작하기 전이라면 그나마 이해는 되었을 것이고, 동모산 전투가 일어나던 도중이라면 이해는 되지 못하더라도 어찌 납득이라도 되었을테지만 전투가 끝난 지금 와서 군대를 일으키다니 이번 전쟁의 명분을 생각하면 이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가장 위험한 것은 입지나 명분적으로 가장 취약한 동요국이기 때문이다.
동요국 홀로 군대를 일으켜 고려를 잡는다는 것은 실리적으로나 명분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모두 악수였다.
그렇다면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였는데 그것은 그것대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사전에 한 약조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나 보군.”
왕검의 말에 옷치긴 일행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서북면을 침공한 군대의 정체는 간단했다. 옷치긴 왕가 군인 것이다.
“설마 우리 앞에서는 담판으로 짓자고 해놓고 뒤로는 아조의 서북면을 칠 줄이야. 천하의 노왕께서 이렇게 나올 줄은 과인은 참으로 짐작도 할 수 없었네.”
“전하. 오해입니다. 이것은….”
“오해? 오해라면 무엇이 오해란 말인가?”
마포이는 식은땀이 줄줄 흘리는 이마를 소매로 닦으며 대답하는데 이전과 달리 결국 말을 흐리는 것이 그가 매우 난처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려의 서북면이 공격 받았다니 설마 동요국이…. 아니 광녕로부사(야율설도)가 이제와서 군대를 보냈을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우리의 군대 일것이 뻔한데, 테무케님이신가. 아니면 지부겐 님이신가?’
서북면의 사태는 마포이는 물론 카시다이조차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지만 어차피 일어난 것, 이것을 어떻게 대처하고 혹은 이용할 것인지 마포이는 식은 땀을 닦으면서 궁리했다. 그러나 마포이는 불행하였다. 특히 이번 사행에서 가장 큰 불행은 마포이 본인이 이번 회담을 맡은 일행의 정사(正使)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전하! 고려의 서북면을 친 것을 어찌 우리를 의심하시는지요? 전하께서는 어째서 애꿎은 우리를 겁박하시는 것입니까!”
왕검이 노골적인 발언에 정사가 호기롭게 외쳤고 다른 몽골인들도 이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포이만은 그 말이 나온 순간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였고 반대로 왕검의 입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마치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 비틀린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아조의 서북면을 친 것은 노왕 전하의 뜻도 군대도 아니란 뜻인가?”
“저, 전하. 이 사태는….”
“그렇습니다. 서북면이라면 전하와 우리가 분쟁을 일으키는 갈라전과도 떨어진 곳인데 어찌 이 문제에 군대를 보내겠습니까? 단연 거리를 보나, 위치를 보나 십중팔구 동요국이 친 것입니다.”
마포이는 뒤늦게 수습하려고 말을 열었지만, 그와 똑같이 몽골의 정사는 동의하였다.
역관이 둘 중 누구의 말을 우선으로 하였을지는 뻔했고, 왕검은 그 대답을 즉시 받아들였다.
“알겠네. 하긴 그대들은 노왕 전하를 대신하여 온 것이고 이 회담 자리 또한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양자의 합의하에 마련된 것인데 어찌 노왕께서 그런 짓을 벌였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그대들은 아조를 기망(欺罔)한 것만이 아니라 노왕 전하와 예케 몽골 울루스의 명예도 더럽힌 것이 될 텐데 말이야. 그대들에 대한 의심은 거두고 자리를 파하도록 하겠네. 회담은 여기서 끝을 내도 되겠지.
그리고 지금부터 저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전까지는 그대들의 말대로 동요국의 군대 혹은 도적 떼들이 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대응하도록 하겠네.”
몽골인들은 짐짓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회담은 그렇게 끝이 난 것이다.
왕검은 이미 현 상황에서 동요국이 한 것이라곤 몽골군이 서북면을 치기 위해 길을 통과시켜 주었을 뿐 군대 자체는 몽골군이라고 확신에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길을 열어주는 것이 테무케와 협력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테무케와 적대할 수도 없는 동요국의 최선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미 지난 전쟁에서 옷치긴 왕가의 손절을 경험한 야율설도가 길을 열어주면서 전후 이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을 하지 않을 리 없다.
