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503
503화
15장 호애천자(胡愛天子)(3)
“왕태자는 내일이면 돌아간다고 하니 많이 아쉽구나. 마음 같아선 차후 외교는 왕태자가 왕래하면 좋겠으나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잘못된 것인지는 짐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니 다음에도 이번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구태여 왕태자가 직접 올 필요는 없도다.”
이번 입조를 전례로 계속 친조 하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을 것이고, 주변에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거절하겠다는 말인데, 설령 오라고 칙서를 보내도 안 올 거다.
미쳤다고 태자 신분으로 외국을 계속 오갈까? 이번에도 아라크 부카 사건만 아니라면 절대 안 왔을 거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래도 그걸 말로 할 수 없어. 배려해줘서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이 머리 정수리로부터 느껴진다. 뭐, 이쪽도 받은 게 있으니 대등한 예로 작별인사했으면 웃으면서 떠났을 것이다.
북송 시절에도 그랬지만, 작금의 고려 사신들도 남송에 가면 후한 대접을 받아서 과장 좀 보태서 남송행 사신단을 마치 관광여행이라도 가는 것으로 여긴다고 하는데 이건 그만큼 후한 대접을 받아서다.
그리고, 직접 경험해 본 결과, 내가 참여해서 더더욱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의심도 함께 받는 상황에서 엄청 후하게 대접받으며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짐이 왕태자가 오는 것을 일찍 알았더라면 더욱 여유 있게 준비했을 것을, 참으로 안타깝구나.”
“이미 황상께서 하사해 주신 것만으로도 황은이 하해와 같은데 어찌 염치없이 더 많은 것을 바라겠나이까? 아조로 돌아가는 대로 반드시 대왕께 전하고, 회맹을 서두르겠나이다.”
내가 글과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말에 《개보통례(開寶通禮)》, 《책부원구(冊府元龜)》, 《문원영화(文苑英華)》, 《태평어람(太平御覽)》, 《군서고색(群書考索)》은 물론 많은 경서(經書)와 농서(農書)들도 줬다.
덧붙여 《개보통례(開寶通禮)》, 《태평어람(太平御覽)》, 《문원영화(文苑英華)》는 고려 선종 시기 사신을 보내 요구한 책들이기도 한데, 당시 북송에서는 《문원영화(文苑英華)》만을 줬다고 한다.
《개보통례(開寶通禮)》는 총 200권에 달하는 북송 태조의 명으로 편찬된 예서(禮書)다.
《군서고색(群書考索)》은 송(宋)나라 때 장여우(章如愚)가 경사(經史), 제자(諸子), 문장(文章), 서목(書目), 예악(禮樂), 율력(律曆), 천문(天文), 지리(地理), 재부(財賦), 변방(邊防) 등에 대해 고증하여 편찬한 유서다. 여기서 유서는 죽을 때 남긴 글이 적힌 유서(遺書)가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백과사전과 비슷한 유서(類書)를 말한다.
《문원영화(文苑英華)》 중국 북송(北宋) 시대에 성립된 시문집인데, 《태평광기(太平廣記)》, 《태평어람(太平御覽)》, 《책부원구(冊府元龜)》와 함께 송사대서(宋四大書)로 꼽힌다. 여기서 문원영화는 고려 선종 시기 이미 받았는데 왜 또 받았냐고 할 수 있는데, 이번에 받은 것은 남송 효종(孝宗 송 11대 황제, 남송 2대 황제. 1127~1194) 조신 치세에 교정돼서 다시 만들어진 책인 것이다.
사실 이미 송에서 허가 안 했으니 있냐 없냐로 따지자면 고려는 송나라가 허가를 안 해도 어떻게든 구매하거나 얻어 가는 일이 자주 있어서 저들이 허락 안 하거나 주지 않으면 ‘절대 못 본다.’로 무조건 직결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준다면 받는 게 좋다. 황제의 성의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 이전에 나라에서 주는 것은 좀 더 제대로 교정된 ‘신판’이라는 점과 ‘공짜 책’을 얻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이 시기 남송도 그렇지만 고려에도 인쇄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애초에 인쇄술 자체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고대 시대에도 사용했고, 그리고 지금도 사용 중이다.
심지어 이 시기 고려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의 사례에서도 알다시피 이미 금속활자까지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아무리 인쇄술을 가지고 있어도 그걸 인쇄할 종이가 하늘에 뚝 떨어지겠는가? 종이(한지 韓紙)를 만드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는데, 그걸 공짜로 주겠다는데 왜 마다하겠는가?
기존에 있는 것과 내용이 다르다면 그때 교정된 걸 기준으로 새로 만들면 그만이고 말이다.
