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505
505화
17장 등하불명(燈下不明)
개경.
“금번 사행에 남조 황제에게 회맹을 청하였고, 송 황제는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남조에서는 여러 제후들을 부르기는 하겠으나, 《춘추(春秋)》의 전례와 황상의 지위를 상고하면 해동에서만큼은 당대 패자(霸者)이신 아조에서 해동의 제후들을 소집해야 할 것이옵니다.”
“아태자의 말이 옳다. 남조가 해동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해동은 아조의 관할인데, 남조의 도움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예부에서는 회맹에 참석시킬 제후들을 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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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내가 아무리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 고려에서 내 위치는 일인지하(一人之下) 한 사람의 아래다. 그 한 사람은 바로 고려왕이다. 그리고 패자, 동평왕을 비롯한 남송에서 인정한 모든 고려&해동의 최고 지위들도 아버지인 고려왕에게 있다.
즉, 해동의 제후들을 부를 때 명의(名義)나 칙서(勅書)는 내 소관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이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조서(詔書)를 내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북방의 일에 대해서는 내게 일임했지만 이번 경우만큼은 고려의 군주인 아버지의 이름으로 소환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다….
다만 흑고대를 비롯한 외번에 해당하는 동북삼번에 대해선 내 서찰도 함께 동봉되는 식으로 간다.
요약하면 제후들을 부르는 일에는 당분간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대로 서경으로 가도 되지만 할 일이 있어서 안 가고 있는데, 그 일을 하기 위해서도 조금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다 보니 지금은 진짜 할 일이 없다. 그러니 이 빈 시간에 일들을 시켜보려고 한다.
“여봐라. 서적점(書籍店)에서 아무 녹사(錄事)를 한 명 데려오너라.”
서적점(書籍店)은 고려 문종 때 세워진 서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이고, 녹사는 관청에서 행정실무를 맡은 서리(書吏)에 해당하는 7~8품 관직이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이번에 남조에 가면서 많은 서책들을 얻어왔다. 이중 유용한 것을 인쇄하려고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서적점은 서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보니 여기서 종종 인쇄하는 일도 지시하는데, 서적점의 주 일이 인쇄는 아니다. 인쇄를 주일로 하는 곳은 서적포(書籍鋪)로 고려 숙종 시기 국자감(國子監)에 두었던 설치한 출판부가 따로 있다.
서적포가 설치된 계기가 숙종 시기 사학(私學)의 발전으로 견제하고 관학(官學)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라서 사학을 억누르고 관학을 높이는 당대에는 당연히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을 인쇄하는 업무도 보통 여기서 한다. 정확히 말하면 서적포는 비서성(秘書省)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비서성에서 지시해야 하지만 내가 서적점의 녹사를 찾은 것은 단순 인쇄를 위해서가 아니다.
“인쇄라면 얼마나 인쇄하는 것입니까?”
“한 200부 정도로, 이 중 3부 정도는 수서원(修書院)을 비롯한 제도 서고에 보관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전에 확인을 하려고 한다.”
그렇다. 확인이다. 남조에서 농서나 약방, 유서(백과사전)를 들고 온 것은 좋다. 하지만 이 중에는 중국의 풍토에만 맞고, 한반도에서는 다른 것들도 있을 수 있다. 이를 확인하고 맞는 것만 따로 발췌하거나 그리고 한글로 번역한 뒤 인쇄해야 하지 않겠는가?
‘암, 기껏 해동문자라며 한글을 만들었는데 조정에서 배부하는 것은 한자로 지속한다? 전파할 의도가 없는 거지. 그리고 내가 정안에게 중국과 고려의 약재의 차이점에 따라, 고려의 실정에 맞춘 독자적인 처방법을 마련하게 하기 위한 의약서를 제작하게 했는데 도와주지 못할망정 이쪽에선 그대로 해서는 쓰나….’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건지 녹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야 이 시기 모든 경서와 유서, 농서들을 읽고 차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기존 정보와 비교 대비한다는 뜻이고, 그 정보가 적힌 서책들을 일일이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말로만 들어도 번거롭고 피곤할 일을 내가 맡기겠다고 한 것이니 벌써부터 피로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럼 그런 중차대한 일을 왜 어명이 떨어지기 전에 내가 와서 알려줬는가 하면….
