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458
458화
56장 동궁의 장자방(張子房)
그렇다고 장기전으로 갔다가 김방경의 말대로 농번기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실제 이쪽이 입는 손해는 단순히 해당 전쟁에 군량과 병장기 등에 사용된 전비 이상으로 국가 운용 자체에 차질이 생긴다.
단순히 농번기를 놓치는 문제만이 있는 게 아니라 피로스와 항우, 한니발처럼 전투에선 승리를 하더라도 전쟁에서 패했듯, 내가 이끄는 군대가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곳이 뚫려 내지에서 약탈을 하고 초토화한다면 재원 자체가 깎여 나간다.
요약하면 전쟁에서 적국을 이기는 가장 쉬운 기본 수단인 ‘상대 병사보다 훈련도가 높은 병사’와, ‘상대보다 많은 병력’, ‘상대보다 많은 전력을 공격이든, 방어든 다방면에 투사’하고, 이 ‘모든 것에 원활하게 보급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 지금까지 모조리 단기전으로 끝냈다.
그러나 조만간 있을 대전은 지금까지처럼 단기전으로 끝내기 힘들 것이고, 상대 또한 틀림없는 세계 최강의 강대국이다.
영토가 작고 재원이 적은 고려가 해야 하는 것은 그때까지 최대한 훈련하고, 축성을 하고, 재원을 비축하는 기본적이면서도 당연한 수단뿐이다.
이렇게 해도 대전이 불안한데, 여몽대전을 앞두고 일본과 진지하게 전쟁을 한다? 만전으로 해도 불안하고 대전이 터질 때까지 모아도 만전이 될지조차 불안한 전비와 병사들을 일본에 투사한다?
단기전으로, 그것도 일본의 보복이나 후환 문제도 없게 확실히 처리한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고수 전쟁 겪으며 크게 소모한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을 하던 상황을 답습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런 북로남왜(北虜南倭), 양면전쟁(兩面戰爭)의 상황을 굳이 자처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벌. 일본 정벌인가?’
만약의 이야기지만 이런 여몽대전을 앞둔 상황이 아니고, 유갑수의 말대로 일본 정벌을 전제로 군을 움직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고려의 입장에선 그 상황이 온다는 것 자체가 나쁜 전개지만, 여몽대전이 없다는 전제에서 일본을 정벌 내지는 우위를 점한 채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역시 일본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형식상 수도인 교토로 가는 최단 거리인 동해에서 일본 본토에 해당하는 혼슈 북부로 상륙하여 교토로 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동해의 험난한 파도가 첫 난관이고, 일본 지형상 혼슈 북부는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어 진군을 하는 데 많은 난관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혼슈의 지형을 논할 때 일본이 분국제(分國制=分国制)에서 괜히 혼슈 서쪽을 가로로 길게 잘라 산인도(山陰道), 산요도(山陽道)로 구역을 나눈 게 아니라지?’
일본의 지리상 동해에서 혼슈 북부에 상륙하여 남쪽으로 가려는 것은 혼슈 북부에 있는 산맥들로 인해 교토로 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큐슈를 통해 세토 내해를 이용하여 일본의 교토 도달하는 것이 정공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거기다 이 시기 일본의 실질 수도는 교토가 아닌 가마쿠라니 가마쿠라까지 정벌하자고 한다면 원정 거리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일본이 고려 이상으로 봉건제적 성격이 강해서 66개의 쿠니(国=國)들이 독자적으로 노는 경향이 크긴 하지만 교토의 덴노를 군주라는 것과 자신들을 일본이란 테두리 안에 있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저들에게 외적에 해당하는 고려에서 대군과 군함들을 이끌고 나타난다? 그렇게 된다면 분명….
“…아!”
“왜 그러십니까? 전하.”
무심코 튀어나온 육성에 부하들이 반응하지만 무시했다.
‘아니, 아니겠지. 만일 사실이라면 이걸 생각한 놈 낯짝이나 보고 싶은데.’
순간 떠오른 것은 외적이 출현하면 내부가 단합한다는 점. 실제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나당 전쟁을 거치면서 신라와 민족 통합과 동질성이 이전에 비해 강고해졌고, 임진왜란 시기 붕당도 전란이 한창일 때에는 단합했다.
고려도 원 역사에서 여몽 전쟁으로 삼국의 후손보다 고조선의 후손으로 민족성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그런 전란일수록 평소라면 별로 신경도 쓰지 않던 황실과 지배층에 관심이 쏠려, 그들이 나라의 중심이 되어 규합되거나 부려진다.