* * *
명주.
남송도 회맹 언급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를 의심하고 있던 티를 낸 것이 찔리는지, 아니면 회맹이 다가오니, 주 왕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책 말고도 다른 회사품으로 짱짱하고 오면서 얻은 것도 많다.
‘가장 바란 것은 해상 실크로드로 가는 항로를 자유자재로 사용허가를 받는 것이지만, 직접 와보니 알겠다. 이건 당분간 포기하자.’
송이 국력은 몰라도 재력으론 이견 없는 중국 역사상으로도 손꼽히는 부국(富國)이다. 특히 정강의 변 이후 남송에 이르러선 국가 수입의 약 7할이 상업에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바다를 통한 무역에서 나온 조세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조 조선 아니랄까 봐, 장사치를 천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지만 그런 풍조와 별개로 ‘제 밥그릇이 뭔지 정도는 알고 있다.’
당장 방금 말한 송과 비슷한 조선만 해도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상인을 천시했지만, 보다 교조화된 조선 후기에서도 인삼으로 청과 일본에서 무역 흑자를 얻으려고 하던 것이 국가 방침이었고 수단이었다. 여기서 그럼 한 가지 태클 걸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남송이 그렇게 해상 무역을 중요시하면서 정작 일본이랑 오키나와는 순순히 포기하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재차 말하지만 이 시기 오키나와는 나라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곳에 남송에선 상인들조차 고려나 일본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 용도로 간혹 사용하는 곳이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해금령이 실시된 시점에서 그 가치는 더 떨어졌다. 굳이 잃고 말고 할 것까지 없는 수준인 것이다. 막말로 고려에서 우산국에 밀무역을 하는 이들이 있고, 거기서 얻는 이익이 있다고 한들,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그리고 일본 쪽은 공식적인 국가 방침이 ‘쇄국(鎖國)’이다, 고려 초기와 달리 지금 와서는 은근슬쩍 무역하려 들고 있고, 번성했을 때에는 남송 상인들도 일본 큐슈 쪽에 가서 지내기까지 했지만 거기서 얻는 이익은 남송의 국가 수익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쯤 되면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지금까지 내가 고려로 동북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니 마니 하고, 해동무역을 주도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느니 했고 실제 큰 이익을 얻기는 했다.
하지만 그 주도권을 얻고 승천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려의 입장에서지, 남송 입장에서 만한전석(滿漢全席 청나라 시기 만들어진 궁중요리)에서 나오는 반찬이 한 가지 줄어든 것에 불과하다. 그것도 메인 요리도 아닌 그냥 흔하디흔한 반찬인 콩나물무침 위치의 작은 반찬이 하나 사라진 정도.
가히 군대나 전쟁에서 몽골과 비교할 때마다 느낀 당혹감을, 경제력이란 부문에서는 남송에게서 느낄 정도니, 그야말로 역중몽고 재중남송(力中蒙古, 財中南宋 힘에서는 몽골, 재력에선 남송)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남송에서도 일본과 교역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긴 할 것이다. 단지, 줄어든 양이 있다고 한들, 고려를 우군으로 삼는다면 국가안보 관점에선 싼 장사라고 본 것이지.
그리고 지금도 남송이 해동과의 무역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딱히 무역이 단절된 것도 아니다. 이쪽이 중개 무역으로 이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 남송에서 보자면 해동의 창구가 고려로 집중된 것이니 말이다.
덕분에 이 부분은 해금되며 중계, 중개 무역을 위해 적극적으로 고려가 송-일 무역의 가교 역할을 하는 지금이 어느 의미론 ‘정식’ 송-일 무역이 활발해진 셈이고 말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래도 천주(泉州 중국 취안저우)까지 교역을 허락받았다.
그 해상왕 장보고조차 해상권과 활동권이 서남쪽으론 동중국해까지만 석권했으니 남중국해까지 넓힌 당대의 고려는 ‘안정적인 항로 권역은’ 고려 건국 이래 최대라고 해도 좋다. 이거야!
어차피 남송이랑 드잡이할 상황도 아니고, 당분간은 남송 밖의 항로를 얻기보다는 남송 내 안정적인 교역 항구를 늘리는 방향으로 가자.’
참고로 천주는 남송에서 손꼽히는 국제 항구 중 하나로 고려로 치면 벽란도급의 위상을 가진 곳 중 한 곳이다. 현대에서도 그렇지만 유통과정에서 거리가 멀수록 비용이 더 늘어나는 것은 이 시대도 마찬가지다. 아니, 시기가 시기다 보니 그 차이는 더 심하다.
