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392
392화
10장 떡 하나 더 받다(2)
“으음….”
“예로부터 패자를 자칭하고 불린 이들 중 진정으로 천자가 된 이는 없으니, 이는 역사가 패자는 천자가 되지 못하고,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소. 그러니 이 기회에 왕도를 따르는 본조가 패도를 걷는 고려를 거느리는 것을 만방에 알려, 패자란 아무리 높아도 왕자(王者)보다 못하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오.”
이 말은 이번 고려의 행동을 인정하면서, 황제의 덕치를 패자보다 위에 있음을 추켜세우며, 이후로도 왕도와 패도를 천자국과 제후국으로 연관하여, 상하의 관계를 명확히 하자는 뜻이었다.
성리학적으로는 성리학의 이상이 패도보다 위라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고려는 그럼에도 제후국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또한, 당대 고려왕에 대해선 지금의 처신을 보아 믿지 않을 수 없소. 그러나 왕질과 왕검 태자 이후도 지금 같을지는 나도 믿을 수 없소.
오늘의 공순한 자가 내일의 흉포한 자가 되고, 오늘 몽고에 움츠러든 나라가 장래에는 몽고와 같은 나라가 되지 않는다는 장담을 누가 할 수 있겠소?
하물며 이적이란 본디 믿는다 싶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배반하는 것이 습성이라 생각하는 나로선 장구히 신뢰할 수가 없소. 그러니 패자라는 작위를 내려 본조와 해동의 관계를 제대로 수립하고, 나아가 언제나 경종(警鐘)을 울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오.”
“고려가 대송의 충직한 번신으로서, 패자이되, 역성을 꿈꾸지 않는 충직한 번신으로 남고자, 스스로의 언행을 조심하고 본조의 중구의 일방을 수어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오. 그리고 본조 또한 주왕의 사례가 되지 않고자 이적인 고려를 대우하되, 경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양국의 관계를 지속하고 평안을 길이 보존하는 방도… 란 말이오?”
“그렇소.”
이른바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것처럼 패자란 지위를 고려에게 주는 것은 ‘상’인 동시에 처신을 조심하라는 ‘경고’이며 ‘폭탄’이었고, 남송 스스로에게도 하는 경고라는 뜻이었다.
이런 정청지의 주장들은 고려를 경계하는 이들에게도, 성리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그리고 국가적 위상을 높이려는 신료들에게도 썩 듣기 좋은 내용이었던 것이다.
“…정 승상.”
“왜 그러시오?”
“솔직하게 알려주시오. 이번에 고려를 자극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사숭지가 아무리 정청지에 비해 정치력이 떨어진다 하나, 좋든 싫든 정계에 오래 몸을 담갔고, 정청지와 정적으로서 대립한 자였다. 구체적인 논리는 없어도 정청지가 지금 일부러 고려를 자극하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정적의 지적에 정청지는 처음으로 인상을 쓴 것인지 아니면 비릿하게 미소를 지은 것인지 모호한 표정을 짓더니 몇 초 후 대답했다.
“…황상께서는 우리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고려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분명하오. 이번 고려의 연호 문제도 어쩌면 황상과 고려 사이에 밀약을 맺은 것일지 모르오.”
“고려가 연호를 쓴 것은 수년 전이오. 수년 전부터 밀약을 맺고 있었단 말이오? 그건 너무 억측이 아니오?”
“단순 억측이라기엔 이미 조정의 결정과 별개로 상시로 오가는 상인들이 있지 않소? 그리고 억측이든 아니든, 이번 일로 조정에서 폐하와 우리의 입지는 더욱 달라진 것은 사실이오.”
“하면 그것과 이번의 일은 무슨 상관이오?”
이해를 못 하는 사숭지를 향해 정청지는 이번엔 확실하게 비릿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고려와 황상의 관계를 이용하든 단절시키든 우선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소?”
“?”
* * *
서북면 북계의 장성보다 북쪽에 위치하면서도 압록강보단 아래에 있는 지역, 소위 북계와 관련된 땅이라 하여 세간에는 ‘북관도(北關道)’라고 불리는 이곳은 현대 한국으로 치면 평안북도, 북한으로 치면 자강도에 속한다.
북관도는 3차 여몽 전쟁에서 동요국으로부터 얻은 이후 줄곧 고려에서 사람을 보내 개척과 관리를 시도하고 있다.
개척과 관리라곤 하나, 고려가 점령하기 전 본래 살고 있다는 주민들조차 대부분이 동요국이 세워지면서 중원이나 요동에서 이주 된 이들이 대부분이며, 그마저도 고려가 동요국을 칠 때 고려에 납치되어 많이 줄어든 실정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기에 이런 주거촌들은 고려가 사민하고 관리, 개척을 시작할 때 초기 근거지로 잘 이용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개척되던 고려의 관리도 한번은 위기를 맞았으니 바로, 4차 여몽전쟁에서 독단에 가까운 아리크부케의 침공으로 당시 담당하던, 충평공(忠平公) 채송년의 죽음은 물론, 그가 힘들게 이룩한 마을들도 많이 파괴된 것이다.
