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510
510화
19장 호족(豪族)(3)
목(牧)의 지위도 결코 낮은 것은 아니지만, 서울(京)의 지위보다 높지는 않다. 그리고 서울에는 그만한 병력이 주둔 된다.
물론 서경이나 개경의 병력처럼 많다는 말은 아니고, 애초에 기존의 경우 동경이든 남경이든 해당 도시의 병력은 개경의 경군과 달리 어디까지나 주현군으로 간주된다.
그래도 서울이란 지위답게 다른 주현들보다는 보통 주둔 병력이 많은데, 당연히 요전에 남경으로 승격된 전주 또한 기존보다는 늘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다. 이 늘어난 병력은 어디서 충당되겠는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보통 이런 경우 장부상으로만 늘리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최근 왕태자인 왕검의 주도하에 나라 전체가 장부상의 병력을 실 병력으로 만드는 노선으로 가고 있는데, 일반적인 주현이 아니라 남방의 수도인 남경 병력부터 채우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다시 문제로 돌아가서 그래서 이 남경으로 승격되면서 늘어난 병사들은 어떻게 만드는가? 에 대한 답인데 이 경우 해당 지역과 근방 지역에서 차출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 방식으로 남경은 해결하긴 했다. 문제는….
“우선 일품군(一品軍)과 이, 삼품군도 군사훈련에 참가시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남경의 수를 채우기 위해선 일품군은 물론, 이, 삼품군들도 일품군으로 배속해야 합니다.
이들 모두 주현군인 만큼, 당장은 그들로 훈련을 받게 하고, 차후 보승(保勝)과 정용(精勇)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지침에서도 이, 삼품군은 몰라도 일품군들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니 더욱 이치에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품군은 지방군인 주현군의 한 병종이지만, 전투나 방수가 아니라 공역(工役)을 위해 편성된 노동부대였는데 1년을 기간으로 하여 가을에 교체, 순환하여 역사(役事)에 동원되었으므로 추역군(秋役軍)이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일품과 이, 삼품군의 차이는 일품은 중앙(지방관)에서 직접 파악하고 통제하지만, 이, 삼품군은 해당 주현에서 파악하고 통제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호족들이 말한 대로 이, 삼품군은 몰라도 일품군은 이미 군사 훈련을 받으라고 나라에서 지시를 내리긴 했는데, 이건 중앙에서 통제하는 병력은 중앙에서 보낸 병사나 장군이 수월하게 지휘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왕검은 나라의 전체적인 전력 강화를 꿈꾸면서 이, 삼품군은 왜 제외했냐? 고 하면, 한 번에 전부 바꾸는 게 쉽지 않다는 것과 역군도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다.
더군다나 훈련을 받는다는 일품군도 어디까지나 보조지. 아직은 역군으로서도 다소 다루긴 한다는 점이다. 다만 이, 삼품군이 있다면 그들에게 맡기거나 그들로 부족할 때 거드는 정도지.
쉽게 말해, 현 주현군에서 정용, 보승은 지방군의 주력으로, 병농일치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직업군인에 가까운 병종이고, 이, 삼품군은 그들이 군사훈련에보다 집중할 수 있게 하는 병종이다.
그리고 당대 일품군은 정용, 보승과 같이 전투가 목적인 병종으로 변해가는 과도기로서 현재는 그 사이에 있는 보충병과 보조병의 위치인 것이다.
여튼 남경에 병력을 보낼 전라도의 호족들은 머리를 맞대고 내린 결론은 이른바 노동부대, 그것도 주현에서 호장들이 통제하는 노동부대를 남경에 편입시키고 일부는 전투부대로 상용하겠다는 말이었다.
