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431
431화
36장 제국의 우려
신성로마제국을 정벌하기 위해 온 몽골 전사들은 생각했다.
“다르다.”
목책과 돌이 섞인 동유럽의 국가들의 성들과 달리, 서유럽으로 갈수록 돌로 만들어진 석성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 서유럽의 석성들은 몽골이 지금까지 본 동양의 성들이나, 중동의 성들과도 모양새가 달랐다.
그러나 생소한 성들을 앞두고도 동유럽의 성들보다는 다소 힘들다고 여기는 이는 있어도 정복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전사들은 없었다.
하물며, 후방에서 공성 무기와 후속 부대가 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색적인 성들을 본 것으로 전의가 흔들리기에는 이미 전 세계의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가로막는 나라들의 성들을 정복하고 함락하고 멸망시켜 본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근거한 자신감은 재보급을 받은 후 정말로 신성로마제국 내의 독일 왕국의 주요 도시들의 전부 함락시켰다. 이것은 몽골군의 자신감이 과신도, 만용도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여기에는 몽골에게 점령당한 유럽의 성들과 영주들에게 불리한 점이 있었다는 것도 함락당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 황제가 죽고 계승자의 생명도 불분명해진 시점에서도 제국 내 있던 주요 도시들과 성들의 영주들이 몽골에 저항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교의 야만족이 쳐들어온 이상, 조만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십자군을 만들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튼튼한 성벽 안에서 ‘말밖에 없는 저들이 십자군에 토벌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몽골은 카르피니 사절단을 현혹시켜 주변의 국가의 지원마저 원천 차단시켰고, 말밖에 없으니 성안에 있으면 무사할 것이라는 그들의 위안도 박살내 버렸다. 그리고 몽골이 제국 사람들의 생각을 무너뜨린 것은 그런 외교적 대응만이 아니었다.
몽골군이 서유럽식의 성채를 처음 봤듯, 유럽의, 신성로마제국의 영주들에게 있어서도 작금의 몽골군이 사용하는 무기들과 공성병기들은 처음 보는 무기들이었던 것이다.
“부, 불이 꺼지지 않아! 이, 이게 소문의 타타르인들이 사용하는 인간 기름… 히익. 부, 붙었어! 누가 물, 물을…!”
“크아아악. 터, 터졌어! 분명 날아온 바위가 터졌다고!!”
파편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비명을 지르면서도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절규하는 기사.
“오오. 신이시여!!”
“…악마다. 타타르인들이 지옥의 불을 사용한다!!”
당대 화약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고려와 남송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멸망했지만 금도 화약을 무기로 사용했고, 그런 금나라의 화약은 금을 멸망시킨 몽골에서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옷치긴 왕가조차 고려를 상대할 때 한 번도 화약을 사용한 적이 없었듯, 화약을 마음껏 쓰는 나라는 없었다. 화약이 부족한 것은 어느 나라도 그랬고,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 화약 무기 자체가 익숙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한 이래 몽골인들이 상대한 나라들과 전투 중에 몽골에게는 익숙지 않은 전술과 무기들을 다루는 이들은 많았다. 그리고 몽골은 언제나 그런 나라를 멸망시킨 후 전쟁에서 쓸 수 있으면 흡수하고 활용하였다.
일개 예케 몽골 울루스의 일부인 옷치긴 왕가와 달리, 대칸이 각 울루스의 제왕들을 규합시켜 작심하며 벌이는 일이라면 아무리 귀중하고 희귀하다고 하더라도 전투에 도움이 된다면 쓰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몽골제국의 숙원이 된 서정에서는 더더욱 쓰지 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제국의 숙원을 위해 화약이 동원되는 것을 시작으로 중동과 동양의 갖가지 공성 무기들이 서유럽의 성채들에 작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고려와 금, 동하국, 남송 등 이미 몽골과 전쟁을 해본 여러 나라들을 괴롭게 한 쉽게 꺼지지 않은 불들도 있었다. 그런 난생처음 보거나 생소한 무기들에 유럽인들은 전율하고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제국은 이미 함락되었고, 모든 귀족들과 왕들도 대칸에게 붙었습니다. 성벽 하나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서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거기다 몽골군의 전술은 무력으로만 그치지도 않았다. 군대를 이끌고 도시나 성을 포위하고 나면 언제 그 성을 향해 일전에 항복한 유럽인들을 시켜 도시와 성들에 항복을 권하게 만들어 더욱 사기와 전의를 꺾는 것을 시도한 것이다.
