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84
84화. 74장 농업
“꺅! 전하.”
조정에서 내려보낸 궁녀들 중 한 명이 용포를 입히는 걸 돕다가 내 등을 보곤 비명을 질렀다. 다른 생각을 한다고 그만 깜빡했다.
틀림없이 등에 있는 것을 본 것이리라.
그녀의 비명에 다른 궁녀들도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자 재빨리 갈아입어 가렸다.
“전하. 무슨 일이시옵니까?”
“신경 쓰지 말고 물러나라!”
무엇 때문인지 보러왔던 궁녀들은 내 명에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 자리에서 2번째로 눈치챈 자가 나오는 것을 우선적으로 막은 나는, 등을 본 궁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전하 어찌하여 존귀하신 옥체에 이런 끔찍….”
“조용하라! 네가 하는 것은 용포를 입히는 것인가? 아니면 경거망동하며 소란을 피우는 것인가?”
나의 질책에 궁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기어코 이것은 물어봐야겠다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하, 하오나 전하. 어, 어찌하여 옥체에 조, 조흔(爪痕 : 손톱자국)이 있는 것이옵니까?”
젠장. 역시 제대로 봤구나. 이건 밤 중에 생긴 상처다. 그러나 그 일을 말해야 뭣 하겠는가.
“알 것 없다.”
“하, 하오나 옥체에 흠이 생기셨….”
“내가 참가한 전장만 하여도 이미 수 번을 넘어가거늘 이제 와서 상처 한두 개 입는 것이 무슨 흠이 된다고 하는 것이냐! 내게 여러 번 같은 말을 하게 하지 마라.”
“힛.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재차 으름장을 주자 아직 어린 궁녀는 고개를 숙이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왕족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대죄지만 이건 밤중에 일어난 일인 데다가 어떤 의미론 내가 만들게 한거라 그녀가 죄가 있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 사유를 말하는 것도 낯부끄럽다.
* * *
서경의 장락전(長樂殿)은 서경이 아직 쇠락하기 전 분사를 맡고 있었을 무렵 정무를 보던 곳이다.
그런 곳이다 보니 나 또한 서경에서 정무를 볼 때는 주로 지금처럼 장락전에서 본다.
“팔관회가 무사히 끝이 난 것이 과인의 덕이 아닌 경들의 노고 덕이라 할 수 있다.”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어찌 저희들의 공이겠사옵니까. 모두 태자 전하의 은덕과 노고 덕분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경 귀족들의 안면에는 정말로 진실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경에서 팔관회가 개최된 것이 어지간히 좋았던 듯하다.
“그리 말하니 더 이상 논하지는 않겠으나 이후 갈라전의 업무는 동계만이 아닌 이곳 서경도 맡을 것이니 경들도 갈라전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태자 전하의 명에 따르도록 하겠사옵니다.”
저들도 갈라전이 존속해야 내 입지가 살고, 내 입지가 있어야 서경 위상이 회복하던 혹은 이대로 팔관회를 벌일 수 있다는 걸 아니 내 입지 관련에 대해선 토를 달지 않을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들의 바람과 달리 나는 팔관회 자체는 크게 달갑지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번 팔관회처럼 외우내환으로 힘든 상태에서 개최하는 팔관회는 싫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팔관회를 일으키는 데 드는 비용이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들어오는 수입은 조공품뿐이다. 그렇다고 그 조공품이 받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동시기 몽골처럼 받아먹기만 하면 모르겠지만 고려나 금, 송 같은 경우 조공품을 받으면 종주국으로서 체면을 위해서라도 그 이상의 회사품을 주는 것이 관례다.
고려는 겨우 외우내환을, 그것도 발등에 떨어졌던 외우내환만 제거한 상황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출이 많은 팔관회를 벌인다는 것은 정말 달갑지가 않다.
‘아니 좋게 생각하자. 일단 위상을 올리고, 입지를 다진 점에서 이번 팔관회는 손해보단 이득이 크다. 거기에 여진족 추장들 경우 조공품으로 준마와 무기를 바치는 경우도 다수니 군사력 강화에도 도움은 될 것이다. 또한 팔관회에 참여한 송상과 국경 인근 여진족 추장과 변방의 인간들로 부터 서경 밖 소식을 알수 있게 되었으니 정보 수집이라는 큰 이득도 있다.’