여기에는 그들의 사병들도 제법 포함되어 있으니 그들의 결론이 어떻든 장부상으로만 놔둔다거나 차출을 미루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현재 고려가 지방에도 중앙의 통제와 힘이 먹히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면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이 조치에 순순히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따르면서도 제 나름 이익을 얻기 위해 머리를 굴렸으니, 그것이 바로 이번 ‘주현일품군 별장들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외, 내란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병사들은 늘어나 공역에 많이 들어갑니다. 하물며, 향교도 세워져 나가는 비용이 많으니 이를 메꾸기 위해서라도 전답을 경작하는 데 쓰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내는 조세가 늘어나면, 그만큼 나라에도 이익이 아니겠소? 그리고 이렇게 만든 전답의 일부는 아예 나라에 공전(公田), 둔전(屯田)으로 바칩시다.”
“그거 좋군요. 병사들이 늘었으니 그만큼 부담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둔전은 큰 도움이 되겠지요. 이게 모두 나라에 대한 충정이요. 태자 전하께서 내린 은혜에 대한 보답이 아니겠소.”
“하하하. 그렇지요. 그렇고 말구요.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앙법에 실패하여 쫄딱 망한 농민들을 가노(家奴)로 받거나 그 전답을 수취한 호족들은 이앙법의 효능을 알고는 있었고, 그런 전답에 가노들만으로 채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검은 그것을 성사했으나 그건 그가 왕태자라는 신분에 더해, 북방 호족들을 확실히 휘어잡은 상황이라서 가능한 것이지.
그저 호족의 이름만 있는 호족들로는 전답이 넓을수록 가뭄이 제대로 터지면 가노만으로 하긴 부족해 사병들까지 부려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자신들의 사병까지 내놓아야 하는데, 대거 있는 지방군의 지휘권을 얻게 되자, 그들은 이걸 기회 삼아 주현일품군별장들에게 지휘하는 군사들을 통해 전답을 경작시킨 것이다.
별장들의 것은 물론 다른 지방의 호족들의 전답도 해주며 저마다 말을 맞추었고, 그들이 말한 대로 늘어난 전답의 일부는 둔전으로 바칠 준비까지 하였다.
호족들은 저 자신들이 보기엔 자신들이 다소 유도리 있게 군사를 굴리되 그걸 부정축재를 한 것이 아니니, 나라에도 큰 이바지 했노라고 자부했다.
물론 그 자부심 섞인 변명이 나라에 정말로 먹힐지는 별개였지만….
* * *
“소신들은 그저 나라를 위해 둔전을 경작하고 조세를 바칠 수 있게 하고자….”
“그렇사옵니다! 이 일도 어디까지나 갑자기 지출이 늘고 격이 오른 남경을 신속하고 안정하게 하고자 그때까지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데려온 남경기(南京畿 남경 권역)의 호장들은 저마다 당황하며 진심 어린 변명을 시작한다. 사실 저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 호장들이 별장이란 지위로 지방군을 다룬다는 것은 갑작스럽게 합쳐지고 차출되어 제 병력도 늘어나 노동부대 성격도 크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병사들이라 지시대로 따른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데 무얼 믿고 넘어가겠는가? 거기다 이게 악습화 되어 계속 일어난다는 경우도 안 일어난다고 장담 못 한다.
‘저들이 진짜 둔전을 바치겠으니 넘어간다고 해도 문제다. 이걸 허용해 주면 조선 시대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 같은 폐단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냐고!’
방군수포제는 농민이 국가에 군포를 납부하고 군역을 면제받는 제도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처음부터 공식 제도는 아니었는데, 하도 돈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군역을 서게 하는 자를 만드는 대립군을 보내거나 아니면 수령에 납부하여 면제 받는 일이 성행하다 보니, 조선 중종 시기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라고 하여 공식으로 인정받게 된 제도다.
의의 자체는 간략히 설명하자면 군포를 받으면서 늘어난 재정으로 보다 나라를 편히 만들자는 것이었지만 이런 것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당연히 중간에서 착복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 결과 실제 국가 재정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폐단만 잔뜩 만들어서 조선 중기 니탕개의 난, 임진왜란 등에도 그 문제점을 보여주는 등,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번 둔전 문제도 그렇다. 둔전 자체를 바친다고 하면 듣기 좋겠지만 애초에 그 둔전 만드는 병사들은 그러라고 있는 병사들이 아니다.
