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83
83화. 73장 태화루(太華樓)
용덕궁(龍德宮).
연회가 사실상 끝이 났으니 이제는 서경의 일을 처리할 시간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처리할 것이 남아 있었다.
“오늘 낮에 있었던 대사의 강연에 대해 주 선생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유불일치론 이것을 밀어붙이기 위해선 새로운 학문을 전파할 주잠 일행들의 의견(이라고 쓰고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덧붙여 주잠의 아들과 학사들은 받지 못했으나 주잠은 나의 추천과 남송에서 관료 경험과 주자의 후손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조정에서 정식으로 태자빈객(太子賓客)이라는 관직을 받았다.
고려 세자의 교육기관인 사보(師保)에서 가장 높은 정 1품이자 세자의 스승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태자태사(太子太師), 태자태부(太子太傅), 태자태보(太子太保)도 아니고, 종2품이자 세자의 자문관 역할을 하면 떠올리는 태자소사(太子少師), 태자소부(太子少傅), 태자소보(太子少保)의 자리를 생각하면 이들 중 어디에도 앉지 못한 주잠은 푸대접받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절대 아니다.
태자빈객 또한 보통 정3품으로 높은 관료들이 겸하여 받는 자리임을 생각하면 도리어 매우 우대받은 셈이다.
“전하께서 고려의 백성들을 깊이 생각하는 바를 어찌 소인이 모르겠습니까.”
주잠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모호하게 답을 피했지만 다른 제자들은 달랐다.
“그렇사옵니다. 하오나, 전하. 본디 불교의 참언이라는 것은 사람을 혹 되게 하는 요설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을 요설과 유학이 어찌 근본이 같다 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한 이는 주잠의 아들 주여경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 일행들도 그의 의견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지 동의의 시선을 보내왔다.
스승인 주잠만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답을 회피했을 뿐이다. 그들이 불교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다.
“다른 학사분들도 그리 생각하는가?”
“…유자와 불자들이 믿는 것이 근본이 같다 하시는 것은 소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6학사(*1명은 동경에 남았다.) 중 1인이 그리 답하자 다른 이들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주여경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주잠은 여전히 무언이었다.
“그런가. 알겠네. 이만 나가들 보시오. 여러 행상을 지켜본다고 지쳤을 것인데 이만 들어가 휴식을 취하시오.”
그들이 모두 밖으로 나갈쯤 마지막으로 주잠을 불러보았다.
“주 선생.”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주 선생께선 과인을 보고 ‘고려의 백성들을 깊이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과인에겐 남조를 떠나 이곳에 귀부한 주 선생과 학사분들 또한 이미 그 고려의 백성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자 전하의 성은에 망극할 뿐이옵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한 것인지 아니면 곧이곧대로 해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잠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떠났다.
그가 떠나자마자 나는 곁에 있는 김방경에게 물었다.
“김 중랑장.”
“예. 전하.”
“혜심 대사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설명해다오. 그분은 어떠한 분이더냐?”
“대사께선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는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까지 하시었으며, 성상과 상국께서도 무척이나 흠모하시어 초청을 하였던 고승이십니다.”
“더 말해보아라.”
김방경의 설명이 이어질 때마다 내 입가가 절로 실룩 실룩 움직이는 듯했다. 들은 것이 전부 사실일 경우 참으로 보기 드문 참된 승려다.
개태사의 주지 수기대사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수기대사를 보았을 때는 나라를 이끌 대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 혜심 대사는 설명만 들어도 진짜 나라의 스승(國師)이라고 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고승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물론 여기에는 혜심 대사의 주장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 혹은 도움이 되는 부분이 크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혜심 대사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조사하여 숙지하라. 유 산원이나 척 낭장은 몰라도 김 중랑장 그대는 반드시 숙지하여야 할 것이다.”
“명 받잡겠사옵니다.”
“그렇다면 불자와 유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중랑장은 지금이 ‘제물’을 바칠 때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공기 좋고 물 좋은 북방 산보를 나갈 때라고 생각하는가?”
내 물음에 김방경은 잠시 고민한 후에야 대답했다.
“날씨가 시시각각 변하니 날씨가 좋을 때 빨리 산보를 나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알겠다. 그렇다면 준비를 해야겠구나. 거기 밖에 아무도 없느냐!”
내가 부르자 곧바로 문이 열리면서 환관이 들어왔다.
이 환관의 이름은 ‘마휘(劘輝)’.
강화도 조정에서 서경팔관회를 허락한다는 칙서와 송 낭장과 함께 내려온 내 전속 환관 중 하나다.
“과인이 오늘도 밖을 나가려 하니 오늘도 부탁하겠다.”
“전하. 이미 어젯밤에도 잠행을 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소회와 대회가 다를지언데 어찌 소회 날 밤만 민심을 보고 대회 날 밤의 민심도 헤아리라고 하느냐? 과인은 능력이 부족하여 그것은 무리니 막지 말라.”