“선비들과 글을 읽을 줄 아는 노비들도 미리 수배해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지.”
무릇 군대에서 사단장이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것보다 미리 언질을 주고 오는 게 그나마 준비하기 편하지 않겠는가? 그런 거다.
* * *
“전하! 어, 어찌하여 기별도 없이 이런 곳에….”
“하하하. 이런 곳이 아니라니? 내가 못 올 것이라도 왔는가? 국자감은 나라의 교육 기관이오. 그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나라의 동량들이 아닌가. 이런 곳에 태자인 내가 오면 누가 될 정도로 불명예스러운 곳인가?”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태자인 내가 국자감에 모습을 드러내자, 학생 교육과 학사 운영을 보좌한 학정(學正 정9품), 학록(學錄 정9품), 학유(學諭), 직학(直學)까지 우르르 나와선 우왕좌왕하며 나를 맞이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저들 입장에선 사단장이 기별도 없이 갑자기 대대에 방문한 격이니, 당황할 만하긴 하다.
“기별을 줄 정도로 대단한 일로 온 것이 아니고 좨주(祭酒 국자감 좨주)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바쁘지 않게 잠깐 둘러보고 가려고 한 것이다.”
“그, 그렇사옵니까. 하면 소신들이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아니다. 그럼 우선 서적포에 들렀다가 가겠네.”
내 말에 저들의 안색이 다소 밝아졌다. 내가 서적포에 먼저 들르겠다는 말은 저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땡땡이치거나 몸 단장하거나 게으름 피워서 진짜로 못 볼 꼴 보일 상황이라 시간이 필요하다면 내가 본관에 안 가고 서적포에 가는 동안 처리하라고 유예의 시간을 준 것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서적포에 가는 것이야말로 내가 여기 온 주목적이다. 학생 시절 교과서에서 고려 시대에 수업 배울 때 고려의 뛰어난 기술을 설명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금속활자 및 인쇄술이다. 그리고 그 인쇄술이 당대 어느 정도인지 한번 인쇄소에 가서 보고 싶다.
“전하. 서적포는 전하께서 가실 곳이 못 됩니다.”
서적포는 비서성에서 관찰하는 곳이고, 비서성이 나라에서 관장한다곤 하나, 국자감 내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오늘날로 치면 대학 내에 있는 인쇄소 비슷한데 국무총리가 거기로 직접 가려는 격이다.
‘이 반응도 오랜만인데.’
서경에선 하도 몸을 드러내고 여기저기 다녀서 공장 같은 곳에 모습을 드러내도 의례적으로 말하는 것 외에는 진심으로 제지하는 이는 적고 호들갑을 떠는 이들도 적었는데, 이 정도로 당황하는 반응은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다.
“아니다. 나라에 많은 서적들이 저곳에서 인쇄되지 않느냐? 한 번쯤은 그곳의 실태를 견식해 보고 싶구나.”
내가 갈 의지를 확실히 표명하자. 그들도 한발 물러났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일 테니 말이다.
“…예. 하면 소인이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누가 국자감 좨주에게 보고를 할지 누가 안내를 하며 나를 잡을지 의견을 나눈 것 같은데, 재주도 참 용 타. 용해!
그리고 서적포에 가서 내가 본 것은 교과서대로 뛰어난 고려 인쇄술에 대한 감탄이 튀어나올 만한 광경—이 아니라 탄식이었다.