진법과 군사훈련을 하라고 지시한 대상들인데 그걸 무단으로 사용해 놓고 둔전을 바칠 테니 용서해 달라는 거다.
심지어 이 둔전도 지방의 힘과 권위가 강력한 고려 시대 배경을 감안하면 둔전의 이익이 호족들에게 빠질 가능성도 크다.
“닥쳐라! 네놈들이 감히 사사로이 관군을 움직여 제 전답들을 경작시키킨 것도 죄거늘, 그걸 나라의 충정 운운한단 말이더냐! 더구나 네놈들이 나라의 조세를 늘리기 위해서라고 지껄이는 것도 용서할 수 없다.
너희가 정녕 오직 나라의 재정에 보탬을 하고자 한 것이 목적이었다면 어째서 너희 전답만을 경작한 것이냐!”
향리. 그러니까 호족들의 토지는 ‘외역전(外役田)’이라고 하며 직역하는 대가로 토지를 내려준다고 하여 ‘직전(職田)’이라고도 부르지만 실은 기존부터 소유한 호족들의 토지 수조권(收租權)을 인정해 준 것이다.
그리고 수조권(收租權)은 대상(주로 토지)으로부터 조세를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데, 당연히 수조권이 있는 토지에서 얻는 조세는 없는 곳에 비해 떨어진다.
이것만 해도 저들이 순수하게 나라의 재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정은 겸사겸사라는 말이다.
뭐, 제 딴에는 ‘자신들 이익을 눈감아주면 그만큼 세도 바치겠습니다.’일지도 모르고 진짜 기본적인 사고관의 차이로 양인들에겐 그냥 해주는 건 상하법도가 무너질 우려와 더불어 세금을 제대로 안 낼 수 있으니 관리가 편한 자신들의 전답을 키워 낸다는 충정일 가능성도 소립자 수준으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걸 용납해 줄 수는 없다.
“저, 전하. 소인들은….”
“그것만 해도 경을 칠 일이거늘, 용서를 빌기는커녕 이제는 대놓고 둔전을 바치겠으나 죄를 면해달라고, 지금 조정을 상대로 거래라도 하자는 것이더냐! 이를 보니 너희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구나. 내가 이것을 놔둔다면 천하에 폐단을 남기는 것인데 이것을 어찌 좌시하란 말인가!”
“전하! 전하! 용서해 주시옵소서!”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옵소서!! 전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저들의 말이 어떻든 간에 이번 일은 내가 추진한 정책들의 빈틈을 파고들어 저지른 짓들이라는 것이고 나아가 여기가 ‘전라도’인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거듭 충격을 줬다.
‘본의는 아니지만 내가 한 일들의 반향에 저들이 이런 짓거리를 할 틈을 줬다는 것도 충격이다. 그러나 그보다 여기가 전라도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전라도가 어디인가?
그나마 이앙법이 고려말부터 아름아름 계속 시행이 가능했다는 지역 중 한 곳이잖아? 그런데 여기서도 이앙법의 실패로 호족들에게 들어가, 호족들이 주현군으로 전답을 경작시킬 정도로 늘어난 전답이 많다고?’
전라도도 이렇다면 양광도나 경상도는 또 얼마나 심한 상황이란 말인가?
‘아니다. 경상도는 아니겠지.’
경상도가 전라도와 같이 이앙법이 그나마 되는 지역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거듭된 동경의 난과 무신정권 타파로 경상도에는 전답이 제법 비어 있고 왕실어료지와 김방경의 가문 및 내 추종 세력도 나름 많기 때문이다. 기존에 내린 지침이 먹힐 것이다.
“저들을 모두 구금하라. 이 일은 내가 황상 폐하께 직접 진달(進達)할 것이다.”
“예!”
전라도 전체, 어쩌면 나라 전체가 연관된 일인 만큼 이번 사건은 단순히 전라도 호족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내 예상보다 훨씬 심하다는 것을 안 이상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고, 바쁜 상황인 만큼 더욱 신속하고 집중해서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대왕인 아버지랑 대화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