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99
99화. 84장 절망(1)
국혼[國婚].
직역하면 나라의 혼인이요. 실제로는 왕실, 황실의 결혼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이다.
즉, 지금 최린이 말한 고려의 국혼을 쓸 수 있는 경우는 사별하여 홀애비가 된 나의 아버지인 고려 왕의 재혼과 아직 어린 내 동생인 안경후 왕창의 결혼. 그리고…
…나의 결혼식이다.
“구, 국혼이라니 과인이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전하께선 왕태자이신 바, 언젠가 종사와 만민의 주인이 되실 분이시옵니다. 이에 성상께서도 종묘사직과 국본을 위해 태자 전하의 국혼이 필히 해야 할 것이라 하시었나이다.”
“아니, 아니, 진정하게. 내 나이가 어려 혼기가 늦은 것도 아니며, 나라도 아직은 어수선한 상황이다. 더욱이 황후 마마께서 훙(薨)하신지도 채 2년도 지나지 않았네. 이러한 시국에 어찌 대례를 행할 수 있단 말인가? 강제로 거행하였다가 세간에서 조정을 어찌 볼지 과인은 그것이 두렵도다.”
“예가 아님을 어찌 황상 폐하와 조정 신료들이라고 모르겠나이까? 하오나 전하께서 방금 하교하신 바대로 나라가 어지럽고 역적들 출몰하는 지금 이 상황이야말로 더욱 국본(國本)을 바로 잡아 혼란스러워하는 민심을 다스리고 황실의 권위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조정 신료들의 뜻이옵니다. 부디 이해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해달라는 말도 아니고, 윤허해달라는 말도 아닌 이해해달라는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조정에서 사자를 보내왔다면 이미 끝난 일이긴 하다.
그리고 원 역사에서도 원종이 홀애비로 산 것도 아닌 데다가 세자인 이상 언젠가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은 제대로 염두는 하고 있었다.
내가 당황스러운 것은 어째서 ‘지금’이냐는 것이다. 이 시대에 결혼은 현대에 비교해서 빠르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너무 빠르다.
내가 알기론 원종이 결혼을 한 것은….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옵니다.”
아니, 정신 차리자.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미 달라진 세계에서 원 역사 기준만을 고집하여 부정하는 게 아니다.
“…조정에서 국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라 한다면 태자 된 몸으로 어찌 거절하겠는가. 헌데 과인이 궁금한 것이 있는데 기거주(간관직의 일종)는 답해줄수 있겠는가?”
“소인이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답해드릴 수 있사옵니다.”
“칙서에는 짐의 비로 점지 된 이가 나오는가?”
“소인이 어찌 칙서를 먼저 볼 수 있겠나이까. 다만, 칙서를 받았을 때 황상께 따로 전교받은 일은 없었사옵니다.”
“그러한가. 그렇다면 경은 점지가 된 이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잘은 모르나 김공의 여식이 내조를 잘하고, 현숙하여 거론되고 있다는 소문은 들은 바 있사옵니다.”
두 번째 질문을 하니 비로써야 최린이 답했다.
그가 말하는 김공은 따로 생각할 것도 없이 김약선일 것이다.
이 시기 김약선은 아직 최우의 딸과 갈등 관계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이건 역사대로인가. 아니, 최산을 토벌한 공도 있고, 내가 경주에서 추켜도 세웠으니 큰 흠은 없으니 딱히 다른 여식을 준비할 이유도 없긴 한가.’
“조정에선 전하의 공을 높이 사 조금이라도 편히 피로를 덜게 하고자 국혼을 치른 뒤 서경에서 분사제도를 부흥시킬 것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이 또한 감축드리옵니다.”
“뭐, 뭐라?!”
화들짝 놀라 내가 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내 등 뒤에서 마중 나온 서경의 대관들의 합창이 들려왔다.
“국혼을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국혼을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태자 전하 천세! 천세! 대천세!””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리에서도 천세와 만세 소리가 들려왔고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서경의 분사 제도는 그들의 숙원, 잃어버린 영광이었을 것이니 기뻐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으나 너무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반응들은….
