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290
290화
33장 한계
느긋한 마음으로 숙면을 취한 마포이는 다음 날, 고려 병사들이 협상장을 만드는 것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이 회담인데, 귀국 측의 정사는 아직도 오지 않은 것 같은데 혹, 그대가 대표를 맡는 것인가? 나야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만….”
이장용에게 그렇게 말은 하는 마포이였으나 그의 품계를 생각하면 정사가 될 가능성은 적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장용도 이해하고 있었다.
“하하하.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마공께서는 부디 느긋이 기다려주시지요.”
“알겠네.”
정사가 오지 않는 이상 협상을 시작할 수 없었던 지라 마포이도 그 말대로 협상장이 만들어지는 것을 느긋이 기다렸다.
‘어차피 급한 것은 고려 측 일터, 초조해 할 필요는 없지.’
그는 이번 고려 측의 대표가 누가 될지 궁금했다. 우선 그 여진병마사가 가장 유력했고, 다른 후보를 꼽자면 고려 태자와 함께 왔던 장수 중 한 명 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누가 오더라도 이 협상에서 유리한 측은 자신들이라는 상황이 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며 느긋이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때 이장용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마 공께 알려드리는 것이 늦었군요. 아조의 서북면에서 일어난 소란은 지금 모두 해결된 상태입니다.”
“풋. 쿨럭! 쿨럭! 쿨럭!”
이장용의 그 말에 놀란 마포이는 마시던 차가 사레가 들려 한참을 기침 끝에 겨우 진정되자 곧바로 정색하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였는가?”
“아조의 서북면에 일어났던 소란이 해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서쪽의 소란이라니? 그럴 리가….”
요동에서 들려온 보고에 따르면 그 병력은 2만이 넘는다고 하였다. 고려의 야전군도 격파하였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마 공께서는 아조를 너무 얕보시는 것이 아니 신지요? 고작 도적 떼들을 소탕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 이상하게 여기시는 것입니까?”
“뭐라?! 도적 떼! 자네 지금 도적 떼라고 하였나! 그 말이 무슨….”
아무리 전쟁 중이라곤 하나 지부겐은 고려에게 있어서 상국의 황족이다.
그런 지부겐이 이끄는 군대를 도적 떼라고 폄하하는 것은 아무리 고려가 주도를 잡았다 한들, 마포이라도 그냥 넘길 수 없어 따지려 했으나 이장용이 한발 먼저 그 말을 자르며 선수 쳤다.
“지난 회담이 끝날 때… 아니, ‘중단’되었던 회담에서 마 공의 일행분들께서는 분명 ‘서쪽을 친 것은 동요국’이라고 하였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 그랬지. 분명 우리들은 동요국일지 모른다고 하였지. 그러나 동요국이라고 해도….”
“그리고 그 말이 나온 직후 아태자 전하께서는 ‘명확히 판단 되기 전까지는 도적 떼로 간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기억하십니까?”
거기까지 말하자 마포이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다음 말은 예상대로였고, 그것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직 소탕한 군대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지난번에 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파악하기 전까지는 아조는 서쪽을 침공한 군대를 도적 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마 공께서는 알고 계신지요?”
“…그, 그러니까. 음, 고려에서는 아직 모른다는 말인가?”
“예.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회담의 대표께서 그 실체를 파악하실지 모릅니다. 동요국일지 아니면 간 큰 도적 떼일지, 혹은… 아니, 그것은 회담이 재개되면 해야겠지요.”
“그, 그런가? 그런데 말이네. 그 고려의 서북을 친 군대가….”
지부겐군이 갑자기 회군을 하였는지 아니면 고려군에 대패를 하였는지는 몰라도 고려 밖으로 나간 것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곤란했다. 구체적으로 지금부터 있을 협상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리한 패들을 잃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것을 알기에 마포이는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서쪽의 일을 파악하고자 이장용을 추궁하려 했다.