“항복합시다. 이미 전황은 기울었습니다. 이대로 수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성내에 식량이 언제 떨어질지 모릅니다. 보급을 받을 수 없다면 결국 도시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호라즘 때도 그러했고, 원 역사에선 남송을 상대로 그랬지만, 몽골군은 거대 도시나 철옹성 같은 요새를 본다면 해당 성을 포위하면서 그 주변의 성들과 마을, 요새들을 토벌시켜 보급을 막았기 때문에 성이 함락되지 않더라도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저런 이교에게 굴복하자는 말이냐!”
“그게 아닙니다! 지금 프랑스나 교황청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은 각자의 문제 때문입니다. 저들이 진정 유럽을 버린 것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우리는 저들이 군대를 보낼 때까지 기회를 보자는 것입니다.”
평시에 이런 조언을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며 바로 조언을 한 자의 목을 베었을 영주들도 외교전, 화력전, 보급차단 및 심리전 등 다방면에서 집요하게 좁혀오는 몽골군의 공세 속에서 그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포위된 영주들은 그야말로 피가 말라 죽는 맛이었고, 이내 항복하느냐, 진짜 죽을 때까지 싸우냐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진짜 죽을 위기가 돼도 진짜 죽겠다고 하는 이들은 적다. 그런 이들에게 그 조언의 소리는 사막 한복판에서 발견한 오아시스 물과 같이 달콤했다.
그러한 명분이라면 최소한 자신들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은 진짜 야만족들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찾아올 십자군의 공세를 내부에서 돕기 위해 항복하는 것이라는 자기 위안이 되었으니 말이다.
“저 성은 이미 한 번 무시했습니다. 군대가 포위되자 전투를 벌이기 전에 바로 항복하긴 했으나 처음 권유를 무시한 이상, 다루가치를 파견하고, 성내 사람들 일부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물론, 몽골인들이라고 항복하는 이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주지는 않는다. 어느 의미에서는 기존 정복지들보다 더 까다롭게 조치를 시작했다.
“친카이. 굳이 살던 자들을 이주시킬 필요가 있나? 기존처럼 다루가치만 두고 수상한 모습을 보이면 그때 처리하는 것이 편하다고 보는데?”
기존 방식과 다르게 번거롭게 살고 있는 주민들까지 처리하려는 것에 바투는 의문을 느꼈지만 친카이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곳에서 벌이는 전쟁은 여태까지의 전쟁하여 정복한 것과는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최소한 서정이 끝날 때까지는 대칸의 관리 아래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대칸의 땅으로 한다는 말이냐?”
구유크의 것으로 관리하겠다는 말에 바투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서정이 이전 이상으로 중요한 국책이 된 상황이라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래 서정은 서방 왕가를 위한, 그중에서도 필두 역할인 주치 울루스를 위한 사업이기도 하다.
바투 또한 선대 칸이 과음으로 죽은 이후 딱히 사적으로 좋은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닌 구유크가 칸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한 것도 구유크가 주치 울루스에게 줄 보상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카이는 그것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은 오고타이칸 이전과 이후로 그 중요도가 많이 달라졌고, 이곳 독일 왕국령은 기존 점령지들과 다르게 앞으로 있을 유럽 정벌의 요충지이자 거점이다. 보다 신속하고 구체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바투 님께서도 근래 들어 동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들으셨을 겁니다.”
“…음?”
친카이의 말대로 얼마 전에, 요동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은 서정 문제로 한창이던 몽골군을 놀라게 했다.
자신들이 서정에 한창일 때 요동에서 고려 태자를 암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니? 몽골이 서정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 동방의 남송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들의 옆구리를 노리는 칼날 같은 위치에 있는 고려가 제격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려의 태자가 시도도 해보기 전에 막히긴 했지만, 암살 당할 뻔했다는 것이다.
“그때 숙조부께서 많이 날뛰시긴 했지.”
이때 이 암살 모의에 옷치긴 왕가도 연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보고를 들은 테무케는 그 자리에서 길길이 날뛰며 누명이라고 소리쳤다.
실제 테무케는 주력 군대를 끌고 서쪽으로 향하면서 고려가 요동에 눈독을 들이면 그냥 고려에 주면 주지, 고려와는 최대한 싸우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언질을 하였다.
