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74
74화. 68장 견훤 대왕
“공주의 속현으로 가겠다고 하셨사옵니까?”
“그렇다. 남벌을 끝냈으니 성상의 지시에 따라 위무를 계속 할 것이다.”
“하오나….”
김방경은 뒷말을 흐렸으나 뭐라고 말할지는 뻔하다. 이 규모로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내솔부만 해도 200명이 넘는다. 그런데 지금 2천 명이 넘는다. 2천 명으로 나라를 돌며 위무하는 데 드는 것은 경비가 장난 아니다.
전주목이나 나주같은 크고 번성한 곳이면 그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대접을 할 수 있겠으나 속현 같은 곳으로 가면 마을에 부담이 크다.
그리고 그들도 이제 내 성격상 또 군량으로 자체 급식하거나 혹은 받아도 계란국 정도로 끝을 내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려하는 것은 아나 그래도 가야 한다.”
사실 이런 이유로 이연년을 처리한 이후에는 되도록 작은 곳은 안들르고 큰 곳만 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주의 속현만은 빠질 수가 없었다.
‘이연년의 난도 진압했는데 최소한 견훤 무덤에는 한번 가봐야지!’
세자인 내가 후백제의 창업군주인 견훤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알려지면 최소한 고려가 후백제를 경시하거나 견훤대왕을 홀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백제 부흥 운동에서 구백제계와 후백제계의 미묘한 차이가 생기는데 더욱 도움을 줄 것이리라.
‘단지 걱정이 드는 것이 있긴 있는데.’
* * *
‘아, 역시 이렇게 됐구만….’
“저, 전하. 이, 이곳이 견훤 대왕님의 르,릉. 아니 묘, 그것이 무덤이옵니다.”
안내한 덕은군의 감무 박온량은 스스로도 큰일이 났음을 알고 이마에는 식은땀을 주륵주륵 흘리며 전신을 떨고 있었다.
“…이.”
“즈어어언하!!!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내가 입술을 떼서 감상을 말하려는 순간 그보다 빨리 자진해서 먼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박온량이였다.
그가 이러는 이유는 견훤릉의 꼴이 정말 너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했기 때문인지 잡초가 너무나 무성하고, 단도 이미 금이 가 있었고, 길목들도 전부 풀숲이 되어 만약 오래되어 본래의 모습도 얼마 남지 않고 이마저도 언제 바스라질지 모를 비목(碑木)에 적힌 백제국 대왕 견훤 왕릉 (百濟國 大王 甄萱 王陵)이란 풍화되어 연해질 대로 연해진 글귀조차 없었다면 전혀 못 알아볼 뻔했다.
그리고 세자인 내가 견훤의 무덤을 찾는다는데 그 무덤 상태가 이런 꼴이니 당연히 내가 엄청 화가 났고, 큰일났음을 짐작한 수령은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꼴을 보고 느낀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역수에게 후삼국 통일 후 후백제 도성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떠올렸을 시점에서 이 꼴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지방관은 조정에서 내려보낸 사람이다. 덕은군만 하여도 오늘날 논산이고 충북에 해당하여 후백제 영토로서 기간이 짧아 호족들도 크게 신경을 안 쓸 것 같은데 하물며 외지인인 지방관이 견훤에 대해 아끼면 얼마나 아낀다고 보겠는가?
이 정도에 대해선 가볍게 꾸짖는 것으로 넘어가면 될 듯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웅성. 웅성.
“지방관 나리도 큰일 났구만.”
“그러게 말이야.”
“…태자 전하께선 견훤왕을 존숭한다고 하신다고 만세까지 하셨다잖은가?”
어느 사이엔가 따라온 덕은군 백성들은 지방관이 경을 칠 것을 확정한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그런 말은 백성들에서 그치지 않았다. 세자인 내가 왔다는 소식에 지방관과 함께 동행해 온 읍사의 호장과 향리들도 죄를 지은 듯이 불안한 목소리로 쑥덕거리는 것이 들려온다.
