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512
512화
20장 남부 전선은 무(無)(2)
무서울 정도로 중앙집권을 추구하며 아전들을 부려먹던 조선 시대에서조차 지방 아전들의 재산을 대놓고 갈취하지는 않았다.
월급을 주지 않고 무보수로 부리긴 해도, 그건 그들이 호족이라 이미 전답 등 재산이 많다는 것이고, 조정의 지방관보다 위로는 인정 안 해도 현지에서의 지위는 나름 인정하고, 아전의 재산을 대놓고 칼, 창으로 협박하여 내놓으라곤 하지 않았다.
하물며 조선 시대보다 지방의 힘이 더 강력하고, 보다 호족들이 조정의 신하로 취급받는 고려 시대에선, 초기에 비해 많이 약화 되었다고 해도 호족들에게 이런 억지스러운 요구를 할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근래 기인제도로 잡은 호족 자제들의 취급이 전기에 비해 많이 박해져 있다고 해도 고려 시대엔 지방관이 지방에 부임 왔다가 뭔가 일을 하나라도 하려면 호장들의 도움이 필수라고 투덜댈 정도로 권력이 강하고, 해당 군현의 병사들을 다루는 것이 현지 창정과 병정 지위에 있는 현지 호족들이다.
섣불리 자극했다간 호족들이 병사들을 데리고 난을 일으킬 우려가 크다. 하물며, 전라도 같은 옛 백제계 호족들을 자극했다간 제2, 제3의 이연년 형제의 난, 어쩌면 제2의 견훤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니….
“정말 이러면 되겠느냐?”
아버지의 이런 반문도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문제없다고 아버지를 위로했다.
“문제없사옵니다. 이곳이 남경이고, 저들이 전라도인 이상, 저들은 결코 황실에 역심은커녕, 역심으로 보일 만한 것도 없음을 스스로 증명할 수 없사옵니다.”
확실히 평상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만큼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유는 말 그대로다. 전라도의 호족들의 반역을 걱정할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혹 반란이 일어나도 위협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면 가장 문제가 되는 무력에서부터 이쪽이 월등하게 앞선다.
지금 전라도에 있는 왕과 나의 지시에 따르는 병력이 ‘강무’를 이유로 5만 이상이 집결되어 있다. 5만이면 저들이 다시금 백제를 부흥시켜도 황산벌 전투는 물론이고, (규모는 차이 나지만) 일리천 전투도 다시 재현하여 다시금 백제의 멸망을 경험시켜 줄 수 있다.
저들이 수비전을 고수하려고 하더라도, 예전에 이연년의 난에서도 말했다시피 전라도는 산맥을 넘고 들어오면 수비하기 힘든 지역이다. 그리고 우리 군은 이미 전라도 내부에 들어왔다.
곡창지대라고 하더라도 전라도 전부가 배반할 리도 없다. 오히려 전라도 밖에서 근왕군들이나 관군들이 올 것이고 식량도 북방과 양광도, 경상도에서 올 것이다.
예전이라면 수적들이 있어서 호족들 중 결탁할지 모르지만, 전라도의 수적들은 김방경에 의해 근절되다시피 한 상태다. 오히려 전문 수군이 (현재 제법 많은 수가 일본으로 가긴 했으나) 조정에 있다. 장기전은 이쪽이 확고한 승리로 가는 길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지역은 현재 이연년 형제의 난이고, 견훤 무덤 관리 등으로 내 눈치를 볼 것이 많다. 그런데도 조정과 나는 백제계를 많이 배려해 주었다는 것을 저들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라에서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는데 백성들을 수탈했다는 뉘앙스인 상황에서 수탈한 재산을 돌려줄 수 없다고 반역하면 전라도의 반감은 ‘동경의 난’ 이후 경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경주야 일단은 후삼국 시기에도 오랜 기간 동안 대중들에겐 본조(本朝)에 속하고, 사람에 따라선 지금도 전조(前朝)로도 취급해 주는 신라의 수도였기에 가능한 거고, 그마저도 지금은 ‘경’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백제계, 심지어 적성국이던 후백제계 지역인 전라도가 그런다? 진짜 반역향으로 떨어져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지난번부터 온조백제랑 견훤백제로 은근슬쩍 차이를 두는 식인데, 지금 백제 부흥 운운하면 어느 쪽을 말하는지 확립하고 이후 형편을 위해 내분도 걱정도 해야 해서 얼마 가지도 않을 거다. 이놈아.’