그러나 지금 갈라전 여진족들은 회사품으론 비단과 서예, 문방사우 같은 것보단 쌀이나 곡식 등을 더 선호한다는 점이 역시 달갑지가 않다.
이건 모두 동하국이 멸망했기 때문인데 앞서 말했다시피 몽골에선 조공을 바쳐도 제대로 된 회사품을 주지 않는다.
동요국도 야율유가와 그의 아내 요리씨(姚里氏)가 죽은 시점에서 명목상으로만 나라를 유지하고 있는 괴뢰국이 된 시점에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고려에서 팔관회를 하고 조공을 바치면 더 큰 회사품으로 주고 있는데 먹고 살기 힘든 여진족들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몰려오지 않겠는가.
아예 이 먹을 것을 목적으로 갈라전 여진족이라고 자칭하는 갈라전 너머의 여진족들도 왔다고 하니 소모되는 수준은 내가 사전에 생각해 둔 것 이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팔관회에 드는 경비 또한 만만치 않으니 이후 이에 대해 내외적으로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 또한 서경에서 팔관회를 개최한 이상 언제 다시 할지 모르는 만큼 팔관도감(八關都監)의 부활도 공식적으로 청하려고 하는데 경들 중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자 있는가?”
내가 되묻기는 했지만, 팔관도감의 부활 또한 서경 위상의 회복 중 하나인데 거절이 나올 리는 없었다.
“반대라니요. 천부당 만부당 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이번 팔관회가 참으로 무사히 끝났다곤 하나 그 지출은 적지가 않았사옵니다. 이는 제대로 관리를 하는 기구의 부재라 할 수 있으니 마땅히 서경의 팔관회를 관리하는 팔관도감의 부활을 청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반대를 하지 않는 것 같자, 나는 말을 조금 편하게 하며 운을 뗐다.
“본래 팔관회는 한 해의 풍작과 곡식을 수확한 후 치루는 행사라고 들었다. 그러나 올해와 작년은 잇따른 전란으로 예년(例年)만큼 나오지 못하였으며, 진압과 북정, 팔관회와 북번들의 회사품으로 더욱 지출되었다. 특히 팔관회가 계속된다면 이제 그 소모는 예년 수준으로 잡으면 서경의 대창(大倉)은 만년 채우지 못할 것이니 근본적으로 예년 이상으로 수확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오면 어찌해야 하는 것이 옵니까?”
그들의 말에 나는 여지껏 벼르고 있던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사마천이 적은 [효문본기(孝文本紀)]에서 위(魏)의 효문제는 ‘농사는 천하의 근본(農, 天下之本)’이라고 하였다.
이 말대로 농작물에서 나오는 오곡들은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의 입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하루를 살아가게 하며, 식량이 떨어져 배를 굶게 된다면 제아무리 일당백의 용병(勇兵 : 날쌔고 용감한 병사)들이라 한들 오합지졸이나 다를 바 없게 되고, 식량이 풍족하다면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농병들조차 성벽을 의지하여 다수의 적들을 상대로도 수비를 할 조건을 갖추게 된다.”
“참으로 구구절절 옳으실 말씀이시옵니다. 전하, 당장 백성들과 각 호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고 황폐화된 땅을 개간토록 하겠사옵니다.”
서경호족이자 서경공관(西京公官:서경에서 일하는 관료)인 이천수가 나서서 대답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장려하는 것이 나쁘진 않지만, 단순히 개간하고 장려에 그치는 수준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황폐화된 땅을 개간하여 논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만든다는 것은 좋으나 단순히 개간을 하여 농사를 장려를 한다고 해도 종래의 농사법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남조(남송)에서는 풍작 때만 되면 풍족한 오곡들로 황해(黃海)와 백해(白海)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영토와 사람 수의 차이만이라고 하겠는가? 이 이유는 남조에서는 농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주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농법을 연구한 결과라고 하였다. 그 예로 아조의 농가에선 작물을 키울 때 맨땅에 바로 씨를 뿌려 키우지만, 남조에선 미리 키운 후 논에 옮겨 심는데 이를 이앙법 혹은 이묘법이라고 한다. 이 농법으로 키운 작물들은 아조의 직파법에 비해 많이 살아남아 그 수확량은 같은 밭에서 직파법으로 키운 밭보다 수확량이 배는 넘는다고 하니 어찌 부의 지름길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지금 부터라도 남조에 있는 농사법 중 아조에 적합하고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면 아조 또한 그것을 따라 하여 농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시기 고려에선 직파법이 근본이었고 모내기법이라고 불리는 이묘법은 아직 수용되지 않은 때였다.
