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490
490화
9장 적에게 소금을 주다(3)
“…….”
이 침묵이 무언의 긍정인지, 제 딴에는 이길 가능성도 있어 보였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대답하기 싫어서 침묵하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이 야욕이 넘치는 의형제의 모습을 보니 새삼 이 녀석이 폭주하지 않도록 조치할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이해했다.
“그럼 다르게 말하겠네. 자네가 그런 수난을 당하는 것은 곁에 쓸 만한 인재가 없기 때문이네. 일전에도 그렇지만 지금으로 봐도 자네가 형제들 중 가장 취약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말에는 다소 발끈했는지 아리크부카에게서 감정 섞인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안다가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내가 비록 큰 세력은 아니지만, (내게도) 뛰어난 전사들이 있다.”
그 대답에 나는 즉시 긍정해 줬다. 아리크부카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도 있지만 적어도 일전에 보여준 사냥을 할 때 그를 보조하는 전사들의 능력은 결코 폄하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지적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물론 자네에겐 뛰어난 전사들이 있지. 그러나 그들을 지휘할 군사(軍師)나 책사(策士)가 없지 않은가?”
“그거야….”
“일찍이 여러 제왕들은 책사를 곁에 두었다네. 내 듣기로 그대의 조부이신 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즈칸)께서도 전사만을 중시하지 않으셨다고 들었고, 선대 칸은 물론, 상보께서도 거란인 문관을 곁에 두셨던 것으로 알고 있네.”
나의 지적에 아리크부카는 결국 내 말에 수긍했다.
“…솔직히 나도 알고 있네. 내 주변에는 뛰어난 전사는 있지만 어머니와 같이 해박한 지식과 지혜를 갖춘 자가 없어. 그런 사람을 찾고 있지만, 결국 지금 내게 있는 책사는 ‘안다’, 그대뿐이네.”
어어. 나는 넣지 마라? 그래도 두뇌의 필요성을 자각했다면 말을 꺼내기는 쉬워졌다.
“그것을 자각했다면 됐네. 요하까지 데려다준 이후 바로 카라콜룸으로 가지 말고 하북으로 가보게.”
“하북? 거기에 뭔가 있나?”
“내가 알기로 지금 하북에 진해(鎭海 친카이) 재상이 있다고 들었네. 그를 포섭해 보게.”
“친카이? 발주나의…. 확실히 그라면 인재긴 하지. 바로 사람을 보내….”
이 인간이 설마, 칭기즈칸 시절부터 종사한 창업 공신을 턱으로 오라 가라 시킬 셈인가?
“이보게. 설마 사람을 보내려는 건가? 지금 자네가 포섭할 대상은 성길사한 시절부터 몽골국을 지탱한 공신이 아닌가? 그런 인재를 얻으려면 그에 걸맞게 태도를 보여 포섭하게.”
“…나보고 직접 가라고?”
바보는 아닌지, 내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한 듯하지만, 정작 그 의미에 보여준 아리크부카의 표정은 의심 반 황당 반의 감정으로 가득했다. 황금씨족인 자신이 굳이 직접 가서 포섭을 시도해야 하냐고 말하고 싶은 건가?
“내가 갔다가 거절당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인재 중 인재이니 그에 맞는 격으로 영입해야 하네. 그 옛날 촉한(蜀漢)의 촉왕(蜀王) 유비가 무향후(武鄕侯 제갈량)를 영입하기 위해 3번이나 찾아갔듯(三顧草廬) 자네도 그리하게.”
“으음. 하지만 그는 이미 이쪽으로 불린….”
아니, 이 인간이 제 처지는 무시하고, 친카이만 좌천당한 늙은이 취급하네?
“아닐세. 생각해 보게. 다시 말하는데 진 재상은 성길사한 시절부터 대국에 종사한 공신 중 공신이 아닌가? 그를 자네가 직접 가서 예를 다해 포섭한다고 하더라도 천하는 그대가 공신과 노인에 예를 다한다고 보는 이들이, 그대의 발이 가볍다고 할 자보다 훨씬 많을 것이네.
거기다 진 재상이 좌천당했다고 여긴다면 그를 포섭하면서 상대적으로 물러난 노신과 노장들 중 아직 의욕이 있는 이들은 자네를 찾아갈 것인데, 그들이 전부 자네의 세력이 될 것이네. 어디 그뿐인가? 그들과 관계된 이들도 자네를 알고 이목을 집중시킬 것일세.
그렇게만 된다면 자네는 가만히 앉아서 숙장들과 세력, 명성을 모두 늘릴 수 있을 것이고 상보께서도 자네를 가벼이 여길 수 없게 될 것인데 무엇을 마다하는가?”
