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457
457화
55장 약점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유갑수가 지금 왜의 도성을 불태우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내가 장수왕 시절 고구려처럼 하자고는 했지만, 문자 그대로 지원을 요청한 애들의 도성을 털라는 말은 아닌데 그런 말은 아니지?
“아조가 판옥선에 정예병 수만 명을 싣고 왜국을 치려 든다면 어찌 유구처럼 만들 수 없겠사옵고 향후 어찌 아조에게 무례하게 굴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내 착각이 아니라 유갑수는 정말로 일본과의 전쟁을 말하는 것 같다. 아니, 유구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전쟁이 아니라 토벌이나 정벌까지 생각하는 듯하다.
‘아이고. 갑수야. 오키나와랑 일본은 사정이 달라. 사정이….’
“왜국을 치는 것은 유구를 치는 것과도 동요국을 치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나라를 치는 것에는 적잖은 준비와 전비(戰費)가 소모되니 어찌 쉽사리 결정 내리겠느냐.”
“아조는 바다 건너 있는 탐라는 물론이요. 저 멀리 있는 유구국도 순식간에 정벌하였습니다, 눈앞에 있는 왜국을 정토하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 만약 신에게 1만 명만 내려주신다면 즉시 왜국의 도성으로 쳐들어가 왜왕을 사로잡아 바치겠사옵니다.”
라고 하면서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 다소 농이 섞인 답변이긴 하지만, 자기가 무슨 ‘나라에서 장정 1천 명만 주면 금나라에 가서 금 황제를 잡겠다.’고 소리치던 묘청 일파의 최봉심도 아니고, 참으로 무모한 발언이다.
그래도 요지는 바다 건너 있는 탐라, 특히 멀리 있는 유구도 정벌했으니 지척에 있는 왜국과 전쟁도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 같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탐라와 유구의 민호(民戶)가 많아 봐야 어찌 왜국에 미치겠느냐? 두 곳의 강역을 합친다 한들 왜에 미치겠느냐!”
“강토와 호구(戶口)가 탐라와 유구보다 다소 많긴 하겠으나 힘껏 싸운다면 어찌 힘들겠습니까.”
‘갑수야. 다소가 아니란다.’
요전에 정복한 오키나와는 조선 시대에 있던 류큐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인구가 30만에 미치지 못했다. 당연히 이 시기 오키나와에 이르러선 호구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모르긴 하지만 인구는 20만은커녕 5만이나 될지도 의심스럽다.
탐라국의 인구 또한 어디까지나 김방경의 추측이지만 일전에 1만 6천 정도로 보고한 것에 비해 내가 알기로 일본은 이 시기에 이미 고려와 비슷하거나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오키나와나 탐라 둘은 물론, 동요국을 합쳐도 그 인구는 일본의 절반도 못 미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유갑수가 아직도 이럴 정도면 고려에서 일본에 대해 많이 얕잡아 보고 있는 사람이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는 건데….’
지금 유갑수의 발언을 단순히 유갑수의 만용이나 무지라고만 탓할 수는 없다. 현재 몽골, 남송, 동요, 일본 및 여러 나라가 고려에 대해 무지한 것이 있듯, 고려 또한 일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아니, 아마도 이 시기 일본이 형식상으론 쇄국 지향인 것을 고려하면 고려 쪽이 일본을 더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주변의 고려에 대한 평가가 내가 벌인 짓도 있어서 과대평가가 크다면, 반대로 고려의 일본에 대한 평가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크다고 본다.
이건 고려가 아는 일본에 대한 정보는 상인들을 제외하면 대개 신라 시기의 기록이 전부라, 삼국시대 일본의 병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도 있고, 고려 시기에는 일본 큐슈 일대를 휩쓴 여진 해적들을 고려가 소탕했다는 문제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고려는 여요전쟁 이후 정립되는 해동천자국이라는 자부심과 근래 들어 이룩한 중흥 기세에 자국의 강국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 오늘날 실제로는 일개 번주(藩主 영주)의 조공이긴 하지만 나라 내부에서는 일본에서 조공을 바치는 식으로 선전했다. 무의식적으로 얕보는 경향도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리고 직접적인 충돌은 없어도 남벌에 나갔던 병사들 중에는 거선인 판옥선으로 일본 연안을 지나가면서 그들이 당황하는 것을 보고 적어도 군사력이 우위라고 재차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시기 일본은 이미 영토적으로나 인구로나 고려가 얕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란 것을 말이다.