“그, 그러니 내가 무덤의 상태가 걱정되니 관리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는가!”
“전에 술먹을 때 했잖나!”
“그, 랬. 아-! 떠올렸다. 야 이놈아! 그게 걱정을 한거냐! 비꼰거지. 네놈은 술에 취해서 말한 건 ‘저 꼴을 보니 망국의 군주도 차~암 불쌍하다‘고 하였잖ㅇ…!”
“누, 누누누누누누가 상보어르신의 묘를 비웃는단 말인가! 나한테 누, 누명 씌우지 말게!!”
내가 견훤릉의 문제로 그들을 경을 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솔부의 병사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역적 놈이 비교한 것만 하여도 그렇게 화를 내셨는데 …절대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시겠지?”
“나주에서 한 말 기억 안 나는가? 대고려국 태조 황제님의 상보 어르신이라고 하지 않으셨나? 그런 분의 무덤을 여태껏 소홀히 하였잖은가? 나주에서 한 말대로라면 저들은 고려 황실을 능멸한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즉, 나를 제외한 모두가 덕은군의 지방관과 향리들을 크게 혼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다.
“과인은 그대들을 용ㅅ….”
“용서할 수 없는 대죄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부디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즈으으언하아아!!”
박온량의 죄를 인정하고 성토하는 성량은 급기야 피라도 토할 것 같은 수준까지 이르렀고, 그리되자 덜덜 떨고 있던 덕은군은 물론 인근 호족들도 참지 못하고 그를 뒤따라 무릎을 꿇고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소인들을 죽여 주시옵소서! 전하!!”
웅성 웅성.
“견훤 대왕을 흠모하시는 태자 전하시라면….”
“…태조 대왕님의 상보의 무덤을 소홀히 한 향리들에게 벌을 내리시겠지.”
백성들은 물론, 수령과 향리 본인들조차 대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벌을 피하지 못한다고 인식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속으로만 그들에게 짧게 사과를 한 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가슴에 힘을 담아서는….
“내 오늘 담양의 도적(이연년)이 어찌 감히 상보 어르신의 후계를 운운하며 백성들을 속이고 아조를 기만하였는지 깨달았구나. 모든 것이 이것 때문이 아닌가! 이러한 작태인데 어찌 저 도적이 태조 상보 어르신을 경시하지 않을 수 있으리, 어찌 아조가 태조 상보님을 경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리…. 병사들은 뭐하느냐! 당장 저 죄인들을 구금하라!!”
산천초목이 떨리고 날아다니는 새가 떨어질 것 같은 호통을 내뱉으며 주변에 기대에 힘껏 응해주었다.
수령과 호족들을 끌고 가는 덕은군 병사들에게 고개를 돌려 풀이 무성한 견훤릉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한 뒤 용서를 빌었다.
“태조의 후손이자 용손(龍孫) 왕식이 태조 상보 어르신을 모욕한 자를 처단하고, 난을 진압하였음을 고하려 왔다가 도저히 큰 죄를 범한 것을 알게 되었나이다. 이 용손 어찌 태묘의 열성조님들을 뵐 면목이 있고, 육지를 위무하라는 황상을 뵐 면목이 있겠사옵니까!! 흑흑흑!”
“전하 일어나시옵소서!”
일국의 세자가 거적때기 하나 깔지 않고 맨땅, 풀숲에 절을 하니 주변에서 놀라는 반응이 튀어나오며 고개를 들라 하는데 지금 후백제-고려 유대를 공고히 할 기회인데 그게 문제냐.
“닥쳐라! 구태여 과 를 볼 필요 없이 무릇 천지간에 부모와 조부가 힘들면 자식과 손주가 그 편의를 봐주는 것이 상식이고 무덤이란 생전에 노력한 이들이 편히 안식을 취할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대고려국 왕태자란 자가 태조 대왕님의 상보 어르신께서 안식을 취하고 계신 곳이 이렇게 홀대받고 있는 것을 모르고 방기하고 있었는데 어떤 염치로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단 말이냐! 흑흑.”
