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442
442화
45장 남번(南藩)(1)
“태자는 이번에 이 아비가 황도로 환도하였을 때, 보여준 백성들의 얼굴을 기억하느냐?”
1232년 최우로 인해 강화도로 들어갔던 아버지는 원 역사와 달리 죽기 전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서정군이 멀리 있다고 하더라도, 10년 만에 뭍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를 보호하고 안심시키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 외 경기(개경 인근)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버지가 환도할 때 나를 비롯한 가족들이 전부 동행했다.
그리고 벽란도부터 개경까지 모든 지역의 백성들이 마을 밖으로 나와 환호했다.
그것이 오직 나를 향한 환호라면 자의식 과잉이겠지만 적어도 10년 전 아버지가 도주하듯 빠져나가던 때 와는 반대로 당당히 개경으로 돌아오는 왕의 귀환과 열광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내가 고려에서 떨어진 후 한 짓이 헛수고한 것이 아니란 것을 느껴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기억하옵니다. 많은 백성들이 아바마마의 환도에 기뻐하였습니다.”
“그래. 그렇게 백성들이 환호한 것은 내가 즉위하고 처음 본 광경이었다. 그렇다면 태자는 임진년 강화도로 몽진(蒙塵)하였을 때를 기억하느냐?”
“…아, 아바마마.”
아버지가 먼저 스스로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강화도로 피신한 일을 언급할 줄 몰라서 당황스럽다. 하물며 몽진(蒙塵)이라니…. 실제 몽골을 피해서 가긴 했지만 현 고려는 공식적으로 몽진이란 표현을 자제하고, 사용하더라도 몽진 자체는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최우의 문제라는 뉘앙스로 선전하고 있는데….
“그때 백성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가는 임금을 많이 원망하고 욕하였겠지.”
“아니옵니다. 아바마마. 임진년에도 백성들은 아바마마를 많이 걱정하였사옵니다. 그러니 이번에 환도하였을 때에 그렇게나 아바마마를 반긴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
“…그것도 태자가 임진년에 황도의 백성들을 위로해 준 덕분이다.”
“아니옵니다. 소자가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그만, 그만하거라. 이 아비도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다. 그날 환도하였을 때 보여준 백성들의 얼굴은 내가 아니라 태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물려주고 싶었다. 앞으로 있을 태평성대의 중흥기와 저 북조를 토벌할 시대의 군주를 아비가 아닌 너의 이름을 남도록 하고 싶었다. 더욱이 지금은 남조와 협력을 하고 있었으니 더욱 기회라고 여겼다.”
이제 남송과 협공하여 몽골을 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이전에 태자를 거절한 이유를 전부 설명했는데도 이렇게 또 선위를 고집했던 거였구나. 그것도 내가 대응하기 전에 공식으로….
“…아바마마.”
“하지만 알겠다. 태자의 말이 무엇인지. 분명 아직은 태자가 옥좌에 오르기 전에 할 일이 있는 것 같구나, 이 아비도 이 옥좌에 더 앉아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음도 말이다.”
“아바마마. 그럼….”
“오냐. 선위를 거두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대신, 태자도 이것만은 약속하거라.”
“무엇이옵니까.”
“몽고의 문제가 다 해결한다면 그때는 선위를 받도록 하라. 이것이 아비가 너에게 하는 마지막 명령이며 청이다.”
“아, 아바마마. 청이라니요. 듣잡기 황망하옵니다.”
“대답하라. 일이 끝나면 반드시 보위에 오르도록 하라. 알겠느냐.”
그것은 아버지 나름의 선언이자 고집이며 소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알았다. 그럼 이제 태자의 책략(策略)을 말해보거라!”
“예?”
“명석한 태자다. 그저 그 설명과 함께 기존처럼 수신(修身)만 하는 것이 방도라면 굳이 황도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필시 그 소식을 듣고 기책(奇策)을 모색했을 것이다. 틀렸느냐?”
역사는 변했다. 그렇다면 역사도 변했는데 사람이라고 변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니다. 무조건 좋은 쪽이라곤 할 수는 없으나 역사가 변한 만큼 나라가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그리고 그것은 원 역사에서 몽골에 몰려 섬에서 죽은 고종도 다르지 않다.
“…기책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나, 나름의 방도가 있긴 합니다.”
“역시 아태자로다!”
아버지의 말대로 나는 이대로 지금까지 정복한 땅을 소화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것 외에도 방도를 궁리했다. 그리고 기책까지는 아니더라도 추가적으로 사용할 책략도 떠올렸다. 아니, 떠올렸다고 하기보다는 이전부터 있었던 것을 이 상황에 이르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며, 이 수단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나도 확신 못 하겠지만 말이다.
“이 아비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물심양면 도와주도록 하겠으니 말해보거라.”
하지만 지금은 몽골의 강대함을 듣고도 포기 안 하고 오히려 의지를 다지는 아버지가 더 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아버지를 보고 어느 누가 허수아비 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한 일들이 정말, 정말로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니구나.’