‘내가 아는 게 사실이라면 한반도의 신라와 고려가 내정을 하고 북진을 하는 동안, 일본은 일본대로 영역을 넓혀서 이미 훗카이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현대 일본 영토 대부분을 확보한 상태다. 그런 일본을 오키나와 원정의 연장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큰코다칠 문제지….’
그리고 일본은 삼국시대에 제대로 된 왕조가 들어와 지금까지 존속했다. 선사시대에서 겨우 벗어났거나 아직도 미처 벗어나지 못한 현재의 오키나와와는 그 수준이 전혀 다르다.
한국사로 치면 오키나와가 원삼국시대라면 일본은 적게 잡아도 삼국시대 후기에 들어선 상황인 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나라를 갖춘 일본의 군대는 오키나와 성주들의 군대보다는 질적으로 훨씬 뛰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게 고려군보다 뛰어나다는 말은 아니지만 강역과 인구까지 고려한다면 단기전에 끝내는 것은 쉽지 않다.
“왜국이 아조보다 약하느니, 강하느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강역이 넓어 저항이 길어지면 그만큼 아조는 그것을 진압하고 관리를 하기 위해 국력을 투사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아조가 준비한 북방의 전력들과 요새들을 몽고와 싸우기 전에 소모 시키라는 말이냐? 그렇게 소모하여 얻는 것이 왜국의 땅이 몽고와의 대전에 얼마나 도움이 된단 말이냐? 몽고와의 전쟁에서 밀리면 황상 폐하를 비롯한 황실을 왜의 땅으로 파천을 할 수 있으니 정벌하라고 하는 것은 아닐 테지?”
“그건 아니옵니다만….”
유갑수는 그래도 내심 아쉬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다. 뭔가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조짐처럼 보여 심이 불안하다. 내 측근이 군국주의에 빠지면 안 되는데….
* * *
“그대들 모두에게 묻겠다. 아조의 약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세간의 고려군에 대한 평가를 보면 전쟁을 하면 손쉽게 승리만 한다며 평가가 아주 높다. 실제로 나도 화포 등을 포함하여 지금 고려군은 매우 강하다고는 생각한다. 내가 몽골 정예 기병을 경계하기는 하지만, 지금의 고려군이라면 야전에서 단판전을 해도 100% 확신하는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몽골의 정예기병을 경계하고 몽골과 전쟁하는 것을 각오하면서도 대비하고 있다. 이건 고려군에는 큰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방군이 아니라 내가 지휘하는 군대를 포함하여 고려 자체가 그 약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조의 약점을 어찌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한 것은 김방경이다. 이때까지의 공적으로 고작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상장군(上將軍)에 오르면서 세간에는 조만간 흑두재상(黑豆宰相)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여기서 31세에 상장군이 된 게 얼마나 대단한지 이해하기 쉽게 예시를 들겠다.
무신정권의 2대 권력자이자 무신정변(武臣政變)의 주역 중 한 명인 그 정중부(鄭仲夫)가 무신정변 일으킬 당시 나이가 60대 중반인 65세였다. 이 당시 정중부의 관직은 현 김방경의 관직인 상장군보다 한 급 낮은 종3품 대장군(大將軍)이었다.
정중부가 에 들어갔다곤 하나, 무신정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의 수염 사건을 제외하면 개인 행적이나 인성이 큰 하자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정중부의 절반도 안 되는 나이에 상장군에 오른 것이다.
김돈중 문제로 출세가 막힌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정중부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환관 한뢰에게 뺨을 맞아 무신정변이 격발하게 된 정중부와 비슷한 연배인 이소응(1109년 출생)도 당시 대장군이었다.
이런 파격적인 승진에 주변에서는 김방경을 나의 오른팔 내지는 나의 세력에서 서열 2위로 보고 있는데 나도 반쯤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옳은 인식이다. 그러니까. 계속 그렇게 볼 수 있도록 이번에도 정답을 설명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약점이 하나만이 아니라 많다는 말입니까?”