나당 전쟁에서 정안국이 신라의 지시에 따른 것이나, 원 역사의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치려고 하자 당대 싯켄의 권력과 권위는 역대 싯켄들중 가장 높아졌다.
물론 여몽 일본원정 이후 종군한 이들에 대한 보상 문제로 호조 가문이 휘청이긴 했지만 적어도 전쟁 당시에는 싯켄과 조정의 권위가 강고했다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 외에 에도 막부도 말기에도 외세의 성장에 두려움을 느낀 일본이 덴노라는 깃발 밑으로 다이묘들과 사람들이 모여 결국 쇼군의 권력을 덴노에게 되돌려지기까지 했다.
즉, 외적의 출현은 위기인 동시에 내부 강화와 권위 상승과도 크게 밀접하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떠오른 의심은 이번에 일본에서 밀사를 보낸 놈이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진정한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하.”
사실이라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아니, 실제 헛웃음이 나와서 측근들이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헛웃음이 나온다.
‘밀사의 뒤에는 쇼군이나 덴노 둘 중 하나… 라고 하기엔 분명, 지금의 싯켄도 선대 싯켄이 죽어서 입지가 다소 불안한 상태라고 했지? 그러면 호조 가문도 후보로 넣어야 하는데, 설마 이것까지 염두에 둬서 지금 보낸 것인가?’
내가 의심한 것이 정답이라면 일본의 사정을 명확히 아는지 모르는 이상, 이것을 두고 기책(奇策)이라고 할지 아니면 광책(狂策)이라고 해야 할지는 즉답을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생각한 놈은 과감하거나 상당히 미친놈인 것은 분명하다. 아니면 그 두 개 전부 해당하는 놈이거나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에 순순히 당해주고 싶지 않다. 고려를 적으로 삼아 단합하자니. 그럼 결국 고려 위상은 물론, 양국 관계도 교린보다는 대립에 더 가깝게 되지 않는가?
“어지간하면 적당히 병사만 보냈다가 무사히 돌아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이게 맞는다면 그냥 넘어가기 힘들구나.”
하지만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히 답이 안 나온다. 내가 여태까지 일본에 대해 생각한 전략이나 책략들은 대개 혹시 모를 일본의 침공을 대비하거나 공세를 펼쳐도 대마도를 쳐서 경고하는 정도까지고, 그 외에는 대부분 무역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분하다고 유갑수 생각처럼 정벌하자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로서는 이대로라면 그냥 포기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나 혼자라면 말이다.
“이장용. 너도 알다시피 나는 과거를 참관하다가 종종 그 자리까지 올라온 이들에게 ‘책략을 묻는다’고 하여 책문(策問)을 내린다. 내가 참관할 때 너도 동행하니 그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하면 지금 네게 책문을 내리고자 한다. 받아보겠느냐?”
‘지금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 무얼 묻고자 한다는 것을 너라면 알 거다. 동경에서 밀사를 받은 일을 듣게 된 이후 너 나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을 알려주면 나보다 더 나은 책략을 생각해다오. 나의 장자방(張子房)아.’
* * *
쓰시마 재청관인(在庁官人) 아비루 치카모토(阿比留親元)는 고려에 조공하면서 고려 조정으로부터 하사품과 함께 대마도주(對馬島主)라는 직첩을 받았는데, 이렇게 받은 대마도주의 품계는 고려에서 정6품의 서열로 대우해 주고 있었다.
정6품은 최근 폐현치번 되기 전까지의 탐라국 역대 성주들이 가장 많이 받은 종5품 유격장군(遊擊將軍)의 바로 밑에 해당하는 품계였으나, 조선 시대에 조선에서 봐주던 대마도주의 품계에 비하면 낮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고려가 딱히 대마도를 폄하한 것은 아닌 것이 왜구 근절로 골치 아프던 조선에 비해 이 시기 고려에서 대마도는 정벌하려면 언제든 정벌할 수 있고, 무역도 일본 쪽에서 먼저 올 것이 뻔해서 아쉬운 쪽은 일방적으로 대마도 쪽이었다.
그럼에도 고려의 오랜 봉신국(封臣國)인 탐라국의 군주가 자주 품계 바로 아래까지 내려준 것이니 고려로서는 오히려 대마도를 대일무역의 중간기착지로써 나름 높게 인정해 줬다고 할 수 있었다.
한편 지금 대마도에는 오늘날로 치면 대마도 주고려대사 같은 입장으로 배영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는 동경의 난에서 활약한 공으로 무산계 진위교위(振威校尉)를 받았지만 품계로 따지면 종6품으로 치카모토보다 아래에 해당했다.
