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390
390화
9장 치세 속의 준비(2)
“알았다. 그렇다면 풍구는 보급할 수 있겠구나. 그런데 그대들은 이 탈곡기는 보수할 수 있느냐?”
“예? 가, 가능하옵니다!”
얼떨결에 대답한 구석이 없잖아 있지만 그 대답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렇다면 이것은 민가에 보급할 정도로 만들지 못하고, 민가에서는 수리하는 것도 어렵지만, 적게나마 만들 수는 있으며 수리할 수 있다는 것이구나. 하면 탈곡기는 왕실어료지 및 공전에 배치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겠구나.”
전근대의 기관총이라는 폴리볼로스는 만들기도 어려울뿐더러, 잦은 고장의 우려로 포기했지만 탈곡기는 다르다. 전장과 달리 탈곡기는 도중에 고장 나더라도 사람이 다칠 일은 적고, 큰 문제로 번질 일도 적으며, 시간이 걸려 고쳐도 큰 지장이 없다.
전국 보급이 어려우니 일단 왕실어료지 위주로 배치하자. 왕실어료지에 배치한다면 그 수리에 드는 돈도 왕실 재산에서 해결되니 관아에 배치하여 수리하는 것에 비해 국고의 부담도 덜어질 것이고 말이다.
현재 내 전답(田畓)에서 쓰이는 인력은 적지가 않다. 비록 가장 쓰이는 인력은 모내기법을 할 때 물이 마를 때 다시 채우기 위해 퍼다 나르는 인력이라, 탈곡기는 그것에 영향은 주지 못하겠지만, 탈곡할 때만이라도 인력을 줄일 수 있다면 써보고 싶긴 하다.
‘설령 유지 보수에 드는 비용이 더 나간다고 하더라도, 계속 남겨서 만들고 수리하게 하면 후일보다 제작하거나 수리하는 데 도움 되는 기술이 만들어지겠지. 그것만으로도 남길 가치는 있다.’
“우선 이 풍구와 탈곡기는 조정에도 보고할 것인데, 말로만 보고하는 것으론 부족할 것 같구나. 진상하기 위해 추가로 제조토록 하라.”
내 지시에 공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어지간히 힘든 듯하다.
“그리고 이것 외에도 새로 만들 것이 있다.”
또 만들 것이 있다는 말에 공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침묵한다. 하지만 이번에 만들 것은 탈곡기보다 만들기 쉬운 거다.
“안심하라.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풍구와 비슷한 원리로 차오른 물을 푸는 것으로, 이것이 만들어진다면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이번에 부탁할 것은 물풍구다. 물풍구는 통속에 물을 가두고 활대로 빨아올리는 연장이다.
굵은 대나무의 속으로 뚫어 대롱으로 만들거나 나무판자로 네모 난 통을 만들고 그 속에 활대를 끼우는데, 이 대롱이나 통은 실린더가 되고 활대는 피스톤의 역할을 한다.
물풍구로 1시간에 2∼3톤의 물을 풀 수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 성능 자체는 용두레나 맞두레가 훨씬 뛰어나다. 용두레는 혼자서 1시간에 15~20톤을, 맞두레는 두 사람이 5∼7톤의 물을 퍼올릴 수 있기 때문에 성능 자체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두레들보다 성능은 떨어진다. 그러나 두레들은 각자 사용하는 곳이 정해져 있으며, 홀로 사용하기 힘든 데 비해 이것은 대부분 사용할 수 있으며, 사람 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보급된다면 민생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만들라고 하는 것이니 그대들이 노력해 주었으면 하는구나.”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뭐, 공인들 입장에서 태자가 시키는데 본부대로 한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긴 하겠지만 고마우니 슬슬 당근을 주자.
“음. 좋다. 그렇다면 우선 이 풍구와 탈곡기를 만든 상부터 내려야겠지. 여봐라. 이번에 이것들을 만든 공인들에게 각자 무명(緜布) 3필씩을 하사하라. 또한 이후 마땅히 황상께도 고하여 경들에게 관직을 내리도록 청해보도록 하겠다.”
“저희를 믿고 제작시켜 주신 것만 하여도 가문의 영광일진대, 상에 관직이라니, 너무 과분하여 받을 수가 없습니다.”
“너희들이 만든 이것은 나라에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상을 받을 가치는 충분히 있는 것인데, 내가 적절히 보상을 내리도록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가 이런 것을 알아봐 주고 만들려고 하겠느냐. 받도록 하라.”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명예직에 불과한 무산계에 불과하긴 하나, 공인들도 관직을 받을 수는 있다. 이렇게 공인이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으면 관직을 내려 공인들의 공을 인정하고 높이는 일을 자주 보여준다면, 공인을 천대하는 기조가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 * *
동경.
“날도 추운데, 뜨뜻한 고기 국밥 좀 주시오.”