그런 만큼 서역, 천축을 비롯한 많은 상인들이 오는 천주까지만 가도 벽란도는 당연하고, 임안에서 구매하는 것보다 싸게 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나아가 서역의 외국 상인들과도 지금보다는 더욱 많이 조우할 수도 있게 된다.
‘이 시기 바다 상인들을 통해 알아낸 서역의 정보라고 해봐야 몽골 제국의 파발보다 훨씬 느리겠지만, 슬슬 몽골 외에도 몽골의 사정을 알아내는 정보선을 더 늘릴 필요도 있고….’
결과적으로 말해 이번 사신행으로 말로만 듣던 송나라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소문만큼이나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외교적 최저 목표는 충분히 달성했다. 특히 가장 추구하던 전쟁의 연기는 사실상 이뤄졌다고 본다.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됐다.
‘회맹의 발언은 우리로서도 양날검이다. 회맹을 주청하며 북벌을 거론한 이상, 저들은 우리를 의심하면서 재차 재정비를 하겠지만 역으로 말해 그 준비가 끝나면 북벌은 무조건 벌어진다.’
결론을 말하면 전쟁을 연기하기 위한 회맹 발언이지만, 그 방도가 ‘적극적 주전 의지를 보이는 것으로’ 연기시켰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이후 몽골에게 넘어간다면 이쪽에서 남송을 속이기 위한 방도라고 변명해도 저들이 의심의 시선을 완전히 지우진 않을 것이다. 일부 고위층들이 믿는다고 해도 이번 남송 백성들과 지방관들처럼 의심의 시선을 지우긴 힘들 것이라는 것이고, 겉으로는 알았다고 해주더라도 이후 우리를 칠 준비가 마쳤을 때는 칠 명분도 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구유크. 그놈 성정상 서정이 끝나거나, 일단락만 돼도 동정이 시작되겠지.’
결국 기책(奇策)으로 위기를 모면해도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위기는 그대로이거나 후환이 더 힘들다는 말이다.
“…내가 이래서 기책(奇策)이 싫어.”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하?”
“이제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는 말이다.”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반문하는 유갑수의 얼굴에 기름기가 좌르르하다. 아무래도 남송에 있는 동안 잘 먹고 지냈나 보다. 겸사겸사 즐겨 보라고 밖으로 보내긴 했지만 일은 제대로 했겠지?
“괜찮을 것입니다. 우서자라면 잔금(殘金)과의 외교도 무사히 성사시킬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안 그러면 곤란하다.
* * *
고려 태자의 몽골 친조 사건을 시작으로 일어난 의심은 회맹 주청과 호애천자의 언행으로 끝이 난 일진광풍(一陣狂風)과도 같았던 고려의 소란은 이렇게 다시금 해결된 듯 보였다.
“내 궐에서 일하는 내 친척이 말하길, 고려가 북벌을 위해 회맹을 주청했다고 하더군.”
“회맹? 어허. 그렇다면 틀림없이 고려가 몽고와 적대하고 있는 게 분명하군. 우리와 협력한 것이 분명하군 분명해!”
“어이. 안 씨. 회맹이 뭐길래 그걸로 고려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건가?”
“어허. 이 사람이…. 회맹이 뭔가? 바로 천하 만방의 제후들을 불러 중대 현안과 관련되어 맹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 고려 태자가 나라에 와서 주청한 것이 그 회맹인데, 그냥 회맹인가! 아니지! 바로 북벌에 대한 회맹이네.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가? 고려가 북벌에 대한 선언은 천하에 대대적으로 선포한 것일세! 그것을 뒤에 가서 아니라고 한다면 천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고, 몽고에서도 저들을 의심하는 것일세.”
“어허. 과연 장의(張儀)라고 그렇게 말하던 것이 몽고의 장의(張儀)가 아니라 우리 대송의 장의(張儀)였다 이 말이군?”
“예끼! 장의라니? 회맹으로 힘을 합치는 것이니 소진(蘇秦 춘추전국시대 합종책을 제안한 전략가)이지.”
“장의고 소진이고 아무렴 어떤가? 결국 고려가 은혜를 알고 든든히 협력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하하하!!!”
적어도 백성들 사이에선 조정과 사대부들이 고려의 반응에 대해 의심을 거두거나, 판단을 유보하거나 혹은 배신을 떠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났으니 처음 몽골에서 일어난 사건 이후 오를 대로 오른 적대심이 많이 호전된 것이라고 할 만하긴 했다.
한편, 사대부들 중에는 다른 이유로 고려에 대한 감정 변화를 가진 것도 있었는데 그 들은 대개 주자의 제자들과 그 학파들이었다.
#작가의 말
*20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려 시대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었습니다. 요새 들어선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가 최초가 아닌가 하는 말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