이 부채의식에 더해진 이번 명분 자체도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거리낄 것 없는 큰 이유다.
위로는 불쌍하게 가노가 된 이들을 나누라고 하는데, 호족들이 그거 못 주겠다고 반란한다?
전쟁이 일어날 시 과연 사병들이나 현지 백성들이 누구를 따를까? 볼만할 것이다. 병사의 수, 질, 부채의식, 뒷감당에 더해 명분까지 불리한데도 저들이 반란을 일으키겠는가?
100보 양보해서 그럼에도 못 주겠다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좋다.
‘그때는 실전 경험이 부족한 중앙, 남방군에 실전을 쌓을 기회가 얻었지. 저들 모조리 도륙 내고 뒤는 후백제계보다 (온조)백제계를 중심으로 다루는 것으로 해야지.’
* * *
과연 예상대로 본래라면 호족들이 단합하거나 혹은 산발적으로라도 일어날 무장봉기는 없었다.
그리고 이 말은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고 가노가 된 농민들은 일종에 재수 맞은 것처럼 태워진 문적과 돌려받은 땅문서에 기뻐하며 호족들의 집에서 뛰쳐나오니, 마치 광종대왕 시기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에 면천된 호족들의 노비들 같이 기뻐하였다.
“면천만 된 게 아니라 전답까지 모두 돌려받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태자 전하 천세! 황제 폐하 만세!”
전라도 여기저기에서 면천된 이들이 기뻐하며 왕과 태자의 선군정치를 칭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그들을 보는 호족들과 전 주인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아니꼬운 상태였으나, 지금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반역하기엔 대왕의 대군이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소란을 만들 수 없었다.
물론,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만 아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도 어디까지나 권유니까 전답과 노비들을 포기 못 한다며, 문적을 태우지 않고 전답도 돌려주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지금 전라도에는 있는 왕과 태자는 2차 여요 전쟁 시절 몽진하다가 들른 현종이 아니다. 하지만 광종도 아니기에 왕과 태자는 그런 이들을 대비하여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누, 누구냐? 네놈들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나는 이번 강무를 위해 사냥 장소를 알아보러 나온 경군의 별장일세. 어느 곳이 좋은가 알아보러 여기까지 왔다가 잠깐 목이나 축이자고 여기에 들렀네. 그런데 이 근방에 계사년(1233년) 도적놈들에게도 빌붙은 모리배 놈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
전 지역 각지를 말 타고 돌아다니는 조정의 지휘를 받는 장교들이 문적을 태우고 전답을 돌려줬는지 안 돌려줬는지 확인하며, 안 돌려준 이들에게 계사년의 모리배들 소문을 언급하니 그들은 뒷골과 띵 하는 느낌과 함께 등골이 오싹하여 문적을 찾기 시작했다.
저들이 말하는 계사년의 도적이란 반적 이연년의 일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 저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한다면 이후 죽더라도 그 호족의 죽음은 자연사라고 불러야 한다.
“어험. 그런 모리배가 어디 있겠습니까? 공무 중이시니 오래 계시라는 말은 못 하겠고 시원한 감주(甘酒)나 한 잔 내올 테니 그거나 드시고 가시지요. 본인은 지금 지난 흉작으로 가노로 들어온 이들이 다시 양인으로 만들어 나라에 조세를 내도록 설득하고자 문적 불태울 준비로 부산합니다.”
“어허.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지. 허허허.”
“하하하.”
그들은 모리배들은 없다고 사실대로 고하면 자신은 모리배와는 천리만리 떨어진 백성들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스러운 호족임을 증명하였다.