장사를 위해 고려로 넘어온 일본 상인 둘이 손을 호호 불며 장터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자 이윽고, 고기와 기름이 둥둥 뜬 국밥이 2그릇 나왔다.
용강상단과 연계되어 설립된 주막이나 지점 겸 식당에선 국밥 종류를 만들어 팔고 있었는데 인종을 막론하고 잘 팔렸다.
실제 이 둘은 이미 국밥에 익숙한지 수저를 들고 평상에 마주 앉더니 이내 한 명이 말했다.
“그래서. 아까 전에 말한 건 무슨 소리인가? 조만간 장사를 접어야 할지 모른다니?”
“겐토쿠(顯德院 고토바 법황의 작중 시기 시호) 법황께서 돌아가신 이후 뭔가 전국이 어수선하지 않은가? 그 어수선함이 이제 큐슈에도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고 하니 화난이라도 당하기 전에 장사 일은 관두고 다른 일도 알아봐야 할 것 같단 말일세.”
그리 말하곤 국밥에 익숙한 듯 새우젓갈을 국에 풀어 한 숟가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먹는 동안 그와 동행한 상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젓갈을 풀며 말했다.
“그 정도로 심한가?”
“아닐 말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하네. 엔오(延應) 원년(1239년) 겐토쿠 법황께서 돌아가신 후 그 유해를 운구하던 중 풍랑을 맞아 사라진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조정에선 어떻게든 상황의 유해를 찾아보자고 사람을 보낸 것 같은데, 그에 동참한 이들의 행적이 죄다 묘연해졌다고 하네.
이를 두고 누군가는 법황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죽어 원령이 되어 저주를 내린 것이라고 하고, 혹자는 헤이케의 잔당들이나, 아쿠토들의 소행, 혹은 황실의 소행이라는 말도 나왔지 않은가?”
“그렇지. 그렇게 말하였지. 하지만 헤이케 잔당이라니. 전쟁이 끝난 지가 벌써 50년이 넘었는데….”
그 전쟁이란 1185년에 일어난 겐지 가문인 미나모토 가문과 헤이시 가문의 다이라이 가문의 전쟁, 통칭 겐페이 전쟁 (源平合戦) 을 말한다.
이 전쟁으로 미나모토 가문은 조정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고, 덴노는 조정의 권력을 위협받게 되어 1221년 고토바 천황(현 겐토쿠 법황)이 조큐의 난을 일으키는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조큐의 난에서마저 패배하면서 일본의 권력은 완벽히 황실에서 떠나 무사 세력으로 넘어간다. 또한 이 조큐의 난에서 큰 활약을 한 호죠 가문은 쇼군마저 허수아비로 만들 정도로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그러니 아직 소문에 불과한 게지. 문제는 지난 고려의 함선이 출몰하면서 밀상들을 이송한 것과 유해 사건이 사실 엮인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흐른다는 것이 문제네.”
“엮인 것 같다니?”
“이 또한 아직 소문에 불과하나, 현재 조정에선 큐슈의 밀상들이, 고려와 조정의 지시를 어기면서도 무역을 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음모가 있다고 본다는 게야.”
“…음모라니? 설마 밀무역하는 놈들이 조적(朝敵=역적)일지 모른다는 겐가?”
그리 반문하는 이는 큐슈의 상인이 아닌 대마도의 상인이었지만 그도 큐슈에서 밀무역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 행위가 역적 짓이나 국가전복 같은 거창한 것 때문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근래 들어 일본이 바다를 통해 장사할 수 있는 길이 변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그렇게 볼지 모른다는 소문이지. 소문들이야 허무맹랑한 것들이 많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실제가 어떻든, 조정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고 반응하냐가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야토(隼人)의 반란 모의 같은 말도 안 되는 것조차 조정에서 그렇다고 하며 잡아들이면 우리들은 아무것 못하니 말이네.”
하야토는 큐슈 남주에 있던 이민족으로 오랫동안 독립과 정체성을 유지했으나 잦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에 관련된 마지막 기록조차 400년이 넘은 상태였다.
이미 하야토라는 정체성이나 존재는 사라진 상태였기에 그야말로 허무맹랑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하야토의 반란 모의 소문에 비하면 겐페이 전쟁 이후 살아남은 헤이케의 잔당이라거나 고토바(겐토쿠) 상황(법황)의 세력과 연관되었다는 음모론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으음.”
“여튼 헤이케 잔당인지 아니면 요시츠네 님의 잔당인지, 원령이 되신 겐토쿠 법황 님의 추종자들인지는 몰라도, 남큐슈의 상인들은 불안이 이만저만이 아닐세. 밀무역하던 놈들 때문에 애꿎은 다른 남큐슈의 상인들도 고생이니. …에잇. 여기 술도 하나 주시오!”
“술은 내가 사줄 테니 그 외에 쿄(京=수도)의 소문이나 분위기에 대해선 아는 것 없나?”