그 말에 그제야 귀가 번쩍 뜨인 것인지 아리크부카의 안색이 밝아졌다.
* * *
하북.
“예정에도 없던 아리크부카 님께서 직접 오셨다기에 이렇게 만나 뵙사오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실망입니다.”
“…….”
황금씨족인 아리크부카에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친카이를 두고, 동행한 아리크부카의 부하들은 노신을 향해 인상을 쓰며 노려보았으나, 칭기즈칸 시절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친카이에게 그 정도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거기다 친카이는 아리크부카가 여기에 직접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점에서 급한 것은 아리크부카쪽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일부러 거칠게 말한 것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이 정도로 돌아간다면 저들이 급하거나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으로 별로 신경 쓸 것이 못 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몽케 형님과 손을 잡았다.”
대뜸 내뱉는 아리크부카의 말에 친카이의 새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과연. 아리크부카 님이 이곳에 오신 시점에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처음 예상과 달리 현명하신 선택을 하셔서 목숨을 건지셨군요. 하지만 그것으로 아리크부카 님은 마지막 권리까지 몽케 님께 드렸는데 제가 굳이 아리크부카 님을 따를 이유가 있습니까?”
교섭 재료 이전에 입장부터 형편없다고 에둘러 말하는 친카이의 질문에 아리크부카의 부하들은 발끈했으나 그들을 진정시키며 아리크부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칸이 그대를 다시 부르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도발에 친카이는 그야말로 같잖은 도발에 불과하며, 협상 능력도 형편없다는 듯 미약하게 비웃음을 머금으며 되물었다.
“그것이 제가 아리크부카 님께 붙을 이유가 되겠습니까?”
“친카이 님. 아리크부카 님은 이미 다른 형제분들과도 손을 잡고, 고려 왕태자와도 안다가 되었습니다.”
“안다라…. 참으로 좋은 말이죠. 그 안다와 영원히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면 말입니다.”
비웃음이 섞인 노인의 대답에 아리크부카의 부하들은 더욱 발끈했다.
“고려 태자는 카라콜룸까지 와서 형제분들의 분쟁을 중재했습니다. 두 분의 사이를 내분을 촉구하는 발언은 하지 마시지요.”
“직접 와서 중재했다구요?”
이때 처음으로 친카이는 의아함과 확인을 위해 고개를 보다 아리크부카를 향해 돌리며 물었고, 아리크부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참….”
아리크부카의 답에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면서 잠시 침묵에 잠기던 친카이이었지만, 이내 희미한 웃음을 띠고 물었다.
“고려 왕자가 아리크부카 님께 저를 만나보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대를 얻기 위해서라면 직접 가야 한다고 하더군.”
“허허허. 고려에도 이 노인의 이름이 알려졌다는 것만 해도 부끄러운데 그렇게 말해주니 더 부끄럽군요. 하면, 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라고도 하였습니까?”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렇다면 순전히 아리크부카 님의 재량으로 저와 교섭하라는 말이군요.”
“나를 도와주지 않을 텐가?”
“저를 설득해 보란 말입니다.”
친카이는 느긋이 말했다. 아무리 좌천당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일세의 영걸이 일개 부족을 세계의 대제국으로 만드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자였으며, 그 영걸 밑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인재였다.
그 칭기즈칸이란 주군에 비한다면 눈앞의 아리크부카는 눈에 차지 않는 것은 당연했고, 잘 알지도 못했다. 그나마 들은 것은 고려와의 전쟁에서 큰 낭패를 보게 만든 원인이라는 점이었다.
즉, 능력으로는 오히려 불안한 점투성이였던 것이다. 그런 노신에게 아리크부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야율초재라고 했던가? 현재 카칸의 곁에 있는 거란인이?”
꿈틀.
“좌천 당한 상태로 끝날 셈인가? 나와 함께한다면 그대의 권력이 줄지는 몰라도 칭기즈칸의 측근으로서 살았다는 말을 듣게 해주겠네.”
“…….”
친카이는 침묵했고, 아리크부카도 침묵했다.
“교섭의 재료로는 형편이 없으니 아리크부카 님께서는 참으로 교섭을 하실 줄을 모르시는군요. 하지만, 교섭의 재료는 차치하고서라도 개인적으로 움직일 이유는 충분하군요.”
* * *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 -라는 말이 있다.
이건 일본에서 쓰는 관용어로, 일본 전국시대 우에스기 겐신이라는 다이묘가 포위당해 소금이 부족해 곤란함을 겪은 적인 다케다 신겐에게 소금을 보내줬다는 일에서 나온 것이다.
