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96
96화. 83장 위기(4)
“와아아아아!!!”
달이 우뚝 서 있는 야밤에 호합하 인근은 떠들썩하다.
“크악!”
“히익, 히이익! 뭐야. 뭐야! 뭐야! 뭐냐고!”
소홀태는 누군가를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따지며 도주하고 있었다.
압구무 추장에게서 동하국의 황실 친위군이 입었다는 친위모극의 장비를 받았을 때만 해도 어떤 적이라도 문제없다고 속으로 자만했던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만약 그런 착각만 하지 않았다면 이웃한테 웃돈까지 주며 대신 출병하여 이런 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 후회되고 증오스럽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얕잡아 보고 있었다, 비웃었다. 아니, 결코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다. 응당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어느 누가 고려의 어린 태자는 약관도 채 되지 않았으나 옛 고려 동명성제의 재래(再來)이고 그 궁술 또한 하늘에 도달하여 요괴조차도 잡았다는 것을 그대로 믿는단 말인가.
당연히 활 조금 쓰고 전장에 있었던 것을 무재가 있고, 신궁이라고 추켜세운 것이라고 믿었을 뿐이다.
그것이 상식적이다. 그래야 할 텐데!
“억!”
바로 곁에서 함께 달리고 있던 동료가 미간 사이로 화살이 관통되며 말 밑으로 쓰러진다.
벌써 12번째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유의 작은 화살. 고려 태자가 쏜 화살이다.
바지는 이미 흥건하여 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다.
저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요괴다. 우린 요괴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전장 한복판으로 한 줌의 기병대들을 이끌고 나와 집요하게 머리만 족족 맞추어 죽인단 말인가!
“나 이제 돌아갈ㄹ… ㅇ!”
다행히 그 말을 끝으로 소홀태는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 * *
새벽의 어스름한 빛은 아직도 세상을 비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참상을 완전히 숨기지도 못하였다.
지척에 즐비한 시체와 피비린내가 호합하 전체에 진동하고 있었고, 그 위 시체 가운데에서 소년은 승마를 한 채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일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휘나 궁녀들은 이제 그만 막사로 돌아가서 날이 밝은 뒤 인사를 맞이하라 하였으나 소년은 거절하며 꿋꿋이 그들을 기다렸다.
완안자연과 그를 따라온 장수들은 시체들의 한복판에서 기다리는 세자를 보곤 깜짝 놀라 모두 말에서 내려와 달려오고는 예를 갖추었다.
“갈라전 병마사 완안자연. 태자 전하의 명을 받잡고 왔사옵니다.”
세자가 포위되어 공격을 받고 있을 때만 하여도 뒤를 쳐서 적을 격퇴한 것은 진영에서 큰 치하를 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던 완안자연과 북갈라전의 장수들은 어린 세자가 전장에서 피에 젖은 갑옷을 씻지도 않은 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게도 어린 세자는 피 철갑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직접 싸우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나라의 태자가 어린 나이에 저렇게 나간단 말인가? 그야말로 초의 패왕이나 할법한 행위이거늘….
이라는 생각이 완안자연 및 장수들의 머릿속에 맴돌았으나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자리가 더 이상 단순한 공적을 세웠음에 뿌듯해할 자리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극적인 등장은 반대로 말하면 일국의 세자가 피 철갑이 되도록 기다리게 만든 죄를 범했다는 것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질책이 아닌 치하였다.
“적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 병마사가 왔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참으로 수고하였다.”
“전하. 제때 오지 못한 소장들을 죽여주시옵소서!!”
“하하하. 경들이 적들의 뒤를 치지 않았다면 지긋지긋한 전투는 계속되었을 것이고, 고립무원의 처지인 과인이 어찌 적을 소탕하였겠는가? 모두 작전이 무사히 성공한 것은 병마사의 공이로다.”
“전하께서 전령을 보내 천계(天戒)를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어찌 이 우장이 이곳에 올 수 있었겠사옵니까? 오늘의 공은 모두 태자 전하께서 이룩하신 것이옵니다.”
완안자연은 처음 속빈로의 전리품들을 갈라전에 운송하면서 온 전령으로부터 이 교서를 받았을 때 소름이 돋아야만 했다.