“들리는 말로는 쇼군께서 이번 일을 예의 주시한다는 소문이 들리고는 있는데 나도 더 이상은 모르네.”
남큐슈에서 온 상인은 그 말을 끝나기 무섭게 나온 술을 화를 풀 듯 벌컥벌컥 마시는 것으로 풀었다.
* * *
해가 지나 정조사를 보낸 지 얼마 뒤의 고려사가 돌아왔다. 출발한 지 불과 10일.
아마 역대 사신단 중에서도 손꼽히는 단기 귀환이 아닐까 싶다. 축객령이라도 떨어졌나 싶었으나 그것은 아닌지, 우리 사신들과 함께 남송의 사신들도 같이 왔다.
심지어 남송 사신단이 탄 배는 우리 배도, 기존 타고 왔던 배들도 아니라 과거 북송 시절 서긍이 타고 왔다던 거대한 신주(神舟)라는 배 3척이었다.
전라도에서 이 거대한 신주가 당도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고, 나아가 서경에도 전해지자 나는 또 신속히 강화도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아슬아슬하게 송 사신단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어, 사신단이 올 때 나도 동석하였는데, 고려 사신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남송의 사신이 와서 칙서를 읊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예상 이상이었다.
“아, 고려대왕 철은 들으라. 짐이 즉위한 이래 천도(天道)를 봉행하여 인(仁)이 만방을 덮고자 하였고, 봉작(封爵)의 은혜가 멀다고 해도 미치지 않으려는 곳이 없게 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짐이 부덕하여 천지가 어지러워 근심이 끊이지가 아니한데, 지금 고려왕 그대가 나라에 널리 덕을 펼치고 있어, 사방 천지가 어지러운데 오직 동쪽 번병(藩屛)만은 평온하다.
이번에 불미스러운 사태가 일어났으나, 그 일에 악의가 없었고, 본조의 사신이 언급한 난잡한 충언(忠言)과 오해로 어지럽혀질 뻔하였음에도 전후를 파악하고, 법도에 따라 슬기롭게 대처하였으니, 실로 예와 법, 그리고 충을 알고 있다고 하겠다.
이 일은 고려는 성헌(成憲)이 구존한 것을 잊지 않고 예와 법을 지켰으니, 이것이 동방에는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해동에는 군자국이 있고, 군자국이란 고려로, 고려가 바로 예의지국(禮義之國)임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공적과 처리가 이러하므로 이번 사태는 없었던 것으로 할 것이다. 또한 근래 들어 고려의 고충을 짐이 들은바, 경의 그 뜻은 짐의 뜻이고 하니 내정(內政)에 마땅하고 치화(治化)에 도움이 있으리라.
이에 특별히 짐은 고려 대왕이 능히 이를 통어(統御)하여 근심될 바를 뿌리 뽑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 노고를 장하게 여겨 은자 1백만 냥을 하사하니 보태도록 하라. 또한, 고려에 해동을 통어할 충분한 권위를 주고자 하노라….
칙사가 낭독하는 칙서를 들으면서 도대체 뭔가 싶었다.
막대한 하사품이야 예상한 거지만 권위라니? 연호를 대처할 것을 달라고는 했지만 이건 정말로 남송에서 무언가를 내려달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이전처럼 막대한 하사품이나 주고, 이후 우리가 내부적으로 권위 상승을 위해 하는 것을 눈치채더라도 어지간한 건 눈감아 달라는 건데, 이번에 100여 년 전에도 2척만이 왔다던 신주를 3척이나 끌고 와 대처할 것을 주겠다니?
도대체 남송이 우리 고려에게 무슨 권위를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평왕이라는 왕작보다 위인 게 뭐가 있다고 연호를 대처할 만한 것을 남송에서 준단 말인가? 주기적으로 예폐라도 주겠다는 건가?
…그런데 진짜였다. 예폐는 아니었지만 남송은 우리에게 진짜 연호를 대처할 것을 주었다.
물론 칙사가 들고 온 하사품도 평상시보다 막대했다. 그러나 단순히 막대한 하사품만이 아니었다. 고려왕을 책봉하는 임명장과 더불어서 그 주인(朱印)과 장복(章服)을 비롯한 의례품들도 들고 온 것이다.
그것도 그냥 장복이 아니다. 본래 번왕의 장복은 오장복(五章服)이거나 잘해야 칠장복(七章服)이 원칙이고, 이등체강(二等遞降)에 적용되던 고려와 조선조차 내리는 것은 친왕이나 태자급인 구장복(九章服)이다. 이 위로는 오직 천자만이 입을 수 있는 십이장복(十二章服)뿐이다.
그런데 지금 내려온 장복은 십장복(十章服)이다. 즉, 이 장복은 전례와 근본이 없는 옷이지만 명백히 태자보다 격이 위에 속하는 옷인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란 일이지만 여기에 더해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책봉한 관직명이다.
“…지금 패자(霸者)에 봉한다고 하였는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패자(霸者)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