* * *
개경.
“빈공과의 기록을 정리하여 달라고 하셨는데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현종 대왕님 시절 거란적의 침입(2차 여요전쟁)으로 칠대실록(七代實錄)을 비롯하여 이전의 기록들은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광종 대왕님의 이후의 기록들도 포함됩니다. 하여 조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현종대왕 이후의 기록 정도입니다만 정말 괜찮겠습니까?”
칠대실록(七代實錄)은 고려 전기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에 걸친 실록을 말한다. 이 실록들은 2차 여요전쟁에서 소실되어 현종은 재편찬하였으나 기록이 미흡하여 실록이 아닌 칠대사적(七代事跡)이라 하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광종 –성종-경종이 초점이 아니라 여태까지 전체적인 평균을 구하고 싶은 거라 큰 문제는 없다.
“그건 상관없네.”
“하면 정리하는 대로 바로 전해드리겠사옵니다.”
“음. 부탁하지.”
개경에서 사무적인 일들을 보고 있는데, 정안연으로부터 갑자기 여태까지 고려 빈공과에 응시한 외국인들의 횟수를 알고 싶다는 청을 보내서 그대로 다시 입궁하여 기록을 관리한 관리에게 부탁은 했지만 갑자기 묻는 저의를 모르겠다.
생각해 보자. 내가 빈공과를 부흥시키긴 했으나 이건 넓어진 영토의 관리 및 국위 선양 목적이고, 이마저도 내가 주로 관심 가지는 것은 북방. 서경빈공과와 여진인들이다. 그것을 정안연이 모를 리 없는데 어째서 ‘모든 외국인들의 횟수’를 물은 것일까?
‘답은 동경빈공과에 응시하는 남인(南人 탐라, 오키나와인, 일본인 등을 남방에서 온 외국인들을 말함)들의 수와 관련해서 일이 생긴 것이겠지?’
동경빈공과가 서경빈공과보다 관심이 적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려와 연결된 북방 영토 및 대북전선에 엮어있기 때문에 내 관심이 북쪽에 더 초점이 잡혀 있다는 거지. 동경빈공과 자체를 가볍게 여기진 않는다. 동경은 바다와 인접해 있어 응시를 빙자해서 국가 기밀을 정탐하려 하거나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침략이라도 하여 점령이라도 당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시기적으로 몽골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지만 동시에 남송은 대리국의 문제에 신경 쓰고 몽골도 주시는 하되 서정을 우선하는 지금이 북방에서 멀어질 수 있는 시기고 말이다.
* * *
유구.
순천성주 순마준희(슌바쥰키)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수받아 고려가 직접 관리하게 된 순천성 안으로 남루한 행색의 사람들이 병사들에게 묶여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수는 십여 명이었고, 그들 대다수가 봉두난발(蓬頭亂髮)로 그야말로 패잔병(敗殘兵)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를 생각한다면 패잔병이라는 말보다는 패군지장(敗軍之將)이라는 말이 더 알맞았을 것이다.
“응? 저 선두에 있는 사내는 중부의 아지(按司 유구에서 호족, 성주들을 이르는 말) 카우리카잖아?! 꼴을 보니 고려군에 패했군.”
그들은 중부와 북부에 있던 반 고려파의 아지들이었다. 고려의 남벌 당시에 고려의 대군과 화력 앞에서 수세에 처해 쥐죽은 듯이 있던 중부와 북부 성주들과 족장들이었지만 고려의 남벌군이 돌아가자 과감히 반격에 나서는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부로 이주한 슌바쥰키를 비롯한 친 고려파 성주(아지)들과 여전히 오키나와에 잇던 고려군에 의해 그들은 번번이 진압되어 좀처럼 중부를 되찾을 수 없었다. 여기서 중부보다 멀리 있는 슌바쥰키가 특히나 중부 아지들의 저항을 진압하는데 협력하였다.
이미 북부로 이동한 슌바쥰키에게 고려의 중부지역 철수와 반 오키나와 호족들의 중부탈환은 고립을 의미하였고, 친 고려파의 필두로 인식된 자신이 반 고려파 사이에 포위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압이 되어 수괴들이었던 성주들은 순천성에 끌려오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여기가 정말 그 슌텐성인가? 슌바쥰키 놈. 고려에게 아첨하기 위해 성째 들어 바쳤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런 성을 정말로 홀라당 줬단 말이냐?”
“그렇게나 고려라는 나라가 크단 말인가….”
“그보다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패전 후 포로로 잡혀 오면서 아예 삶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한때 유구 제일의 성주로 꼽히던 슌바쥰키의 슌텐성이 외국의 건물들과 외지인들의 소굴이 된 광경에 기가 질렸는지 그들의 얼굴에는 처음 궐기했을 때의 분노조차 상실한 모습이었다.
“시끄럽다. 조용히 걸어라!”