자신이 호합하 하류에 진지를 치고 있으면 동하의 잔적들이나 속빈로의 적들이 포위를 할 것이니 전령을 받자마자 군대를 이끌고 신속히 오라는 내용이었다.
고려의 세자라는 작자가 자신의 목숨을 미끼로 속빈로의 적들을 끌어내겠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무모한… 자력으로 포위를 돌파했으려나?’
세자의 주변에는 수십, 아니, 백이 넘어가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이번 전투에서 전사한 아군 병사들의 시체를 따로 모아 두고 있는 중이었다.
전투가 끝났으니,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그런 주변 시체들과 참상에서는 짙은 혈향이 거기에다가 아직 숨이 끊기지 않은 중상자들이 흘려내는 신음은 새벽의 어스름한 풍경에 의해 귀곡성같이 뭐라 표현하기 힘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때문에 완안자연과 장수들은 이곳이 흡사 괴담에서나 나오는 명계와 이승 사이의 장소와 같은 곳에라도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것 같았다.
그런데 이 어린 세자는 그런 소름 끼치는 광경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안타깝다는 듯 수염 하나 없는 맨들맨들한 턱을 쓰다듬으며 말할 뿐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큰 대어가 들어왔었는데 놓친 것 같구나.”
“예?”
“동하국의 황자 첩가라는 자가 방금까지 여기 있었다고 한다. 병마사는 몰랐는가?”
“화, 황자?! 아, 아직 멀리 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대로 병사들을 보내 추격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곧바로 일어나 지시를 내리려던 완안자연이 었으나 세자의 손짓에 의해 금세 막혔다.
“그만, 이곳은 적지다. 우리보다 적이 지리에 밝고, 자원도 많을 것인데 어찌 경거망동하게 어두운 새벽에 추격을 할수 있겠느냐. 우선 막사에 돌아갈 것이다.”
“소, 소장을 죽여주시옵소서!!”
“되었다. 대어를 놓친 것은 아쉬우나 이것만 하여도 대승이로다.”
“하오나, 전하….”
“병마사.”
세자의 물음에 자연은 흠칫하며 황급히 대답했다.
“예. 전하.”
“이곳에 있는 모든 장정들은 오늘 과인을 지킨다고 지쳐 이만 휴식을 취하려 하는데 경에게 호위를 맡기어도 되겠는가?”
“물론이옵니다. 소장들에게 맡겨주시옵소서.”
더 이상 추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뜻을 이해한 자연은 고개를 숙였다.
* * *
압구무의 사자는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세자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우리 부족은 결코 대방(大邦=고려)에 반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사옵니다. 모두 첩가라는 망국의 잔적이 우리 부족을 부추기고 속여 일어난 일이 옵니다.”
왕식은 사자는 거들떠보지 않고 그의 곁에 묶여 있는 채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유심히 지켜보며 되물었다.
“그 아이냐?”
“그, 렇사옵니다. 이 소녀가 바로 동하국의 광루황녀(光樓皇女)이옵니다. 동하 황자 첩가가 이번 참행에도 대동시킨 것을 저희 추장 압구무는 이번 참상에 연루된 억울함과 대방과의 친교를 위해 바치는 것이옵니다. 부, 부디…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덜덜덜.
사자의 말이 계속될수록 묶여 있던 소녀는 강풍에 흔들리는 사시나무 가지처럼 떨고 있었다.
일국의 황녀라고 불리는 소녀가 동아줄에 묶여 있는 모습은 참으로 딱했으나 그에 대해 따지거나 연민의 말을 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사자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저희 추장께선 첩가에게 속아 태자 전하를 치게 된 죄 죽어 마땅하오나 본의가 아니었으며, 결코 대방에 척을 지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만일 이렇게 무너진다면 첩가 놈만이 기뻐할 것이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거듭 청하셨사옵니다. 전하. 만일 우리 부족을 용서해 주신다면 대대손손 대방에 조공을 바치고, 번으로서의 임무를 잊지 않겠나이다. 또한, 지금 도주한 첩가를 잡기 위해 성심성의를 다할 것이옵니다. 부디, 부디 한 번만 관용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사자의 그런 말에 주위에 늘어선 고려, 여진 장수들은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지랄하고 있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이미 어젯밤 사로잡은 포로들로 인해 친위모극의 기병대가 첩가가 아닌 압구무의 친위대였다, 라는 것을 알게 된 상태였다.