즉, 생각대로 침략한 군대가 옷치긴 왕가의 군대일 경우 지금부터 생기는 문제는 순전히 옷치긴 왕가가 감당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몽골 정사의 말은 이후 옷치긴 왕가에 해가 되면 되지 득이 될 것은 없었다.
* * *
‘문제는 이것도 고려가 전쟁을 무사히 승리하였을 경우인데.’
그 생각을 하자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현재 상황은 좋지 않았다.
서북면에는 이자성이 있다고 대답하기 무섭게 김방경은 이자성의 군대가 패하였다고 대답했다. 아직 정확한 보고가 올라오지 않아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는 몰라도 만약 이자성의 군대가 전멸하였다면 지금 북방에서 몽골군의 진격을 확실히 막을 자가 있다고는 나도 확답할 수 없었다.
물론 믿을 만한 명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서경을 지키는 건 김경손이다. 그라면 야전군만 있다면 능히 해볼 만하긴 하지만… 아니. 역시 아니야. 서경은 사실상 나의 본진이다.
거기다 내 관할 내 영토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곳이라 거길 잃는다면 지금까지의 계획이 상당수가 엉망이 돼버려.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몽골군이 하나의 군대로 뭉친 채 남하한다면 그나마 그것만 꺾으면 끝이지만 몽골군이 군을 3개나 2개로 나누어 남하한다면 그때는 김경손 혼자서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서경기의 병력은 동원하지 말고, 김방경도 뒀어야 했나.’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다고 성에서만 수비를 고집하라고 지시를 내릴 수도 없었던 것이 야전에서 몽골군을 가만히 놔둔다면 어떤 꼴이 나는지는 원 역사 여몽 전쟁 과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번 동모산의 승리는 말짱 도루묵이었다.
갈라전 영토 조금 넓히고, 고려 국토가 초토화가 된다? 누가 더 손해인지는 뻔한 문제다.
단순 인적 피해와 물적 피해만이 아니라 겨우 진정시킨 민심이 다시 요동치는 것부터 걱정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에는 ‘그래도 이쪽은 영구적으로 영토 넓힌 것이니 피해야 복구하면 그만이니 이득이다.’ 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3차 여요 전쟁처럼 이번 하나로 끝이 난다면 모르겠지만, 이쪽이 싸울 잠재적 적국은 옷치긴 왕가 따위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몽골 제국이란 점 때문이다.
여기서 패를 많이 보이는 것은 장기적으로 나쁜 셈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번에 받은 영토를 돌려주거나 혹은 갈라전 확장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낫겠지.
‘이 사태를 막기 위해 이자성을 둔 것인데 옷치긴 왕가 상대로 패할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는데, 이자성이 이끄는 병사들이 교체를 했다곤 하나 최전선에 배치한 만큼 나름 정병(精兵)들인데 그런 병사들을 이끄는 이자성을 격파할 만한 장수라니… 그런 인재가 옷치긴 왕가에 있었던가?’
결국 가장 시급한 것은 서북면을 침공한 적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직접 서북면으로 가기로 하였다. 일단 회담은 끝냈고 돈화시와 닝안시, 이남까지는 고려의 영토로 확답받았다.
이것만으로도 회담에서 얻은 것은 있는 셈이다. 이후 서북면과 테무케의 반응에 따라 다시 토해낼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그 때문에 옷치긴 왕가가 계속하여 싸울 태세인 것을 생각하면 군대를 전부 빼낼 수는 없지만, 아직 여기 있는 몽골군이 아직 서북면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지금이 내가 고려로 무사히 돌아갈 기회란 뜻이다.
그리고 고려 서북면으로 향하던 길을 떠난 다음 날 나는 서북면을 침공한 몽골군의 지휘관의 정체를 알수 있었다.
“몽고군의 지휘관이 노왕의 장자 지부간(只不干)이라고?”