“전하. 이것이 어찌 태자 전하만의 잘못이라 할 수 있겠사옵고, 태조 대왕님의 뜻이라 의심을 하겠사옵니까. 태조 대왕께서는 견훤왕이 귀부하였을 때 연회를 베풀었고, 극진히 대접하였사옵니다. 이것만 보아도 태조 대왕께서 견훤왕을 홀대하려는 의사가 없음은 명백하오며, 작금의 사태가 태조 대왕님과 황실의 뜻과는 다른 것이 명백하옵니다. 하오니 전하께서는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기강을 세우고 그릇되어 있는 것을 바로 잡으시옵소서!”
김방경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어 신속히 진행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
“오냐. 맞는 말이로다. 그러나 수령과 호족들의 잘못이긴 하나 이러한 사태가 될 때까지 관리를 하지 않다니 참으로 딱하고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이 인근에는 사찰 하나, 중 한 명도 없단 말이냐?!”
내 말이 덕은군의 병사 하나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 그것이 개태사(開泰寺)가 있사옵니다.”
“개태사! 개태사라면 아태조께서 삼한일통을 이룩하신 것을 기념하여 건립한 사찰이 아닌가? 그러한 곳에서 태조 대왕님의 상보 어르신이 안식을 취하는 곳을 이리도 홀대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으며, 놔둘 수가 없구나. 당장 소환하라!”
“대, 대사님도 말이십니까?”
“대사시니 더욱 와야 하지 않느냐!!”
“예, 옛!”
갑자기 눈물을 짜기 힘든데 어떻게든 눈물을 짜낸다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아 그런지 눈이 무지하게 아팠는데 다행히 주변에 들려오는 웅성거림과 병사들의 모습에서 연기가 먹힌 듯하다.
* * *
개태사(開泰寺)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삼한을 통일한 기념과 희생된 장병들을 위로하고자 세운 왕립 사찰(王立 寺刹)이다.
‘개태’라는 이름은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泰)평화의 시대를 (開) 열었다’라는 의미인데 절이 완성된 해 12월에 낙성을 기념하는 법회에서 태조 왕건 자신이 직접 발원문을 지어 올렸다고 한다.
심지어 개태사 뒷산에도 천호산(天護山 하늘의 보호가 내려왔다.)이라는 이름을 직접 붙였을 정도니, 그 중요도와 엮은 이야기들은 다른 어쭙잖은 사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태조 왕건의 어진 또한 이 절에 모셔져 있을 정도로 태조 왕건 이래로 고려 왕실의 존숭을 쭈욱 받아 온 고려 시기 열 손가락에 손꼽히는 매우 유명한 사찰 중 한 곳이다.
동시에 그만큼 받는 혜택도 적지 않았다.
개태사의 장생표(長生標: 신라·고려 시대에 사령을 표시하기 위해 사찰 주변에 세웠던 표지물) 안에 들어간 토지는 어지간한 왕도 귀족들의 소유 토지 여럿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하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개태사의 현 주지(住持) 수기대사(修己大士)는 전국에도 높은 공덕과 명망이 자자한 고승이었다.
“개태사는 전국의 많은 사찰들 중에서도 특히나 태조 대제님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 아닙니까?”
그러한 개태사의 부주지(副住持: 사찰에서 주지를 보좌하며 주지 보궐 시 임무를 대행하는 스님)와 승려들이 지금 때아닌 덕은군에 단체로 소환되어 새파란 소년 앞에서 단체로 쩔쩔매고 있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새벽 일찍 설법을 하러 자리를 비운 개태사의 주지를 대신하여 승려들을 인솔해 온 부주지(副住持) 혜민은 태자의 물음에 동의하였다. 그 물음에 세자는 이어 물었다.