“전하, 이러셔서는 아니 됩니다. 혹여라도 전하의 옥체에 해라도 생기는 날에는….”
“여차하면 내 한 몸 지킬 정도 재주는 있으니 안심하라.”
마휘가 영 못 미더워하는 눈치기에 손에 든 지팡이를 치켜들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지팡이 같지만, 속에는 칼날이 숨겨져 있는 칼로 조선시대에선 창포검이라고 부르는 무기이다.
본래 조선 시대쯤 돼야 제작되던 무기였지만 만들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제작을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척 낭장과 유 산원도 데려가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하오면 소인도 동행시켜 주시옵소서! 소인은 태자 전하를 종사할 의무가 있사옵니다.”
그대로 떠나려고 하자, 마휘는 급히 따라붙으며 말을 건넸다.
“그대까지 자리를 비운다면 궐의 사람들도 과인이 잠행을 나간 것을 눈치챌 것이 아닌가?”
“이미 두 무장이 자리를 비웠는데 어찌 소인이 자리를 비운 것으로 눈치를 채운다고 하시옵니까? 소인도 데려가 주십시오.”
이번엔 고집이 세다. 그러나 단번에 거절했다.
“김 중랑장이 남을 것이고 송 낭장도 남을 것이다. 여기에 그대까지 있으니 과인이 잠행을 나가는 것을 모를 것인데 그대가 떠나면 어찌 눈치 못 채겠는가? 그대는 남으라!”
“전하!”
“그 이상 이에 대해 논하지 마라.”
귀찮은 간섭을 딱 잘라 끊자. 팔관회같이 떠들썩한 밤에 주변 눈이 있는 것은 싫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싫다.
* * *
길가에 나서니 왁자지껄하게 웃음과 대화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도 많이 엿보였다.
“호호호. 나리. 여기입니다. 여기가 좋다구요.”
“호오? 오냐! 그럼 어서 들어가자꾸나!”
“하하하. 대인. 어딜 가시는 것이옵니까?”
웃음과 술을 팔아 남을 흡족하게 하는 기생들, 기생들은 기루에서만 손님들을 받지 않았다.
자신을 선택한 손님을 따라 며칠 기간 동안 동행하는 기생들도 있다.
하물며, 팔관회 날에는 그러한 여성을 팔에 끼고 다니는 이들이 더욱 많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만이 꽃피어 있었다.
“나는 커서 솔부에 들어갈 거야!”
“나도 내솔부에 들어가서 태자님과 함께 전쟁에서 공을 세울 거야!”
서경의 아이들도 아직 잠에 들지 않고 등불 아래에서 놀고 있는 것이 드문드문 보인다.
참고로 빙의를 한 뒤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조선 시대부터 야간 통행금지 시간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려 시대에도 이미 야간통행금지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유교적 음양 논리에서 나오는 조선과 달리 남녀라도 차별을 주지 않고, 그 시간이 널널하여, 하는 곳도 있고 안 하는 곳도 있으며 지역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서경과 개경 경우는 통금 시간이 자(子 : 밤 11 ~ 새벽 1시)시에서 인(寅 : 새벽 3시 ~ 새벽 5시)까지였는데 물론 팔관회 날에는 예외였다.
“태화루(太華樓)에 있다고?”
“예. 태화루 최상층에서 기거하고 계십니다.”
태화루(太華樓)는 서경에서 손꼽히는 고급 주막(겸 기루)이다. 다만 ‘루’(樓)라는 이름에서도 알다시피 조선시대처럼 1층으로 된 것이 아닌 높은 5층 탑을 되어 있다.
듣자 하니 이 주막이 처음으로 건설되었을 때 이 주막의 주인은 7층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7이란 숫자는 황실의 태묘(太廟. 천자국의 종묘로 7묘제로 지낸다.)를 연상시키게 되어 그보다 급이 낮은 5층으로 건설했다고 한다.
정말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다고 한다.
이 태화루의 재밌는 점은 높은 층일수록 그 크기가 좁아지고 호화스러워져 값이 매우 비싸며 제일 고층인 5층에 이르러선 손님이 머무를 방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대붕이나 역수가 이야기를 안 해준 것을 보면 분명 여몽 전쟁 때 부서진 건물일 것이다.
“오냐. 가겠다. 안내하라.”
“예.”
오늘 내가 밖으로 나온 것은 회의 때문이 아니다. 물론 민심을 알아보기 위한 것도 아니다.
덜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웃음과 수다, 금(琴)을 타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비단옷으로 치장한 여인들과 비단은 아니나 깨끗한 차림으로 음식을 들고 나가는 종업원이 눈에 들어왔다.
“몇 분이신지요? 혹 선결을 하셨습니까?”