“그렇다고 하옵니다.”
‘테무케의 장자라면 타카차르의 부친인가? 처음 들어보는데 그런 장수에게 이자성 같은 명장이 패했다고?’
그렇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몽골의 명장을 전부 외우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인 인재가 몽골에 절대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우습다.
당장 정안연, 유갑수, 척인사도 내가 역사를 개변하면서 그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경우에는 이자성이 무명 장수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미처 모르는 명장에게 패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되면 기록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역으로 그 능력도 미지수라는 건데 귀찮게 됐네.’
“그래서 상장군은 무사한가?”
“이 상장군은 지금 안의진(安義鎭 오늘날 평안북도 구성)으로 들어갔다고 하옵니다.”
“으음?”
* * *
옷치긴 테무게의 장자 지부겐은 일찍이 부친인 테무케와 함께 몽골제국 형성기에 참전하였다.
그 덕분에 당연히 테무케의 아들 중에서도 전장의 경험이 압도적이었고, 많은 장수들을 만나보았다. 그리고 지금 지부겐은 오늘 자신에게 패한 고려군이 보인 것이 인상이 남았다.
“예?”
“오늘 나와 맞붙었던 고려 기병들 말이다. 나를 잡으려 들기에 이리저리 유인하여 중군을 무너뜨리는 데 이용하지 않았나?”
“예. 제법 고생했지만 결국 걸려들어 농락당하는 것이 참으로 재밌었지요.”
“그래. 갑자기 움직임이 달라진 것을 보면 장수가 달라진 것 같은데 그때부터는 유인책도 쉽게 걸리지 않았고, 겨우 유인을 하여 중군과 한꺼번에 잡으려 하였는데도 그들은 곧바로 군대를 빼내 주력을 온존하여 도주했다. 나도 아직 미숙하군.”
“지부겐 님께서 미숙하다고 하시다면 세상에 미숙하지 않은 장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번 전투도 대승이 아닙니까?”
부하의 말대로 이번 전투는 몽골군의 대승이었다. 고려군은 3할이 죽었고, 2할이 부상을 입었으며, 중군을 지휘하던 주 부장도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부겐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수부타이 장군이라면 이번에 적장도 잡았을 것 같은데?”
“…그분은 예외로 하시지요. 그리고 이번에 군을 지휘한 고려 장수는 듣자 하니 이자성이라는 장수라고 합니다. 그는 지난번 전쟁에서 우리 군이 패한 전투의 고려군 장수 중 하나이니 무명소졸은 아닙니다. 고려의 명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평소부터 지부겐 역시 오랜 전장의 경험과 전술 능력도 어디 가서 모자란다는 소리를 들을 일이 없는 예케 몽골 울루스의 명장이라고 부하는 확신했지만, 그 비교 대상이 수부타이가 된다면 어쩔 수 없었다.
떨어진다고 해도 수치가 되지 않는 상대는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수부타이가 그 경우에 해당했다.
마지막 남은 사준사구. 오늘날의 예케 몽골 울루스를 만든 백전 노장. 틀림없는 최고의 노장과 비교해서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탓하는 것은 설령 대칸이라고 할지라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번 승리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은 지부겐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승리와 별개로 정작 가장 신경 쓰이던 적장은 주력에 해당하는 기병을 보존한 채 피신하여 후방의 위험은 아직도 산재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귀찮게 됐군. 후군과 합류 후 다시 움직이도록 하겠다.”
“합류라니요? 기존 계획대로라면 나누어 남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본래 계획대로라면 적의 야전군을 격파한 뒤 3군으로 남하하여 고려를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부겐은 고개를 저었다.
“징발한 한인 병사들이 예상 이상으로 나약한 데 반해 적은 예상 이상으로 뛰어나고 오늘 보여준 적장의 실력과 기병들이라면 어쭙잖게 병력을 나눈 채 남하가 되면 각개격파 당할 우려가 크다. 다소 번거롭지만 하나로 뭉쳐서 남하한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가실 생각이십니까?”
“…서경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