“그렇지요. 그렇기에 황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도 개태사를 존숭하며 중히 여겼고, 개태사에서도 태조 대황을 깊게 존숭하였다고 믿었습니다. 틀렸습니까?”
“아니옵니다. 어찌 태조 천자님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태자 님의 말씀대로 본사에서도 천자님의 은덕을 존경하고,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개태사에선 태조 대황님은 존숭하고 배려하여도 되나 그분의 상보라는 위치는 존숭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기신 것입니까? 혹은 우습게 보고 계시는 것입니까?”
“어찌 그럴 리 있겠습니까. 태조의 상보 되시는 분을 우습게 보겠나이까.”
“그렇겠지요. 그분은 공적으로도 일리천 전투의 최고 공신을 삼한일통의 공신 중 한 분이시며, 태조의 상보 어르신이기도 하니 홀대받아야 하는 자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그럼 이곳이 개태사로부터 수천 리, 수백 리 떨어진 곳입니까? 1년 동안 한 번도 오고 가는 것이 힘들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입니까?”
“…….”
말문이 막힌 혜민에게 세자는 재차 물었다.
“대답하세요. 이것은 고려국 태자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아미타불.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이 개태사로부터 수천 리, 수백 리 떨어진 곳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꼴이 무엇이란 말 입니까? 과인이 근래 들어 무척이나 놀라고 참담한 일들을 겪었으나 이번이 가장 통탄스러웠습니다. 태묘에 계시는 열성조분들과 심도에 계신 성황(=고종)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찰도 아닌 태조께서 직접 건립하신 개태사에서 태조의 상보 어르신을 저리도 홀대하였다니요. 직접 보지 못했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자의 질책과 한탄에 개태사 부주지 혜민이 죽을상이 되어 고개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아미타불.”
* * *
“네 이놈!! 아무리 태만하여도 어떻게 저리할 수 있단 말이냐!”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즈어어언하아아아!”
“당장 저자를 끌고 가 장 30대를 쳐라! 본디 아무리 위무사라 할지라도 함부로 형벌을 가해선 아니 되나 이 문제는 고려국의 태자로서 도저히 그냥 묵과하여 넘어갈 수가 없도다. 죄인을 끌고 가 장 30대를 때려라!”
덕은군의 지방관 감무 박온량은 내솔부의 병사들에게 끌려 나와 덕은군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장 30대를 맞았고, 공주의 향리들 또한 장 20대를 맞아야 했다.
여태껏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수령과 향리들이 마른하늘에 많은 시선들 앞에서 악 소리를 내뱉으며 장을 맞는 흔치 않은 구경거리에 백성들은 모여서 구경하였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변을 보았으니 내 어찌 죽어서 열성조분들을 뵙고 황상께 륙지를 무사히 위무하고 보고할 수 있단 말인가!”
장을 전부 맞아 끙끙대는 수령들과 향리들이었으나 그들의 고통 어린 표정 어딘가에 안도감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과 기회를 받았다는 것이다.
“본래라면 황실을 모독한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극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나, 수령 본인은 몰랐다는 것과 향리들 또한 감히 건의를 올려야 하는 것인지도 주저했다고 하며, 수기대사께서도 자비를 청하니 마지막으로 속죄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나의 그 호통과 같은 명에 아픔을 참아내며 답하고 물러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이어서 곁에서 조용히 목탁을 두드리던 늙은 승려에게 공손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수기대사(守其大師)께서도 이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분은 우리 태조님과 자웅을 겨루시던 준걸이시며, 태조님 또한 경의를 표한 존귀하신 분입니다.”