“허어. 또 떨어졌구나. 저래서야 한두 번 하고 나면 매번 재정리를 해야 하니 늦을 따름이 아니더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아무리 밀랍으로 고정하더라도 몇 번 쓰고 나면 헐거워지며 위치가 변하니 실상 인쇄를 하는 것은 2, 3번이 고작이고 잘하더라도 4, 5번 정도입니다.”
내가 실수했다. 여긴 고려 시대다. 그리고 고려 시대 과학의 우수성으로 인쇄술이 거론되는 것은 최고의 금속활자 기록과 유물이 남아 있는 것으로 인쇄술의 역사라는 부분이지, 그 정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 때문에 인쇄술 자체만 따지자면 발전이 없지 않은 이상 후대에 속하는 조선 시대보다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나도 몰랐는데 이 시기 활자는 그냥 판에다가 밀랍으로 글자를 붙인 것뿐이라 몇 번 인쇄하고 나면 고정된 밀랍의 일부가 헐거워져서 글자 위치가 삐뚤어지기 일쑤란다. 이래서야 인쇄 속도도 느리고 글자도 이상하게 될 뿐이다….
쯧.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런 것을 몰랐다니,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이 이건 나도 해결할 방도를 안다.
“…이후. 조판용 판과 활자는 동으로 만들되 평평하고 바르게, 그리고 튼튼하게 만들되 활자를 고정시키는 데 밀랍을 쓰지 말고 글자 사이에 대나무로 끼워 빈 데를 메우거라. 하면 밀랍의 비용도 아끼고 글의 정교함과 인쇄의 능률도 많이 오를 것이다.”
“예? 그, 그것이 무슨….”
“말로만 해서는 쉽게 전달이 안 되겠구나. 여봐라!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들고 오너라. 내가 친히 그려주도록 하겠다.”
“저, 전하. 구태여 친히 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화공이나 장인들을 부르겠사옵니다.”
안내하던 직학이 당황하며 말하지만 말렸다. 내가 더 잘 아는데 남한테 맡겨서 뭐하게?
“아니다. 내가 아니, 내가 그리는 것이 빠를 것이다. 단지 과인이 그려도 이해가 안 되거나 흠이 있다면 그것을 도공이나 장인이 다시 수정하는 것은 허용하겠노라.”
내가 말한 것은 조선 시대에 나온 금속활자다. 실제 사람들이 잘 아는 금속활자는 글자 사이에 나무 마디가 끼워져 있는 식이다. 대략적인 방법과 구조는 알고 있다. 딱히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라서 대략적으로 말하면 알아서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목판보다는 동판을 더 쓰도록 하자.
“한번 장인들에게 말해 제작시켜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려준 도해(圖解)를 본 서적포 직원이 유용성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시험적으로 활자 10개를 이어 만들어보도록 하라.”
“그리하겠나이다.”
내가 고려에서 산 지가 이제 10년이 넘어가는데, 금속활자의 실태와 개선해야 이제서야 알다니, 요 수년간 책을 인쇄한다고 들었던 밀랍 비용만 해도 얼만가?
‘그 돈들로 차라리 성을 보수하거나 군사 훈련에 쓰거나 백성들의 농기구를 만드는 데 썼다면….’
이건 진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밖에 못 하겠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당연함의 폐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활자들만 판에 밀랍으로 고정시키고 그렇게 인쇄를 한두 번 하고 나면 헐거워져 다시 밀랍으로 고정해야 한다는 일은 현대 한국은 물론이고, 조선 시대만 가도 불편하고 번거롭다고 느낄 문제를 이 시대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일 뿐인 것이다. 오히려 고작 그 정도의 번거로움만 감수하면 한 번에 인쇄를 할 수 있다고 여기니 불편함을 모르는 것이다.
불편함이 당연하니 포기하거나 관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막말로 탱크나 기관총만 있으면 몽골 따윈 문제없지만, 그렇다고 탱크랑 기관총을 만들라고 닦달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번 금속활자 같은 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이런 당연한 불편함의 폐해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해결법을 아는 이가 알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인데…. 역시 궁 내에 앉아만 있으면 모르겠다. 밖으로 돌아다니며 보다가 지금같이 당연한 불편함의 폐해가 없나 확인해 봐야겠다.