바로 이때,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사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서쪽의 진상을 어떻게든 파악하고, 이 사태 또한 어떻게 넘길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마포이는 협상의 시작을 알리는 어사의 도착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얌전히 그리고 예의를 다해 고려 조정에서 온 어사에게 인사하였다.
어찌 되었건 조정에서 직접 보낸 어사가 당도했으니, 협상을 미룰수 없었고, 조정에 보낸 만큼 그만큼의 격이 있었으니 말이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정안이라고 하오. 마 공께서 많이 기다리신 듯하여 부끄럽소이다.”
“늦었다니 아니오. 개시하기로 한 시간까지 아직 2각(약 30분)이나 남았소이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소이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
그렇게 말한 정안은 곁에 있던 이장용을 보며 물었다.
“그대가 동궁 중사인 이장용인가?”
“그렇사옵니다.”
“어명을 받들라!”
정안의 말에 이장용은 바로 무릎을 꿇고 경청의 자세를 취했고, 그런 이장용에게 정안은 칙서에 적힌 것을 들려주었다.
칙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중서인 이장용을 어사중승(御史中丞 종4품)의 직을 내려준다는 것과 동시에 이번 회담에도 (사실상 부사副使로서) 참가할 수 있게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제서야 마포이는 처음부터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협상을 재개한 것 자체가 함정이었구나!’
마포이는 이장용을 째려보았지만, 이장용은 어제 그가 보여준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노왕 전하께서 급히 서두르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바로 협상을 시작할 테니 부디 마 대인께서는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 * *
“지난 회담의 자료는 전부 보았소이다. 여기 적힌 대로라면 마공께선 이미 한 차례 인정하였다고 되어 있소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발해국과 고려의 연관이 있으니 갔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으로, 우리의 뜻은 확답하기는 힘들다는 것이오.”
“음? 그 말에 대해서도 지난번에 나왔소만?”
“…그렇소. 하지만 역시 생각해 봐도….”
“즉, 지난번에는 납득했으나 불만이니 전부 처음부터 하자는 말이오?”
“…….”
마포이가 입을 다물자 정안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허. 허허. 누가 봐도 아조의 승리였는데 아조의 땅을 내놓으라?”
협상 자리는 마포이의 우려대로 강력한 우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패가 대부분 사라지면서 협상장의 전세는 고려에게 기운 것이다.
지난번 협상 자리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마포이는 포기하지 않고 임무대로 혹은, 하다못해 손해를 덜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정공. 솔직히 말하겠소. 불과 수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몽골은 귀국이 거란 놈들에게 당하였을 때 병력을 보내 함께 싸워 거란을 격파한 은(恩)이 있지 않소?”
“그랬소. 하여 아조가 지금 대국을 상국으로 모시고 있지 않소?”
“그렇소. 그렇게 관계를 맺고 난 후 고려는 우리 예케 몽골 울루스를 위해 동진국을 칠 때는 태자를 보냈고, 동요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우리에게 보고하여 대칸께서는 귀국에 큰 상을 주었소. 그렇게 양국의 우호는 관포지교(管鮑之交)에 비길만하였는데 어째서 지금에 이르러서 이 모양이 되었단 말이오.”
“이 모양이라….”
정안이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이없다는 어조로 답했다.
“모양새가 흡사 아조의 잘못인 듯하여 잠깐 생각해 봤소. 이번 사태에 대해 제대로 논하자면 지금 노왕 전하께서 주장하시는 땅부터가 바로 대칸께서 아조에 하사하신 땅이오.
그것을 상국 황실의 어르신인 노왕 전하께서 부정하시면서 일어난 것인데, 이것은 상국과 아조의 관계가 아니라 노왕 전하와 아조의 문제이오. 더욱이 이 문제 또한 노왕 전하께서 아조만이 아니라 상국과 아조 간의 관계를 어지럽히게 만든것이 아니오이까?”
이에 마포이는 입을 벌리려 했지만 정안이 조금 더 빨랐다.