이렇게 고려의 변방 개척이 흔들리고 서북면의 방어선은 장성으로 후퇴하는 듯하였으나, 얼마 뒤 채송년의 동생 채화를 보내면서 고려가 방어선은 압록강으로 계속 유지하려는 의지를 제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죽은 형을 대신하여 부임 온 채화는 형이 죽었던, 초산진을 먼저 재건하고, 근거지로 하여, 요충지들을 선점하여 요새를 세우거나 이미 있는 요새들 경우 증축까지 하는 등 이후 외적이 다시 쳐들어올 경우를 대비하였다.
그러고는 지난 전쟁으로 입은 피해들을 복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무산계 승직과 조카와 자식들의 청탁을 거래로 북관도로 온 대장군 채화는 본래, 무장이 아니라 장인의 기술과 보물의 저장을 맡아보던 관청인 소부감(小府監) 소속의 관인이었다.
형이 전사하자, 그 자리를 이어받듯 대장군이 되어 부임하긴 했으나 당연히 무장이었던 형보다 더 어려움을 겪었고 피해 복구는 물론 관리와 개척도 쉽지 않았다.
특히 그를 힘들게 한 것은 채송년도 겪었던 남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추위와 맹수들이었다. 아무리 전근대 야외는 맹수들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근처에 인가가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의 차이는 컸다.
그런 점에서 북관도는 갈라전 이상 가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수들의 땅이었다.
“나리. 며칠 전 행방이 묘연하던 김 씨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이 무엇이냐?”
“훼손의 정도를 보아하니 심한 것을 보아, 멧돼지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손에 삼이 잡혀 있었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결국 삼을 캐다 죽은 게로구나. 그자가 여기 사민 왔을 때 삼이 많아 보인다고 좋아라 할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수습 후 장례라도 치러주거라.”
“알겠습니다.”
“나리! 전라도에서 온 감 씨가 방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 무슨 일이냐?”
“둔전을 일하러 간 감 씨가 하도 늦게 나와 가봤는데… 문이 열린 것을 보아 동사하여 죽은 듯합니다.”
“문을 제대로 닫지 못하면 죽는다는 걸 몰랐단 말이냐?”
“방안에 널린 술병들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술에 취해서 제대로 닫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알았다. 그도 김 씨와 함께 장례를 치르도록 해라.”
어지간하면 장례를 치르지 않고 그냥 처리할 수 있으나 원체 죽는 이들이 많으니 채화가 직접 병사들을 시켜 주기적으로 합장하여 장례를 치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형님께서 몽고 놈들과 항전한 것에 존경하였는데, 여기 온 이후론 항전한 것 이상으로 이곳의 추위와 혹독함 속에서 병사들과 번인, 인민들을 무사히 관리했다는 것이 더 존경스러워지는구나.’
“장군! 장군 계십니까?”
“또 무슨 일이더냐?”
“장군. 접니다. 오예입니다.”
본래 고려는 중앙의 영향력이 다소 떨어지는 지방 같은 곳은 지방관을 파견하고, 토호의 권리도 존중하고자 그들을 호장으로 삼아 지방을 관리하는 것이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 초기부터 내려온 통치 방식이었다.
그러나 원 역사와 달리 전쟁으로 새로운 땅들을 급진적으로 대량 확장하면서 기존 지방관과 호장들의 방식만으로는 지방을 관리와 개척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갈라전이나 북관도 같은 곳은 어느 곳도 토호들이 있어도 인적이 닿지 않고, 개척도 해야 하는 땅들이 많았다. 지형은 험하고 야수들도 많아 사실상 미개척지라, 단순히 지방관을 파견하는 수준으론 제대로 관리 통치가 힘들었던 것이다.
실제 그나마 동하국의 신경과 관리가 있었고 족장들도 많았던 남갈라전만 하여도 단순 지방관으로는 힘들어 아예 이안사라는 새로운 고려 토호를 만들어 기존 토호들을 내외로 조율 관리하는 방도까지 마련했다.
이마저도 지금도 지방관의 능력보다 토호(여진족)들의 자치에 가까운 실정이라 장성이북 갈라전은 아직도 외지라는 인식도 팽배한 수준이었다.
하물며, 갈라전보다 더욱 사람이 적고, 기존 주민들조차 외인들에 토호들의 힘도 약하며 야수들 천지, 미개척지 서북면의 북관도 같은 경우에는 문관인 지방관만을 파견하는 것으론 택도 없었다. 사실상 고려의 병력만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즉, 지금 고려에선 변방일수록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이들은 문관이 아닌 무장을 겸하거나 아니면 무장과 함께 파견하되, 문인보다 무인이 상사로서 파견하는 것이 일상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북관도로 부임 온 채화 또한 문인 한 명과 함께 온 것이다.