약점이 여러 개라는 말에 유갑수가 놀라 반문하자 김방경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호구(戶口)가 적고, 병력이 적고, 강역이 좁으며, 마지막으로 재원이 부족한데 어찌 하나만이라고 하는가?”
김방경의 말에 유갑수는 반박한다.
“인구라고 한다면 요동에 있는 모든 호구와 견주어도 아조보다 작고, 병력은 수십만이오. 강역은 수천 리가 되며, 재원도 굶지 않을 정도라 번국에 하사하는 지경인데 무엇이 부족하단 말입니까.”
유갑수의 말대로 당대 고려가 인구가 작거나 궁핍한 나라는 아니다. 이 시기 원 역사의 고려만 해도 단순히 수치만 따진다면 세계에서도 약소국이라고 할 수준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뿐이니 부족한 것이네.”
“예?”
“아조에 사람이 많다고 하나 어찌 옛 금과, 송, 그리고 현 몽고보다 많겠는가? 하니 사람이 부족한 것이고,
만약 아조가 매일 몽고의 강역을 100리씩 취하고, 저들이 하루에 아조의 강역 30리만 취한다 한들, 아조가 먼저 다 빼앗기니 강역도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네.
이런 조건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할 재원이라도 충분한가 하면, 농번기를 계속 놓친다면 자멸을 걱정해야 하니 결국,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정도의 재원도 없다고 할 수 있네.
재원도 적고, 강역도 좁고, 호구도 적다면 병력으로 만회해야 하는데, 호구가 적어 병사의 수가 적은 것은 물론이며, 전국의 병정 중 정예 하지 않은 병사들도 많으니 병력도 부족한 것이 아니겠는가?”
“으, 으음.”
김방경은 그렇게 유갑수의 말에 설명을 끝냈고, 유갑수도 상대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인정하여 입을 다물자, 김방경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전하. 대개 어리석은 자들은 군사가 적더라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으니 임기응변에 따라 승리를 거두면 된다고 하는데, 분명 이러한 사례들이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하오나 그러한 사례들은 대개 그런 조건으로 싸울 수밖에 없던 상황인 것이지. 그런 상황에서 싸우게 되는 것을 자처하여 바란 자는 없사옵니다. 하여 신은 이러한 문제가 아조의 약점이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답이다. 이게 우리 고려의 약점이다. 여태까지 있었던 전쟁들을 떠오려보면 모조리 단기전으로 끝낸 이유가 장기전으로 갔다가 농번기를 놓친다면 전쟁에 든 전비의 소모 이상으로 큰 손해를 겪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과 작정하고 전쟁하는 것을 꺼리는 가장 주된 이유기도 하다.
덧붙여 김방경의 설명을 조금만 더 보강하자면, 고려가 유럽이나 일본 같이 제대로 된 봉건사회라고 하기엔 애매하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사에서 나름 봉건제적 색도 짙은 나라다.
덕분에 봉건국가의 장점인 병력을 쉽게 동원할 수 있다는 장점을 고려도 가지고는 있는데, 문제는 그와 동시에 그러한 군대의 고질적인 약점도 답습하고 있다. 바로 그렇게 모인 대군을 ‘일률적으로 지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서경에 주거하면서 호족과 귀족 등 북방 인사들과 안면을 익히고, 종종 북방군과도 군사훈련을 하며 최대한 줄여보도록 하곤 있지만 이것도 결국 북방군만 해당된다.
덕분에 지금 북방군은 남방군보다 질적으로나 통솔되어 움직이는 것으로나 모두 뛰어나, 그야말로 고려의 정예군이라고 할 수 있다.
단, 2차 옷치긴 전쟁에서 입은 피해로 전전긍긍한 것처럼, 숙련된 병사들을 잃으면 그로 인해 얻는 빈자리는 작지가 않다.
내가 몽골과 전쟁과 정예병들을 크게 경계하며 싸우기 싫다며 난색 하는 것도, 한두 번 승리해 봐야 북방군의 피해가 누적될수록 고려의 북방방어선도 약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