나의 말에 많은 이들이 놀라면서도 배는 넘는다는 말에 호응을 보이는 듯했으나 이묘법에 대해 이미 아는 귀족도 있었는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이견을 내놓았다.
“전하. 전하께서 말씀하신 이묘법은 분명 수확량이 크게 늘려주는 농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오나, 소인이 알기로 그 이묘법은 수해나 가뭄으로 물이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면 그해 농사는 모두 망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들었습니다. 이에 남방이면 모를까. 서경과 북방에선 힘들지 않을까 소인은 그것이 걱정이 듭니다.”
그의 말대로 모내기법의 유일한 단점은 물을 충분히 대야 한다는 점이다.
물을 대어 무사히 수확철까지 견딘다면 그 양은 직파법에서 나오는 양을 거뜬히 넘기지만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들거나 되려 홍수가 난다면 그해 농사는 모두 망치게 되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에서는 말기에도 남부 지방 일부에만 시행하는 수준에 그쳤고, 조선도 후기까지 가서야 겨우 금지를 풀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성공만 한다면 대창을 손쉽게 채울 수 있는 법을 어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경의 말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과인이 역적 이가 놈(이연년)을 토벌하러 나주목에 갔을 때, 과인은 보았도다. 남방에는 아조에 귀화한 자를 만나보았는데 그자가 말하길 ‘본래 자신의 선조는 아조의 백성이었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남조로 떠났다가 자기 대에 다시 귀부하였다’고 하였다. 그자의 이름은 구존유라는 자로, 남조에서 노비를 하여 아조에 왔을 때는 제대로 된 돈도 없었으나 이 이묘법으로 부를 축적해 불과 수년 만에 나주목에서 손에 꼽히는 거부가 되었다.”
“하오나 그것은 남방….”
여기까지만 말하니 해당 귀족은 다시 이묘법의 문제를 거론하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이어 말했다.
“그러나 이묘법이라는 농법을 들었을 때 과인 또한 경이 말한 그 단점이 마음에 걸려 물어보니 구존유는 이리 말하였다. ‘서토(西土)에는 쉽게 물을 댈 수 있는 수차(水車)가 있어 물이 떨어지면 쉽사리 공급하였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의 말대로 아조는 도랑을 파서 물을 댈 뿐, 수차(물레방아, 이 경우 밀이나 곡식을 찧는 물레방앗간이 아니라 송수용도를 말함)를 모른 채 이묘법만을 따라 하였으니 어찌 그 피해를 피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남조라고 어찌 매년 풍년이고 한 번도 가뭄과 수해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 물의 공급을 중요시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수차를 도입하는 것이 옵니까?”
“그렇다. 보(堡=둑)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고 아조가 남조보다 땅이 척박하고 좁은 만큼 남조 이상으로 수차와 수리 시설과 송수 기구, 농업에 도움되는 기구를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과인이 구존유에게 듣고 만들어본 도안표가 있으니 이를 서경의 공장인(工匠人)들에게 들고 가서 그대로, 혹은 과인이 바라고자 하는 것을 제작할 수 있는지 확인토록 하라!”
물론 구존유에게 묻기 전부터 나는 수차와 이묘법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송에서 살고 있던 이에게 들었으니 시행하자는 이야기가 더 안심이 되고 설득력이 있겠는가?
아니면 그냥 생각나서 말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고 안심이 되겠는가?
“하오나 그 둑을 만들고 수차를 제작하고 도입하는 것에도 치수를 재야 하니 시간이 걸리지 않사옵니까? 더군다나 이제 겨울이 옵니다. 땅이 얼게 되면 개간을 하는 것과 둑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려워지니 그것이 걱정이옵니다.”
“땅의 문제는 어쩔 수 없으나 치수 문제는 내가 지난해 서경을 떠나기 전 그대들에게 대동강을 비롯한 북방의 치수 작업을 명했을 것이다.”