즉, 어젯밤 전투에 압구무의 병력은 정예들도 참가했을 정도로 거든 수준이 아니라 주도층 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러나 왕식은 그런 압구무의 구라보다는 이 동하황녀라는 패로 하여금 앞으로 북방 문제에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이 먼저 들었다.
‘동하 황녀가 손에 들어온 것은 좋은데, 당장 써먹을 데도 없는데….’
하지만 이런 왕식의 고민은 예상도 못 한 소란에 금세 끝이 났다.
웅성웅성.
“밖이 시끄럽구나. 마휘야. 나가서 확인하고 오너라.”
“예.”
잠시후 마휘는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왔다.
“무슨 일이더냐?”
“저, 전하. 그것이….”
마휘는 압구무의 사자와 광루황녀를 번갈아 보더니 왕식의 귓가에 조용히 보고하였다. 보고를 들은 왕식은 갑자기 안면에 냉수에라도 뿌려진 사람마냥 놀라 자리에 일어났다.
“뭐라!”
갑작스러운 왕식의 행동에 주변 이목이 단번에 집중되었으나 왕식은 그런 시선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어, 어찌하면 되겠사옵니까. 전하.”
왕식은 황녀와 사자를 번갈아 보더니 조용히 명했다.
“…우선 데려오너라.”
압구무의 사자는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금 전 나갔다 돌아온 환관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고려 세자의 시선이 뭔가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전했길래… 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막사 안으로 새 인물이 들어왔다.
“서, 선화야!”
막사 안으로 웬 어린 소년이 들어와 황녀를 보며 불렀고, 황녀는 자신을 부른 소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대우 빠야? 아니, 오라버니가 왜 여기에…?”
“너, 너야말로, 아저씨랑 할아버지랑 있어야 할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새로 들어온 인물은 다름 아닌 서경 팔관회에서 투석을 선보이고 내솔부에 참가한 여진 소년 대우였다.
출신에 나이가 어리다 보니 주변의 배려로 첫 순행(이라 쓰고 약탈기)에는 참가 못 하고 갈라전에 있다가 이후 김방경이 계획대로 출병을 할 때 남은 내솔부들과 함께 합류한 대우는 기묘하게도 황녀를 알고 있었고, 동하 황녀 또한 대우를 알고 있다는 듯 반응한 것이다.
둘의 기묘한 상봉과 대화에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둘의 무례를 지적하는 것도 일순 잊었다.
그리고, 잠시 후 대우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고는 선화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그 자리에서 왕식에게 엎드려 울 듯이 호소했다.
“전하! 이 아이는 절대 황녀 같은 게 아닙니다. 선화는 고향의, 모탈출(毛脫出) 아저씨의 딸입니다. 제발 살려주시옵소서!”
울 듯이 아니라 후반 가서는 아예 엉엉 울며 애원하는 대우의 보고에 막사에 있던 장수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압구무의 사자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네가 지금 우리를 기만하려고 했단 말이지?’
라는 시선과 상황에서 압구무의 사자는 당황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변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었다.
사자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었기에 현 상황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보낸 압구무 추장은 분명 저 소녀를 동하황녀라고 불렀고, 심지어 고려군이 이기지만 않았다면 약혼을 그대로 거행해 처로 맞이하였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쉬워하는 자신의 추장의 모습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새파랗게 어린 소년병 하나가 불쑥 들어와 동하황녀가 황녀가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탈모충인지 모탈출인지 하는 사냥군의 딸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단순히 그 소년의 일방적인 말이었다면 헛소리로 일축할 수 있었으나 복장이 뒤집히게도 동하 황녀 또한 저 소년을 보자마자 오빠라고 부르며 아는 척을 하는 게 아닌가?
“저, 전하. 그, 그러니까. 분명 저 소녀는 동하황녀님이 맞고 우리 추장님과 어, 아음….”
졸지에 자신이 고려의 세자와 장수들을 상대로 대사기를 친 것 같은 상황이 되자 사자는 정말 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