그들이 이국적인 거리가 되어버린 순천성의 모습에 수군거리고 있을 때 그들을 인솔하는 젊은 사내 하나가 그렇게 경고하자 선두에 끌려가는 카우리카는 즉시 발끈하며 호통쳤다. 그 청년의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천한 놈이 검을 찼다고 제가 고려 장수라도 된 줄 아는구나. 네가 제 주인도 못 알아보고 판다고 고려에서 너에게 한자리라도 줄 성싶으냐?”
그 청년은 어느 성주의 가족도, 친척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주 측근의 가족이나 장수의 가족 같은 것도 아니었다. 카우리카가 다스리던 땅에 있던, 노예였기 때문이다.
고려 남벌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하였을 때 싸우다가 병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피신했다가 고려군이 돌아가고 고려에게 자기 영지를 받아 관리하고 있던 아지를 죽이고, 탈환하였다. 그때 노예들이 사라졌는데 어느 사이엔가 고려군에 들어간 것이다.
“노예 놈이 내가 이 꼴이 되었으니 기고만장한 것이 마치 장수라도 된 것 같이 구는구나. 주변의 병사들이 네가 노예라는 것은 알아도 그렇게 기고만장할 수 있겠느냐!”
자기가 패하고, 고려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해했다. 그러나 자기가 아무리 패했다고 해도 자신은 아지(성주)다. 하물며, 자기 노예였던 무지렁이한테 이런 취급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제 딴에 아지인 자신을 죽이지는 못하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하아~.”
청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칼을 뽑아 그에게 들이밀었다. 날이 퍼렇게 선 칼날이 카우리카의 턱 아래에서 멈췄다.
“윽! 뭐, 뭐 하느냐?!”
“마지막 경고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걸어라!”
“이, 일개 병사인 네가 아지인 나를 죽일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멍청한 네놈들에게 특별히 가르쳐 주마.
첫째. 너를 팔지 않더라도 나는 고려에 가서 빈공과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이미 당당한 고려 교위(校尉 정 9품)로 무관(武官)의 반열에 드신 몸이시다.
둘째. 지금 너희는 아지로서 모셔지는 것이 아니라 대고려국에 반항한 도적들로 끌려가는 것이다. 상부에선 도적들이 반항이 심할 경우 한두 놈 죽여도 상관없다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내가 지금 네놈의 목을 따버린다고 한들 전혀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무, 무과? 무, 무관?”
무과는커녕 과거제와 품계제도(品階制度)도 없었던 오키나와 아지들에게 검을 빼든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언행만으로도 눈앞의 사내가 단순 병사가 아니라 고려에 가서 시험 같은 것을 받아 자리를 받았고, 자신들을 죽여도 문제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알았으면 그 엿같이 끈적끈적한 면상을 이 칼로 난자해 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라.”
“…….”
“흥. 조용해졌군! 다시 간다.”
“예.”
그의 지시에 고려인 병사들은 굴비 두름 같은 포로들을 다소 강압적으로 끌고 시작했고, 그 광경을 지켜본 순천성의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은 모두 수군거렸다.
이윽고, 얼마 뒤, 아지의 노예였던 자가 고려에서 빈공과에 응시하여 출세하여 악독한 주인을 혼쭐냈다는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금세 섬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아지의 노예였던 자가 고려의 병사에 들어갔다가 빈공과인가 하는 시험을 치르고 고려의 장수가 되었다는 이야기 들었는가?”
“허어. 저 아지들의 눈에 들어가지 않아도 자리를 얻는다니 믿기지 않는군.”
“내가 알아보니 지금 아지들이 자기 자제들을 고려에 보내는 것도 이 빈공과라는 것에 급제시키게 하려고 보낸다고 하더군.”
“어째서인가?”
“여기서 아무리 높아도 고려에서 내린 관직이 높으면 아지조차도 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니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네나 내가 급제하여 관직을 얻는다면 아지들도 자네를 어찌 못한단 말이네”
“허어. 그거 참으로 장쾌한 말이군. 내 자식 놈이 크면 고려군에 들어가 자리를 얻느니 마느니 조르는데 차라리 그 빈공과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더 낫겠군.”
“그렇군.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하네.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함께 협력하지 않겠는가?”
“협력이라니?”
“우리가 돈을 모아 우리 자제들을 가르칠 선생을 구하자는 것일세.”
이미 성주의 자제들이 고려로 유학을 가서 국자학에 들어가거나 과거에 응시한다는 이야기와 고려군으로 들어간 유구인 일부가 빈공과에 응시해서 고려의 무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구에 전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대다수의 유구인들은 어디까지나 성주들의 자제들만 특별한 것이고, 병사들도 고려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와전되어 있거나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이번 순천성의 일이 퍼지면서 유구인들은 재차 빈공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빈공과를 알게 된 유구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찍이 당의 빈공과를 들은 신라인들과 비슷한 반응을 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