보통 ‘적에게 일부러 도움을 주는 행위’를 두고 사용하는 관용구라고 하는데, 지금 내가 카라콜룸에 가서 한 것은 그것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이렇게 한 것은 지극히 몽골에 사달이 나면 이쪽이 곤란해서 저지른 행동이라는 것이지만 말이다.
‘솔직히 친카이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 그저 칭기즈칸 시절부터 있었던 몽골제국의 창업 공신 중 하나라는 것과, 지금은 야율초재에 의해 사실상 좌천당한 상태라는 것 정도지. 그래도 그런 업적과 내력을 갖춘 노인을 아리크부카가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아리크부카를 강화시켜 주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번에 몽골에 방문하고 보니 아리크부카의 세력이 취약해도 너무 취약하다.
그냥 세력이 약한 수준이 아니라 그 얼마 없는 세력 내에서 병사는 있는데 책사나 군사라고 할 수 있는 머리가 없는 실정이다.
지금이야 그의 어머니 소르칵타니가 도울 수 있겠으나 그녀 혼자서 아리크부카만을 봐줄 리도 없고, 이번처럼 형제끼리 싸우면 친모인 그녀는 누구를 집중적으로 손들어 줄 리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구유크와 원 역사대로라면 쿠빌라이도 문제고, 남송의 준동도 문제인데, 아리크부카 본인이 다혈질에 판단과 행동이 빠르다는 것은 매우 큰 불안요소다.
내가 없는 동안 아리크부카가 폭주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거기에 내가 연루되어 내 할 일을 못 한다.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문제 때문에 친카이를 붙이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친카이는 오래 못 산다. 얼마 안 남은 수명으로 딱 고려가 성장할 때까지만 아리크부카를 붙잡고 있어라.’
* * *
개경.
“근래 지방에서 올라온 수령들의 장계를 보면, 지시한 대로 한자(漢字)와 해동문자(海東文字 한글)를 같이 써서 올리는 것이 이제 제대로 자리 잡은 것 같아 몹시나 흡족하다.
하나, 금년 지방의 호장들이 올리는 글들이나 문서를 보면 아직도 한자가 많고, 해동문자가 없거나 미숙한 것들이 많으니 이 실정이 참으로 염려스럽다. 본국의 문자는 한자보다 익히기가 쉽다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도 증명한 것이거늘, 관아에서 그들에게 해동문자를 알리지 않은 것인가?”
“어찌 알려주지 않았겠습니까?”
“알렸으면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니 이를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조에 문자가 만들어진 것이 아직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방의 수령들은 조정에서 발탁한 이들이라, 이미 학식을 갖추고, 나라의 방책을 잘 알고 있으나 지방의 토호들은 그렇지 않아 아직 익숙지 않습니다.”
“아니, 본국의 문자는 배우기가 쉬운데, 여태 익숙지 않다는 말인가?”
“아무리 쉽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배우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쉬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지방의 호족들은 과거에 응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아 저들이 배운 학식은 대개 한직으로 지방에 있는 자들이나 과거에 붙지 못한 지방의 선비들이나 유생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하나 이들은 해동문자가 만들어졌을 때 조정에 있지 않았고, 한직이다 보니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어, 모르옵니다. 이후 나라에서 알려주더라도 그것을 해동문자를 소홀히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허어, 하면 이를 해결하려면 어찌해야겠는가?”
“그저 향리들의 공문서에도 해동문자도 사용하라는 공문으로 내리도록 할 뿐입니다. 거기다 향교에도 이미 해동문자를 가르치기를 공문으로 내렸으니 이제 시간이 흐를수록 해결될 것으로 보이옵니다.”
“음. 알겠다.”
한글의 창제와 전파에 대해 왕과 왕태자 부자는 이미 국책으로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신하들이었기에 대전의 어느 누구도 한글의 전파와 사용을 중단하자는 말을 하는 신료가 없었다.
“폐하. 문자의 문제도 중하나 지금은 조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로 사료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지난해와 비교하여 조세가 크게 늘어나지 않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세가 줄어들었다면 모를까? 그대로인데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이더냐”
왕은 신하들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세가 줄어들었다면 기근이나 흉작 등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니 해결하기 위해 방책을 마련해야 하나, 그대로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니옵니다. 지난해의 조세는 어디까지나 도성 주변 인근의 가뭄과 흉작이 들고, 북벌로 인해 줄어든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 생업으로 돌아간 백성들이 적지 않고, 올해는 가뭄이나 폭우조차 없는데 조세가 재해가 있던 시기와 별 차이가 없는데 어찌 문제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