“전하. 치수 작업은 절대 신속히 마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옵니다. 예로부터 치수 작업은 국가 대사로 보았을 정도로 크고 방대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아조는 최근까지 전란에 휩싸여 그 힘듦이 치세보다 더욱 힘들고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것들을 도입하는 만큼 더욱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과인 또한 지금 당장 북방 전부를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일부만 시행하고 효과를 보고 적합한지도 확인한 연후에 장차 넓히려고 함이니 그대들은 확인하는 과정은 반대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귀족들도 더 이상 둑 공사와 수차에 대한 문제로 강한 반대는 하지 않았다.
서경과 인근 지역 발전을 원하는 북방 귀족들로서, 이미 서경에 팔관회까지 재개시켜 준 세자인 나와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후 나오는 반대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점진적으로 확인을 하는 것이라면 어찌 거절하겠사옵니까. 하오나 문제는 둑 공사만이 아니옵니다. 둑이야 본래 강과 계곡, 하천 곁에서 하는 것이나, 개간은 틀리옵니다. 본디 땅이란 열흘만 쉬어도 잡초가 무성하고, 두 달이 지나면 전혀 다른 땅이 되는데 아조의 땅은 지난해와 지지난해의 전란으로 초토화가 된 여지껏 관리가 되지 않은 땅이 많사옵니다. 이곳을 다시 고른 땅으로 하려고 하면 잡초를 뽑고 땅을 다져야 하는데 보수 공사로는 인력이 너무 힘이 드옵니다.”
“…그에 대해선 조금이라도 인력을 줄이는 방도는 있도다.”
* * *
히이이잉~~!!
푸른 하늘. 서서히 추위가 몸을 시리게 하였으나 말들은 아직은 괜찮은 씩씩하게 풀을 뜯어 먹으며 기분 좋게 돌아다녔다.
“그래. 그래. 많이많이 먹고 또 꾹꾹 밟아라!”
“어이. 양씨. 말 먹는 거 그만 보고 자네도 여기서 밥이나 먹어.”
동료의 말에 양씨는 헐레벌떡 달려와 새참을 먹기 시작했다.
“흐미. 이게 웬 육포여?”
“아, 지난 팔관회 때 여진 녀석들 많이 왔잖나? 그때 술 마시다가 안줏거리로 받았지.”
쩝쩝 씹어먹더니 양씨는 깜짝 놀라 물었다.
“뭐여? 이거 닭고기도 아닌데 무슨 고기여?”
“장끼(꿩) 고기래.”
“흐흐흐. 장끼 육포는 첨 먹어보는구만.”
“흔치 않지. 그나저나 개간할 땅에 말들을 풀어 밟게 하라니 내 살다 살다 처음 들어보는 방법이라 이게 잘 될까는 모르겠구만.”
“얼추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말들이 돌아다니면서 땅을 다지고, 잡초를 뜯어 먹으니 우리가 할 일이 줄어드니 편하긴 하지.”
“그렇긴 한데… 그런데 저 말들로 땅을 고르라는 것은 태자 전하께서 시행하신 것이라며? 전하께선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떠올리셨어.”
그러나 그 말에 다른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듣기로는 저걸 태자 전하께서 명하신 것은 맞는데 저 방법 자체는 이미 다른 곳에서 시행 중인 방법이라고 하던데?”
“다른 곳이라면 어디?”
“분명… 탐라(耽羅 : 제주도)에서 하는 경작법이라나?”
“탐라국? 거, 우리나 대관님들도 모를 만하군. 그 남쪽 소방의 경작법을 태자 전하께선 어째 알고 계시는지 그것도 참으로 요상하구만?”
“남조의 경작법과 도구도 도입하자고 하신 것을 보면 이것저것 많이 공부하셨겠지.”
“그건 그래. 그럼 슬슬 다시 일해보세.”
“잠시만 기다리게. 이것만 먹고 함세.”
#작가의 말
*우마를 불러 땅을 밟게 하는 경작법은 에서 나오는 경작법인데 조선 이전 고려 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원 나라의 총관부가 설치되고 대대적인 목마장이 되기 전부터 있었다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고려 고종 시기에도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고 추측한 글이 있어 그 설을 채택했습니다.
**우마를 불러 땅을 밟게 하는 경작 법은 말 그대로 밟게만 하는 것이지 농사에 사용되는 말처럼 쟁이를 갈게 하거나 하지는 않아 말들에겐 큰 부담이 없습니다. 즉, 농마가 아니라도 사용될 수 있는 경작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