그건 고려가 강한 것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노회한 테무케가 서정이 지속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모든 관점에서 서정 중 고려를 건드는 것은 안 그래도 울루스 내에 위태로운 입지를 더 줄이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고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옷치긴 왕가가 고려 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니?
“뭐, 보고에 의하면 동요 내에 있던 거란 놈들이 제멋대로 꾸민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문제는 발단이 어떻게 되었든 고려가 우리 예케 몽골 울루스 관련되어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친카이가 여기까지 말하자, 칭기즈칸의 손주들 중 유독 정치력이 뛰어난 바투는 단번에 친카이가 우려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동방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단 말인가?”
“…….”
당시 늙은 테무케의 억울하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 이도 있었고, 반대로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믿는 이들은 현 상황에서 서정을 방해한다는 점이었고, 의심하는 이들은 선대칸 시절처럼 모두의 관심이 덜어진 지금, 고려의 제거하려고 한 것이 아니냐고 보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친카이를 비롯한 일부는 그 ‘진위 여부와 별개로 동방에서 일어날지 모를 일들에 대해 경계’하였다.
“…이후 동방의 문제를 견제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서정에 정복한 땅에서 인력을 뽑아 보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바투 님이나 다른 이들의 울루스로 만든다면….”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렇다면 서정이 끝나는 동안까지는 대칸의 관리에 두는 것이 낫겠지.”
지금 억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고 해봐야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사람을 뽑아낸다면 그 불만과 행정은 고스란히 자신들이 감당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라는 뒤의 설명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처음부터 대칸의 관할에서 처리하는 것이 나으리라.
‘뭐, 서정이 끝나고도 전부 독식하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구유크 너는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이가 아닐 것이라고 믿겠다.’
그리고 얼마 뒤, 1242년 3월 19일. 동방에서 사람이 찾아왔으니 바로 고려의 사절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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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하늘이 신명(申命 거듭 명하는 것)을 열으시어 운(運)과 함께 탄강(誕降)하옵신 날에, 경사가 궁정(宮庭)에 넘치고 기쁨에 온 누리에 고르옵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중략)… 상서가 일찍부터 무지개의 흐름에 나타났고 복이 풍성하게 냇물이 흘러 이르는 것 같사옵나이다.
하옵고, …(중략)…
외람히 몸이 청구(靑丘 해동)에 걸려 비록 준분(駿奔)의 열(列)에 참가하지 못하오나, 삼가 배신(陪臣)들을 차견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가서 하례를 올리게 하는 바이며 마음만은 어전(御殿)에 달려가 곱절로 호배(虎拜)의 정성을 다하며 경하드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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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생각건대, 대칸 폐하께서 천군(天軍)을 이끌고 나아가시니 위엄이 서서 만방(萬邦)이 복종하나이다. 덕분에 이제 이곳 먼 서역도 덕화와 위엄의 품에 들어갔으니 만복의 아름다움을 갖추 받게 되니 폐하의 아량에도 축하를 올리나이다.”
고려 고종 29년(1242년), 남송 순우 2년, 3월 19일. 동요국에서 일어났던 암살모의의 보고가 올라온 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고려에서 구유크의 절일(節日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최자를 정사로 한 경하사(慶賀使=절일사)가 당도하였다.
대칸인 구유크를 비롯하여 몽골의 제왕과 장수들은 서정에 한창이면서도 고려의 경하사가 온다는 소식에 많이 참석하여 그들을 맞이해 주었는데, 당연히 고작 축하를 받기 위해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고려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는데, 애초에 왕검이 구유크와 인연을 맺은 이후 자주 선물을 보내긴 했으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카라콜룸에 있는 대칸의 오르도에 보낸 것에 불과했지, 이역만리 저편에 있는 구유크에게 직접 보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 있는 곳까지 직접 축하하겠다고 사신을 직접 보냈으니 무엇인가 따로 용건이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몽골군도 그렇게 짐작했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형식적인 축하를 받은 후 이어진 이야기에 구유크는 공식 석상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고려 사신들에게 짐짓 꾸짖듯 물었다.
“먼 거리를 지나 예를 표하는 그 자세는 참으로 훌륭하다. 하여 내가 지금까지 고려 태자를 대하기를 자식처럼 아꼈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근래 해동에서 들려오는 일들은 심히 유감스럽지 않다고 할 수 없구나.”
그리 말하는 칸과 몽골인들의 눈에는 경계와 약하지만 날카로운 적의와 분노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