“아미타불. 전하께서 이 중들에게 공덕을 베풀 기회를 주셨는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곧바로 제를 올리고, 대왕(견훤)의 넋을 위로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이후 대왕의 어전을 그려 본 사찰에 전시하고, 무덤(陵) 또한 소승과 본 사찰에서 매년 왕래하여 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목탁을 두드리는 개태사(開泰寺)의 주지 수기대사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개태사에서 이렇게까지 해준다면 이후 누구라도 고려에서 견훤을 경시하고 있다고는 말 못 할 것이다. 예정에도 없는 견훤왕릉의 소동은 이렇게 끝을 맺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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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오래 소식이 끊겼다.
비록 귀환 후 잠시 만나 대화를 나누었으나 어디 진득하게 나누었다 할 수 있겠나.
그러나 나는 경을 도외시하지 않는다고 일찍이 경에 말한 적 있다. 아마 경도 나를 믿어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오늘 남방에서 학자들과 만나 담화를 나누었다가 그대가 떠올라 이리 글을 적어 보낸다.
언제 한번 경과 그들과 대면시켜 담화를 나누게 하고 싶구나.
그런데 지난 자리에서도 운을 떼었듯 슬슬 하고자 하는데, 그때 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경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 부족한 것인가? 그때로부터 시간이 흘렀는데 지금도 그러한가?
과인의 생각이 이렇다고는 해도 경이 아직 이르다 생각한다면 기탄없이 말해보도록 하라.
지금의 일은 사사로운 일이 아닌 북방과 아조의 태묘사직을 위한 것이니 과인 또한 경의 조언을 달게 받고 깊게 검토 후 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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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와 내용 무엇 하나 의심할 것 없는 고려 세자의 것이었다.
무엇보다 서찰에 적힌 문자는 한자도, 범어도, 왜어도 아닌 이전에 세자가 자신에게 알려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문자라는 것이 눈앞에 있는 것은 전진정명한 서찰(書札)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서찰의 내용을 전부 읽은 사내는 혹시라도 자기가 읽지 못한 내용이 있나 재차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내용을 외우고 나서야 서찰을 불에 태워 말소시켰다.
그러고는 어찰에 대한 답찰(答札)을 적기 위해 붓을 들었다.
“후우.”
붓을 들었다고는 해도 사내는 바로 글을 써 내리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질문에 대한 바른 답을 적으면서도 동시에 답찰이 도중에 세자에게 가지 않고 위험한 자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피해를 최소할 수 있게 생각하고 생각 끝에 적어야 하는 답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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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 이 모(某=아무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황상 폐하께서는 나라를 이어받아 조종묘의 유지를 이어나가시고, 태자 전하께서는 국내외의 난들을 평정하시고 부지런히 나라의 정사를 임하시며, 폐단과 결점을 치우려 하시니 해동에 요순(如(=堯)舜) 시대가 내려올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 미관말직 아무개의 보잘것없는 의견을 들으시려 하니 소인이 비록 어리석지만 소인의 생각을 말씀드려서 태자 전하의 물음에 만 분의 일이나마 대답해 볼까 합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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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그렇게 열심히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서경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작가의 말
*견훤왕릉의 비석은 근래에 세워진 것이고 견훤릉 자체가 전해져올 뿐 실제 견훤무덤인지 진위가 갈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무덤을 견훤릉이라고 선전하고도 있어 작중 설정상으로도 견훤릉이 맞다고 하고, 견훤이 죽고 나자 견훤을 불쌍히 여긴 스님 한 분이 비목을 세웠다고 잡았습니다.
**요순(如(=堯)舜) 이 부분은 본래 요순시대 할 때 요순(堯舜)이 맞는 글자지만 고려 시기 3대 임금정종의 이름이 왕요라서 ‘요(堯)’가 피휘 글자에 적용되어 글로 적을 때는 ‘요(如)’를 ‘요(堯)’ 대신 치환하여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따지고 들어가실 생각은 없으신 것 같으니 그냥 실제론 이랬다고만 아시면 되고, 이후 작중 고려인이 고려 내에서 요순 시대라는 단어를 대사가 아닌 한자로 적을 때 (堯)를 쓰더라도 실제론 (如)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