“그리고 좀 더 말하자면 서북면에 일어난 일들 또한 어째서 일어났는지 세세히 파고 들어가야 하는데 당장 언급하지 않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마 공께서는 부디 알아주시오.
사실 이 모든 것은 지난 회담으로 겨우 마무리하였던 것에 소란을 틈타 다시 불을 지펴진 격인데, 서쪽 소란이 해결되자 과거의 은을 운운하면서 아조에 입힌 피해는 넘어가고, 땅까지 취하겠다고 하는 것이오. 이게 말이 된다고 하는 것이오?”
마포이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고, 맞는 말인 것도 알아 얼굴만 붉히며 침묵했다.
명령대로 하고자 노력은 하고 있으나 이 상황에서 협상의 주도권을 가진다는 것은 무리였을뿐더러 임무를 달성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그럴 것이 지금 옷치긴 왕가는 고려의 요청을 거부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예케 몽골 울루스 좌익(佐翼)에 해당하는 옷치긴 왕가에게 있어 굴욕이 아닐 수 없으나 정말로 지금 옷치긴 왕가에게는 고려와 싸울 병력이 없었다.
물론 테무케 본인이 있는 땅에는 병력이 있었고, 현재로도 모이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병력들이 모이기만 한다면 기병만 해도 1만 이상이 된다. 거기에다가 최고 고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테무케와 자식들, 그리고 천호장들도 대다수 살아 있었다.
여기에 더해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절대 완전히는 벗어날 수 없는 동요국까지 염두에 둔다면 옷치긴 왕가의 힘은 여전히 고려가 우습게 볼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예케 몽골 울루스의 일원이라는 입장은 고려에서도 경계하고 행동에 큰 제약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경시하지 못할 전력(戰力)과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작 목표였던 영토 점령을 하기 위해 투사할 병력이 없었고, 설령 시간을 끌어 병력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번 전쟁에서 보낼 병력은 잘해야 한 번, 그마저도 서북면을 친다면 고려에 피해는 줄 가능성은 있을지언정, 그에 비해 얻는 것은 없을 것이고, 갈라전을 친다고 하더라도 대비를 하고 있는 만큼 성공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것 때문에 마포이는 반격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 타협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거기다 자신들은 이미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설령 고려가 자신들의 본진을 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길게 끌게 되면 안 그래도 조정에서 이쪽을 경계하는 시선이 악화될 우려가 있었고, 피해를 입게 되면 다른 왕가들이 일어설지 몰랐다.
무엇보다 대칸이 돌아온 후 대왕의 독단과 고집을 좋게 보지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 마포이가 타협을 궁리하고 있을 때 더욱 쐐기를 박아넣은 것은 정안의 다음 말이었다.
“그리고 방금 말한 서쪽의 일은 얼마 뒤, 태자 전하께서 오실 것이니 그때 차차 상의하도록 하시올시다.”
“태자? 지금 태자 전하가 오신다고 하였소이까?”
서경으로 돌아간 고려 태자가 어째서 여기서 언급이 된단 말인가?
깜짝 놀라 반문하는 마포이에게 정안은 냉정히 답했다.
“그야, 서쪽의 일을 해결한 분이 바로 태자 전하이시니 그런 것이 아니오? 물론 그러한 만큼 서쪽에 소란을 일으킨 군대도 태자 전하께서는 잘 아실 것이오.
그러니 이렇게 길어진다면 전하께서 오신 뒤 그때 서쪽일까지 함께 이야기하자는 말이오. 덧붙여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서북면으로 아조의 대군이 또 갔으니 도적이건 외적이건 다시 온다하더라도 그대는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소.”
“…귀국 측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오.”
현명한 마포이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이제 손에 넣지 못한 것에 아쉬워할 때가 아니었다.
빨리 최소한의 대가라도 더 내줘서라도 끝을 내지 않으면 고려에서 먼저 움직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방향으로 굳힌 직후 마포이는 생각했다.
‘부디 여기서 나가 내가 대왕을 뵙기 전에 목이라도 무사히 간수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