* * *
며칠 후.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그것도 대소신료들이 모인 곳에 나를 불러 칭찬하였다.
“경들은 들으라. 오늘 국자감에서 보고가 올라오니, 요전에 태자가 서적포에 들러 활자의 문제를 보더니, 개선할 곳이 있다 하며, 방안을 내놓았다. 이를 그대로 제작하고 사용하니 금속활자가 바르고 정갈하며, 밀랍의 비용도 크게 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금속활자란 한두 번 쓰고 나면 밀랍이 헐거워져 다시 조정해야 해서 번거롭고 밀랍 비용도 많이 드는데, 작금 태자의 도움으로 이 일이 해결되었으니 장구(長久 길고 오래)적으로 나라의 큰 이익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윤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금속활자 주조는 무사히 성공했다. 물론 최근 공사다망한 아버지가 고작 금속활자 일을 칭찬하기 위해 대소신료들을 부르고 나를 부른 것이 아니고 나도 그걸로 온 게 아니다. 금속활자는 어디까지나 겸사겸사 말한 것이고 본론은 따로 있다.
“삼가 역대의 강무 제도(講武制度)를 상고하옵건대, 주(周)나라 시대에는 봄과 여름에는 군막(軍幕)에서 군병을 훈련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군사를 크게 사열(査閱)했다 하니, 사철 언제나 교련하므로 그 익히는 것이 정(精)하였고, 안팎으로 다 가르치므로 그 쓰기가 이(利)로왔으니, 이것이 주나라가 나라 지키는 도리를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한(西漢) 때에는 군왕이 융로(戎輅)에 올라서 쇠뇌[弩]를 잡고 비단을 가지고 무관(武官)에게 주어서 손오(孫吳)의 법을 익히고, 싸우고 진(陣) 치는 제도를 익혔는데, 오영(五營)의 군사들을 모아서 팔진법(八陣法)을 시켰으니, 이것이 경사(京師)에서 강무(講武)하는 것인데 승법(乘法)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중략)…
부디 강무(講武)를 정해 매년 정기적으로 군사의 정예함을 높이시옵소서!”
시작의 운을 띄운 것은 당연히 나의 지낭(智囊 지혜 주머니) 중 하나인 최종준이다. 요약하면 강무를 시행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아버지도 이를 고심하는 척하다가 의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든다느니, 번거롭다느니 거절 몇 번 하고는 의견을 바꿔 수락했다.
”맞다. 구고려 때에는 평원왕이 친히 사냥 대회를 열고 여기서 온달장군을 사위로 소개했으니 이 또한 아조의 강무라고 할 수 있다. 구고려를 계승하는 아조가 강무를 정기적으로 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어디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로다. 하나, 이러한 대사를 단번에 결정하는 것은 너무나 섣부른바, 우선적으로 시험해야 마땅할 것이로다.
…(중략)…
예로부터 활쏘기와 말달리기는 삼한의 능사(能事)이어서 오늘날 아태자(我太子)에 이르러선 논할 것도 없이 이미 능(能)하다 못해 신궁(神弓)에 달하였으니. 이번 강무(講武)는 태자가 대행하고 짐은 친람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국가 규모의 군사 훈련의 시작이다.
#작가의 말
*고려 시대~조선 시대 초의 금속활자는 판에다가 활자본을 밀랍을 본드인 양 이용하는 식인데, 밀랍이 현대의 접착제만큼 성능이 있을 리 없고, 당연히 몇 번 쓰고 나면 흔들거려서 매번 다시 고정시켜야 했다고 합니다. 이 문제는 세종대왕 시기에 작중에서처럼 대나무 마디를 끼워 넣는 것으로 고정시켜 해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