* * *
이렇게 조선 시대에서조차 감히 하지 못할 광대한 면천과 환전(還田)을 하며, 전라도의 양인들의 수를 복구하고,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한 우리 부자는 지금 역설적이게도 전라도의 문제를 수습하는 이야기를 남경에서 독대한 채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너의 말대로 전라도의 토호들은 원(元 원래) 농민들을 모두 면천시키고 있으니, 이 일은 가히 광종 대왕께서 노비안검법을 실시한 것과 맞먹는 치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태자도 그 법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것인바, 태자는 그에 대해선 어찌할 것이더냐?”
교과서에서 광종의 치세와 개혁으로 과거제, 연호와 더불어 잘 나오는 노비안검법은 교과서에서만 보면 후삼국 시대에 져서 노비가 된 이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동시에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광종의 개혁이라고 설명된다.
실제 전자는 명분으로, 후자는 목적으로 광종이 추진한 개혁이긴 하나, 정작 그 법이 광종 사후 성종이 즉위하면서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이 시행되며 취소된 것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종이 노비환천법을 채택한 것에는 호족들과의 대립을 피한 목적도 있다는 것을 고려왕은 상기시키고자 언급한 것이고, 왕검도 이를 잘 알고 동의하였다.
“아바마마의 말씀대로입니다. 이번에 전라도가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번에 강무를 위해 대군이 전라도에 주둔한 것과 여태까지의 일들이 겹쳐 생긴 것이지. 평시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대로 순순히 물러난다면 이번 같은 일은 다시 번복될 우려가 있습니다. 나아가, 전국에서도 이와 같은, 군을 움직이지는 않더라도, 농사에 실패한 농민들을 가노로 들이고 전답을 착복하는 이들이 늘어날 수 있으니 이곳 전라도에서 이번 별장의 사건을 마무리할 때 농민들의 일도 함께 해결해야 할 것이옵니다.”
“너의 말이 옳다. 하지만 그런 방도가 있겠느냐?”
“소자에게 사소한 방책들이 있습니다. 아바마마께선 부디 소자의 방책을 듣고 이중 어디까지 괜찮은지 솔직히 하답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왕검은 자신이 궁리한 방도들을 모조리 늘어놓았는데 그것들을 다 들은 고려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성을 흘렸다.
“허허허. 아태자의 존재가 종묘사직과 억조창생들에게 있어서도 크나큰 흥복이로다.”
“하오시면….”
“내 대신들을 불러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하오면, 소자는 전라도의 호족들을 불러 그들을 위로하겠나이다.”
“신상필벌은 확실히 하고, 벌을 받은 이들을 달래, 정도(正道)를 권하는 것도 옳다. 그리하도록 하라.”
* * *
내가 아버지께 권한 것은 별것 아니다. 조운선의 해로 및 도로의 유지, 그리고 각 지역에 보의 설치를 지방에서 권장하자는 것이었다.
권장으로 무엇이 되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괜스레 전근대 내내 교육과 사상을 중요시한 게 아니다. 주변 모두가 그렇게 하길 권장하는 분위기가 되면 대개 진짜 그렇게 한다.
그리고 전근대는 물론 현대에서도 이렇게 만들어진 분위기와 상황에서 생긴 관례나 불문율 등은 법에도 없고 오랫동안 꿋꿋이 하게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에는 악명 높은 성균관에 입학하는 입학생이 치루는 신방례(新榜禮)와 신입 관료들이 치루는 면신례(免新禮)가 있다.
21세기인 현대에도 일본에서는 굳이 도장을 대신 찍는 기계를 만들고, 그걸 일부러 지위에 따라 비스듬하게 찍는 식으로 사용하는 일부 회사들이라거나, 2020년대에 이미 생산이 중단된 플로피디스크로 공문서 만드는 데 사용하는 일본 어느 지방 공기관 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두 어딜 봐도 번잡하고 필요 없는 행위인데도 그저 관례라는 이유로 멈추지 못하고 지속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환으로 이미 남경에 있는 호장들은 물론이고, 각 주현에서 향리들의 일부도 남경으로 소환시켜 만남의 장소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