“이미 일행이 와 있고, 선결을 한 상태다. 안내하라!”
주문을 받으려고 다가온, 무협 소설로 치면 점소이에게 그는 답했고,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곤 예약한 이들을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 장의 한지를 꺼내 들어 확인하며 되물었다.
“어디에 예약을 하셨는지요?”
“5층이다.”
“5층.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의 대답에 종업원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확인했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종업원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푸른 비단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와 인사했다.
“호호호. 어서 오시지요. 정말 대인이셨군요.”
미부(美婦)는 그를 확인하고는 미소를 짓고는 이내 내게 시선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이 공자님께서 송악산의 왕 서방님이시군요. 소인은 태화루의 책임자. ‘홍월(虹月)’이라고 하옵니다. 천상루(天上樓=5층)로 안내해드리겠사옵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줄어드는 크기와 반비례하여 호화스럽고 잡음이 줄어들어 갔다.
1층이 20실하고도 마당이 있다면 2층은 12실. 3층은 8실. 4층은 3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그곳에는 층 중앙에 거대한 문 하나만 있는 방이 보였다.
문 앞까지 걸어간 그녀는 천천히 옆으로 물러나 길을 비키고는 고개를 숙이고 대기했고 그는, 아니, ‘정안연’은 그런 홍월에게 마지막으로 확인하고자 물었다.
“이후 우리들 외에 이곳에 올라오는 자는 없어야 할 것이다. 알겠나?”
“정대인께서 지시하신 대로 태화루의 사람들 외에는 가지 못할 것이며, 그들 또한 부르지 않는 이상 일정 시간에만 갈 것입니다.”
“좋다. 만일 이 일이 다른 이의 입에 거론되기라도 한다면… 나는 절대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물론이옵니다. 대인. 후후후”
홍월의 웃음에 정안연은 꺼림칙해하면서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물러났다.
같이 따라온 일행들도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길을 비킨 정안연이 고개를 숙이고 문을 잡은 채 내게 말했다.
“이곳에 있었던 일은 절대 밖으로 새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느긋이 지내시옵소서.”
“…수고했다. 참으로 수고했다.”
정안연은 무언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공손히 문을 열었다.
열린 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가니 얼마 되지 않아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붉은 비단을 입은 채 자리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제는 눈에 익은 미녀를 말이다.
“…수유.”
“…….”
* * *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다. 창밖을 보니 아직 깜깜한 것이 여명조차 오지 않은 새벽인 듯 보였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으음.”
몸을 일으키자 별안간 등과 어깨에서 전해지는 은은한 진통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침상 위에 이불 군데군데에 거뭇거뭇한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 옆에는 나신으로 눈을 감고 있는 수유가 보인다. 곤히 잠들고 있는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자애로운 선녀 그 자체였다.
그런 선녀가 어젯밤에는… 그에 대해 대신 답하듯 어깨와 등에서 다시 진통이 느껴진다.
손등으로 볼을 쓰다듬자 수유의 얼굴이 약간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깨어 있었구나.
“내가 깨운 것이오?”
“…괜찮다.”
그리 말하며 수유는 스르륵 일어나 다 식어버린 차를 빈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대답도 그렇고 시선을 피하는 것도 그렇고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다.
그녀를 놔두고 옷을 차려입고 있을 때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미안하다.”
“괜찮소. 누가 내 옷을 벗겨서 보겠소?”
시중을 드는 궁녀나 환관이라면 볼지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이야기할 일이다.
“식사는 하지 않는 것이냐?”
“괜찮… 아니, 들겠소.”
거절하려고 했으나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보겠는가.
새벽이긴 해도 홍월이 미리 지시를 내렸던 것인지 종을 울리니 얼마 안 가 직원들이 올라와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 옆에서 앉아서 지켜보며 잔에 찬을 따라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종한 이들과 함께 태화루를 떠나려던 그 순간 어제 일이 생각나서 그녀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녀는 이쪽을 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아, 어젯밤 그 말.”
“못 들은 것으로 하겠으니 어서 가라.”
이해한다는 듯, 이전과 다를 바 없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하는 그녀의 반응에 나도 몸을 돌려 할 말만 하고 문을 열고 태화루를 떠났다.
“진심으로 한 말이니 답은 다음에 듣도록 하겠소!”
뒤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갔다.
귀를 의심했겠지.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 정도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작가의 말
*작중 고려 통금 제도 관련은 조선 태종 때에 시간을 조정한 기록에 따라 이전부터 있었다는 추정과 중국 경우 한나라 이전에도 통금 시기가 있어 당나라 제도를 많이 모방한 고려에서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 삼류작가의 작중 창작한 설정입니다. 현재 고려시대에 통금 제도가 있었는지는 공식적으로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으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작중 서경 내에 있는 태화루(太華樓)라는 주막은 작가가 창작한 설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