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395
395화
12장 멸망하는 신성로마(2)
구유크와 함께 강제 대동 된 고려 영녕공 일행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유럽의 나라들을 보며, 잔혹함과 참혹한 실태에 탄성과 한탄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들이 탄성과 한탄한 참혹한 실태에는 단순히 몽골의 잔혹함에 당한 피해만을 말하지는 않았다.
“소인이 조정의 뜻에 따라 이 이역만리 타향까지 와 많은 이국(異國)들을 보았으나, 그들 중 이 근방의 서국(西國)이란 대체로 그 허황한 자취를 말하며, 자취가 허황될수록 미혹된 자가 더더욱 미혹되니 바야흐로 나라마저 그러한 것입니다.
저들이 말하는 천주(天主)를 믿는 종교, 천주교는 이미 인심을 병들게 했기 때문이니, 마치 종교를 위해 나라를 버리고, 땅을 버리고, 군신 간의 위아래도, 무엇도 없으니 어찌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서국인들은 무슨 이치든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깊은 이치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오히려 고착된 관념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고려는 물론, 동북아시아 전반의 상식으론 종교가 아무리 강하고 뛰어난 성인이라도 저렇게 권력과 권위를 휘둘러 군주를 몰아내고 죽이려 드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내 듣건대 인종 대왕 시절, 광승(狂僧) 묘청이 서경에서 난을 일으킨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광승마저도 이 천주의 교인들에 비한다면 참으로 분수를 아는 자들이라 할 수 있겠구나.”
영녕공도 최임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했다.
현대에서 고려 시대를 일종의 봉건제와 비슷하게 보고 있고, 실제 봉건제적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조차 토착 호족인 향리, 호장들이 협조를 하지 않는다면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불평을 할 정도였고, 호족들은 그만한 권리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 퍼진 ‘왕즉불’(王卽佛 왕이 곧 부처)과 ‘왕토’(王土 나라의 모든 땅은 왕의 땅) 사상으로 왕권의 위상은 유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유럽에도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국왕의 권리는 신에게서 받은 절대적인 것)이 있었고, 그것을 주장하며 왕들은 영주와 백성들에게 권위를 내세우긴 했으며, 동양에도 왕사(王師)나 국사(國師) 등 중시하는 종교 교인들의 위치 또한 낮은 것은 아니었으나 각자 비슷한 수준은 아니었다.
영녕공의 말대로 광승 취급을 받는 묘청조차 적어도 천자(고려왕)를 폐위한다거나 천자를 자신보다 아래로 두려는 듯한 언행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교인들만이 아닙니다. 태수들과 성주들 또한 군왕이 죽었는데 상을 치르긴커녕, 저렇게 성에만 틀어박힌 것을 본다면 가히 신라 말의 난세와 같습니다. 이를 보면 저 북진이란 나라는 이미 난세에 접어들어 망조에 들었다는 것은 자명한 바입니다.”
그렇다 보니 고려의 상식으론, 왕과 주교, 영주들의 저렇게 극심하게 대립하는 봉건제의 극대화에 가까운 신성로마의 상황은 영락없는 중국이나 한국의 옛 나라들이 멸망 직전에 보여준 전국시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이 시기 서유럽, 특히 신성로마는 개판 5분 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개판 그 자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막장 상황이었으니 저들의 생각도 아주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같지 않고, 땅의 이득은 사람들의 화합만 못 하다.)라…. 몽골은 천시를 얻었고, 북진은 인화조차 이루지 못했으니 북진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인가.”
영녕공은 그렇게 주변의 참상에서 고개를 돌리고는 도주하다가 기어코 잡혀서 끌려왔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자가 있는 궁성으로 들어가는 몽골군의 뒤를 따랐다.
* * *
신성로마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인 부르군트(제2)왕국, 혹은 아를 왕국(Kingdom of Arles)이라고도 하는 서쪽 변방 왕국의 기사 샹송은 생명의 마지막 불꽃마저 태우듯 밤낮으로 말을 채찍질하고, 말이 쓰러지면 달리고, 또 달리며 프랑스 왕국으로 가 상황을 알렸다.
지금 쳐들어온 이들은 단순한 야만족이 아니었다. 저것들은 위험하니 완전히 처리해야 한다며 군사를 모집하려던 황제(프리드리히 2세)의 발언은 결코 과언도, 허풍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부족했다. 저들의 신속함과 끈질김은 과거 훈족 이상이었고, 수는 ‘로마가 하나였을 시절’(고대 로마제국)에 필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제가 뭣도 모르고 변경에 갔다가 포위되어 죽었을 때 비웃었으면 안 되었다. 서쪽에 위치한다고, 동쪽이 다소 심하게 약탈될 뿐이라고 안심한 것이 너무나 어리석었던 것이다.