물론 그렇다고 고려에서 온 배영을 치카모토가 홀대하지는 않았다. 사석에서 만난다면 후하게 대해주고, 연회를 열면 부르며 존중해 주며 귀빈에 가깝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주 불러 후대하는 치카모토지만 내심 배영에 대해서는 큰 관심은 없었다. 그가 고려에 조공을 보내고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큐슈의 쇼니가가 자신을 정토하거나 간섭할 것을 경계한 것이지 진심으로 고려의 신하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아비루는 배영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정말로 대국에서 병사들을 보낸다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일전에 도주께서 조정에 청하지 않았습니까? 그 문제를 위해 아조에서 군대를 추가 보내게 된 것입니다. 본래라면 칙서가 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도주께 특별히 귀띔해 주는 것입니다. 이만큼 아조에선 도주를 아끼는 것이니 도주께서는 이후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으실 것입니다.”
“그, 그렇다니 자, 잘됐구려.”
축하하는 듯 대답해 주는 배영의 모습에도 맞장구치는 말과 달리 치카모토의 낯빛은 어두웠다.
실질 젖형제인 하지메 사토루를 보내면서까지 고려를 끌어들인 그지만, 정말로 고려에 편입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만큼 판옥선이 하나만 와서 자신의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고, 반대로 큐슈는 자신을 간섭하지 못하게 지금의 상황을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만족스러운 균형 상태가 이번에 깨지게 될 상황이었다.
* *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고려군이 우리 쓰시마로 오다니?! 고려는 본국을 경계하여 우리에게 군대를 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닌 밤중 홍두깨 같이 고려군이 추가로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치카모토는 배영이 돌아가자마자 즉시 고려군을 끌어들이자고 자신을 꼬드긴 사토루를 불러 불벼락을 내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주군. 진정하십시오. 이, 이번 일은….”
그렇게 당황하며 뭔가 말하려던 사토루는 즉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기가 지금 말하는 내용이 주군의 심기를 더 건드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카모토는 그의 일순의 멈칫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이 허우대만 멀쩡, 아니, 비루한 가신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번 일은? 이번 일은 뭐란 말이냐?”
억지로 윽박지른다고 한들, 오히려 움츠러들 것이 뻔한 이 미운 정 고운 정든 가신을 구슬리기 위해 다소 진정한 목소리로 다그쳐 봤다.
어차피 고려군이 오기로 결정된 이상 질책한다고 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고, 사자로 보낼 사람으론 미우나 고우나 젖형제뻘인 이 돼지(하지메 사토루)가 제격이라 크게 벌할 생각은 없었다. 실제 그때 자신도 동의하지 않았는가?
자기가 동의해서 벌어진 일로 이제 와서 젖형제뻘인 가신을 죽이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이 상황에서 나은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 그게….”
우물쭈물하는 가신을 두고 치카모토는 짜증을 느끼면서도 우선 자력으로 고려군을 격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배영과 판옥선 1척의 수부와 수병, 시종 등이 이제까지 대마도에 지낸 덕분에 치카모토는 판옥선의 적재된 병정들의 수가 자신들의 생각보다는 훨씬 작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거선의 크기는 여전히 위협적이었고, 대마도에는 고려를 이길 힘은 없었다.
만약 고려와 무력으로 맞서 싸울 것을 각오한다면, 큐슈와 일본 조정에 원군을 요청하고, 자신들은 산림에 들어가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서둘러 군대를 보내온다고 하더라도 대마도까지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그리고 수전에서 이길 것이라는 생각도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려의 판옥선을 본 쇼니 놈이 순순히 제 병력을 바다 밖으로 보낼지는 더 의심스럽고, 설령 보내줘서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 후에도 이 쓰시마가 여전히 우리 가문의 소유일지는 더 의심스럽고 말이야.’
“…그, 그러니까.”
“그래. 말해봐라. 뭔가 알고 있지? 조금이라도 뭔가 들은 것이 있을 것이야? 너와 나 사이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정보라도 알린다면 탓하지 않을 테니까. 좋은 방도를 모색해야 하니 어서 말해봐라.”
“…이번에 고려에서 군대가 온 것은 우리 쓰시마 때문이 아니라 큐슈 때문입니다.”
“큐슈 때문?”
“예.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큐슈에서 온 사자로 인해 고려가 군대를 움직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가…. 그, 그러니까. 이것도 어디까지나 들은 이야기지만 이번에 오는 고려군을 지휘하는 장수가 고려 태자 휘하 장수라고 합니다.”
“…고려 태자의 휘하 장수라면 누구지?”
“…김방경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니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순간, 아비루 치카모토 전신의 살갗엔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몸속에서 스며 나와 그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