“아, 오 판관인가? 그래, 무슨 일인가? 설마 또 고라니나 멧돼지가 창고를 헤집어 놓은 건가?”
채화는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겨울이 돼서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사람이 모은 식량을 먹는 게 간편하다고 느낀 멧돼지들이 간혹 창고의 문이 부실할 경우 아예 돌격하여 문을 박살 낸 후 먹고 사라지는 사태가 일어난다.
고라니나 사슴, 새들 같은 경우에는 문이 열려 있거나 아니면, 멧돼지가 부수고 사라지면 뒤에 나타나 먹지만 어느 쪽이든 안 그래도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변방에선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 창고의 문제라면 이후 문을 단단히 하고 벽도 보강하여 이 이상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가. 과연, 오 판관일세. 하면 무슨 일로 온 것인가?”
채화와 함께 북관도로 온 그는 성이 오(吳)고, 이름을 예(乂)라고 하는 판관으로 부임 된 문인이었다.
그는 지난 병술년(丙戌年 1226년)의 과거에서 급제를 한 문인으로, 무려 1등으로 급제를 한 인재였으나 무신정권이 존립하던 동안에는 비교적 한미한 배경에 인맥도 없어, 지방에서도 조정에서도 제대로 기용되지 않고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것은 오예만이 아니라 다른 비슷한 처지의 인재들도 많았다. 인재임은 분명하나 인맥이 없으면 제대로 된 출사조차 못 하는 이러한 상황은 계사지주로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변했다.
조정은 권신의 당여들을 차례차례 처리하면서 무신정권 시대 좌천되거나 묻혀 있던 인재들을 다시금 복귀하거나 기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묻힌 인재들이 일제히 조정에 출사한다는 일은 아니었다.
왕검이 내세운 나라의 기치는 ‘경인년 이전으로의 복구(무신정변 이전 시대)’가 아닌 문무양도(文武兩道)였다. 무신정권의 당여라곤 하나 문신들도 많이 출사한 상황에서, 급제했다곤 하나 경험 없는 문신들만을 집중적으로 부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급제로부터 원체 오랜 기간이 지난 오예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실직을 얻게 된 것은 채화가 죽은 채송년을 이어 북관도의 판관으로 발령될 때쯤이었다.
그러나 실직 경험은 없다곤 하더라도 어쨌든 1등으로 급제하였으니 능력은 기대해 볼 만하다고 판단한 조정에선 변방 중 변방에 가는 오예를 ‘변방판관(邊方判官)’이라 하여 특별직을 주었다. 첫 실직&지방직치고는 다소 이례적으로 종5품직으로 취급하며, 채화의 부관으로 함께 보낸 것이다.
물론, 북관도는 넓었기에 오예만이 아니라 그처럼 급제만 한 이들을 몇 더 추려서 올려보내긴 하였다. 그러나 북관도에 있는 판관 중 가장 높은 판관은 오예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실직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인 오예를, 채화는 경시하지 않고, 그의 조언과 말을 귀담아듣고, 그를 가까이하였다.
아닌 말로 지금이야 형을 대신하여 북관도 개척을 한다고 대장군(종 3품)에 올랐으나, 본래는 소부감 시절엔 종 4품의 소감(少監) 이었던 채화였다.
감찰관 일은커녕, 무장으로서도 초짜에 가까운 그로선 예상 이상인 북관도의 험난함 앞에선 조력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오 판관은 정말로 장원에 급제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안동성에서 온 상인들에게서 요동과 장성 이남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전하께서 이곳에 오실지 몰라 장군께 알려드리고자 왔습니다.”
“?”
#작가의 말
4월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최정분(崔正份)이 지공거(知貢擧), 비서감(秘書監) 유승단(兪升旦)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오예(吳乂)’ 등 32명, 명경업(明經業) 1명, 은사(恩賜) 9명에게 급제(及第)를 내려주었다.
– 고종 13년(1226년) 中
*오(吳)씨 성을 한 예라는 이름을 한 사람. 합쳐서 ‘오예(吳乂)’ 입니다. 덧붙여 이름밖에 남지 않아 자세한 사항이 불명이긴 하나 엄연히 고려 고종 13년(1226) 과거에 장원급제한 실존 인물입니다. 반대로 말해 장원급제한 실존 인물이란 것 외에는 작중 설정들은 전부 창작입니다.
**북관도를 할지 자강도를 할지에 대해선 2, 3부에서도 고민했지만 작중 시점에선 일단 북관도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후 바뀔지도 모릅니다.
***덧붙여 채송년 생전 관직은 상장군으로 정3품입니다. 채화가 형의 자리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세습이 아니라 개척 사업을 이어 한다는 의미입니다.
형제가 이어서 한다는 것이 북방이나 나라에서도 의미가 있어 종4품인 채화가 종3품 대장군으로 승진했지만, 역시 단번에 정3품 상장군 직에 오르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