저들은 단순한 야만인으로서 약탈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정복하고 점령하려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 부르군트 왕국에서 저들의 위험을 본격적으로 느낀 것은 저들의 군세가 3만 명이 레만호보다 아래로 진입했을 시점이었다.
뒤늦게 영주들은 손을 잡아 연계하려 했지만 그들의 연계는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급기야 황제가 죽고, 장남이 유폐되어 계승권도 박탈된 지금 사실상 정통계승자였던 황제의 차남이자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된 콘라트 4세가 전쟁 개시 이후 순식간에 닥치는 몽골군을 보고는 빈에서 나왔다.
반격을 노리기 위해 아를 왕국으로 향하던 도중, 몽골군에게 잡혀 그들의 왕(구유크칸)이 있는 프랑크푸르트에 끌려가는 사태에 이르자 영주들은 급기야 타국에도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가장 우선이 된 것은 이웃국이자 서유럽의 강국인 프랑스 왕국이었다. 프랑스 왕국이 본격적으로 도와준다면 국내에 들어온 저들은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제국이 그렇게 되었다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전에도 말했지만 저런 간악한 야만인의 군대와 우리 기사단이 마주하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경건한 자들이 천국에 가거나 배덕한 이교도들이 지옥에 가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키가 크고, 위엄과 온화한 눈빛을 가진 사내의 머리 위에 올려진 금관이 그가 국왕임을 알렸다.
국왕은 힘들게 찾아온 기사를 위로하듯 위엄에 찬 목소리로 말했고, 아를 왕국의 기사의 표정은 반색을 하며 그렇다면 원군은 언제 오는 것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보다 빨리 사내는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도 지금 내부의 일로 바빠 쉽게 군을 보내줄 순 없다. 그때까지 견디는 것이 너희들의 몫일 것이다.”
“폐하.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금 폐하의 용맹한 군대가 우리를 돕지 않는다면 신의 불쌍한 어린 양들을 모조리 저 잔혹한 이교도들에게 죽어 악마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폐하께선 평소 독실한 신자로 명성이 높으시니 이것이 얼마나 참혹한 일인지 아실 것입니다.
교황청에선 이미 십자군을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저들이 정녕 우리만을 치지 않고, 우리 전부를 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정말로 잔혹하고 악랄하기가 훈족을 넘으니 지금 제때 처리하지 못한다면 폐하와 이 나라에도 큰일이 벌어지는 것은 필연입니다.”
사내, 아니 프랑스의 국왕 루이 9세는 연민의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내가 저 이교도들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으나 이렇게 일이 벌어진 것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저들의 왕자(황자)를 죽이고, 그 왕에게도 독을 든 와인을 선물한 것이 크다고 생각한다.”
루이 9세는 기사를 타이르듯 천천히 말했다. 이 시기 유럽에선(신성로마제국에서도) 프리드리히 2세의 평판이 평판인지라, 그가 몽골 황족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제국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황제의 참혹한 죽음이 알려지자 그들의 야만성과 흉포함에 치를 떠는 동시에 그만큼 화가 났다는 것에서 황제가 했다는 설득력 있는 소문은 더욱 진실을 띄게 되어 아니라고 믿는 이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때문에 기사 샹송은 그 추궁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야 했고, 그때 루이 9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황제의 참혹한 죽음은 들었다. 저들이 형제와 부모를 죽인 황제에 대한 분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니 그런 저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먼저 닥친 문제부터 처리할 생각이다.
그대는 이만 돌아가 우리의 일이 끝날 때까지 사수하라. 그리고 죄 없고 나약한 제국의 백성들이 우리 왕국에 온다면 그들을 전부 받아주고 일과 양식, 옷을 내려주며 조금이라도 보호하도록 하겠다.”
기사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듣기에 따라선 힘껏 아량을 베풀어 잠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피신을 받아주겠다는 듯 말했으나, 그 말은 결국 피난한 신성로마제국 사람들을 프랑스 왕국의 백성으로, 혹은 농노 같이 노동력으로 부릴 인력으로 받겠다는 뜻에 불과했다.
물론, 프랑스에서 개입을 꺼리는 것은 결코 몽골의 보복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루이 9세가 비록 성왕(聖王)이라고 불리는 성군이라곤 하나, 프랑스 전체에선 같은 유럽 국가들을 치는 야만인들의 사정 따위 고민할 가치조차 없었다.
그러나 몽골군이 이미 숱한 나라들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당대 강대국인 신성로마제국마저 멸망 직전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이상 굳이 마찰을 야기(惹起)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 프랑스의 뜻이자 루이 9세의 뜻이기도 한 것이다.
‘남부에는 아직 이교도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처리하라고 지시한 것도 교황청. 진압은 되었지만 아직 이단을 믿는 이들이 많고, 저항도 심해 혹시 모르니 대비한다는 명목이면 지원을 미룰 수 있겠지.’
루이 9세가 말하는 남부의 이교도들이란 기독교의 한 종파이자 지금은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카타리파(Cathari) 일당들을 말한다.
한때 프랑스 남부에서 강력한 교세를 떨치며, 교황청의 십자군도 격퇴하였으나 프랑스의 선대왕이자 루이 9세의 아버지, 루이 8세가 개입하면서 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레몽 7세가 항복하면서 카타리파는 패했다.
그리고 지금은 교황청의 이단심문관이 그들이 교세를 떨쳤던 도시들에 가서 회개를 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남부의 여러 도시와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카타리파를 믿고 있고, 이를 회개하려는 교황청의 이단심문관들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몽골이 정말로 신성로마제국만을 치고 갈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로 단순하지도 않았다.
예로부터 야만인들과 이교도들은 거짓말을 빵 먹듯이 하는 자들이고, 저렇게까지 강하다면 되려 그만한 대비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리석은 행동이니 말이다.
하여 루이 9세는 몽골의 복수의 정당성과 내부 문제로 신성로마제국으로 향하는 원군을 연기하는 한편으로, 대 몽골전쟁을 대비했다. 그리고 그토록 강한 신성로마제국이 이토록 허망하게 밀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냉정히 판단하며 그 원인을 추측했다.
그리고 루이 9세가 내린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프리드리히 2세의 행태였다.
‘교황청과 대립을 하면서, 영주들과도 적지 않은 다툼을 벌인 황제다. 저 야만족의 출현에 교황청과의 분쟁에 집중할 수 없어져 곤란하게 되자 황제가 야만족의 왕자와 왕을 죽이는 극단적인 수를 써서 그들의 개입을 배제하려 한 것은 모두가 아는 일!
그렇게 배제한 후 서둘러 교황청과 영주들을 탄압한다고 또 군을 일으켜 처리한다고 국력을 깎고, 행동에도 제한을 가했으니 저 야만족의 기습에 제대로 반응도, 예상도 하지 못하고 국경의 침입도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제국과 맞닿는 곳을 경계하고 나아가 귀족들에게도 유사시 군대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부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서 나온 전제들을 뺀다면 지금 루이 9세의 이해와 대응은 결코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실제 신성로마제국의 너무나 형편없는 졸전과 열세는 모두, 몽골이 먼저 대대적인 공격은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프리드리히 2세가 저지른 내부 숙청으로 만든 긴장과 공포의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그들의 상대가 되는 야만족. 몽골인들에 대한 이해와 정보가 부족했다. 신성로마제국이 졸전 한 또 다른 이유들 중 하나인 기동성과 몽골군의 대규모 운용에 대해선 루이 9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루이 9세가 무능하여 그런 쪽은 생각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원체 이 시기 유럽은 몽골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는 뜻이지. 실제 루이 9세는 현재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몽골군의 승전과 병력에 대해 추측하면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고자 하고 있었다.
‘들리는 말론, 야만족의 군세가 십만이 넘는다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동성이 뛰어나고 동시다발적으로 치고 있다곤 하지만 이것은 저들이 많을 타고 이리저리 움직여서 한 번에 약탈이 일어나 수가 많다고 착각한 가능성도 놓칠 수 없다.
무엇보다 지금의 제국은 겁을 먹고 부풀렸을지 모르는 일이다. 헝가리나 폴란드에서 패한 것을 감안하고 이 빠른 기동성을 감안하면 1, 2만 정도, 많이 잡아도 4만이 적당하겠지.
…하지만 저들이 진정 제2의 ‘신의 채찍(아틸라와 훈족)’ 같은 자들이라면, 그보다 크게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옛날 로마를 쳤던 훈족들의 동원 병력을 고려하고, 혹은 그보다 더 잡는다면, 5, 6만까지 대비를 해야 할지도….’
즉, 프리드리히 2세 이상으로 몽골을 경계하고 대비한다는 루이 9세조차 결국 몽골을 훈족과 비슷하게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루이 9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신성로마제국 동쪽, 구 헝가리 왕국에 있던 몽골의 후속군 7만이 추가로 앞서 나간 군을 증원하고자 중부유럽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