‘바람잡이를 넣었군.’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 * *
강화도 최우 저택.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태자 전하에 대해 상당히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중방의 여러 신료들도 그렇지만 저나 저하도 태자 전하께선 얼마 안 가 심도로 돌아올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태자 전하는 단번에 백성들에게 이곳 심도를 새로운 수도가 아닌 임시 수도로 인식시켰고, 전하 본인도 조용히 돌아올 것이라는 우리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한 듯 서경으로 나아가 전선에 얼굴을 보여 쉽사리 소환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호위군을 되려 전선에 투입시켜 민심을 끌어모았습니다.
황상께 안무사의 직위를 받은 후에는 순무의 호종을 빌미로 적들을 진압하였고, 반란에 휘말려도 그 지역 방어사나 병마사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보고와 명을 받고 행동하기엔 거리가 멀고 시간을 지체해선 아니 된다는 이유로 번번이 그 지역의 병권을 이용하여 주도하여 또다시 공을 세우셨습니다. 급기야 폐주(희종)와도 만났으니 그 행동은 정도를 넘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만약 태자 전하께서 하신 것이 여기까지였다면, 우리들은 태자 전하가 그저 혈기만 넘치고 세상을 전혀 몰라 그러는 것뿐이라고 단정했겠지요.
아니, 실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론 어떠하였습니까? 태자 전하는 경주에 입성한 후 그곳의 재물을 상국께 맡기었습니다. 죄인 대집성과 김약선 공의 보고에 의하면 그 답과 행동이 다소 미숙하긴 하나 스스로의 행동이 과했다는 것과 재물로 용서를 빌려는 처세를 보였다는 것이지요.
비록 재물을 보냈다는 소식이 오기 전에 이미 북벌의 명이 떨어져 어긋나긴 했으나 북벌의 명이 떨어지기 전에 태자 전하의 사과를 알았다면 상국과 우리들은 태자 전하를 북벌에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습니까? 북벌로 그 명줄이 다하였을 것이라 생각한 태자는 보란 듯이 몽고의 태자와 인연을 맺고 갈라전을 취하고 여진인들을 복속시키었습니다. 이것을 우리 중 감히 누가 예견을 하였겠습니까?
역도 이연년의 난 진압, 귀화인의 영입, 견훤왕의 추숭 문제, 역도 최산의 수급, 상국 저하와 김공의 공을 조정에 보고.
무엇을 보아도 전하는 결코 혈기뿐인 애송이도, 어리숙하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이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나는 태자에게 온건책을 염두에 두되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대척으로 안경후를 염두에 두었다.”
“예. 그리하였지요. 하오나 저하!
태자 전하는 이미 가벼이 볼 수 없을 만큼 성장하셨습니다.
이미 북방에는 여진과 서경 귀족들의 인망을, 나라 안에는 민심을, 국외로는 몽고 태자와도 연결되어 있어 간단히 처리하기도 힘든 입장인 겁니다.
고작 2년, 아니, 2년도 안 된 사이 그 어린 태자가 이렇게 순식간에 큰 것입니다.
그런 태자를 일고의 가치도 없이 제거한다면 그 또한 공백과 진통이 작지 않으며, 대집성의 패단을 겪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출혈과 회복의 고통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본래 예정대로 태자 전하를 심도로 불러낸다?
이 또한 상황이 변하고도 너무 변하여서 힘들겠지요. 갈라전은 북방의 방어가 될 것이고 태자만 보고 있는 서경과 서북면 귀족, 백성들의 민심도 염두에 둬야 하니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태자를 심도로 불러내는 것 또한 우책(愚策)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노모(이 늙은이)는 태자와 영공 저하의 외손녀와 혼약을 맺게 하여 황실과 우봉 가문의 동맹과 화합을 권한 것입니다.
마침 황상께서 두 분의 대립을 원치 않아 하시고, 상국께서 확실히 우위에 있는 지금 태자를 손에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최종준은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한숨 쉬고는 재차 설명했다.
그는 세자가 북벌을 하고 귀환한 이후 줄곧 세자의 존재와 문제가 손톱 사이에 낀 가시처럼 몹시나 거슬리고 있었고 어떻게든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대책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자 전하와 국혼은 이러한 태자 전하와 상국 저하의 관계를 융화, 동화시키고 해소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태자 전하의 몽고 태자와의 인연은 김취려 공이 졸한 지금 대몽고 외교에 매우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척과 제거보단 품고 흡수하는 것이 어딜 보나 이롭습니다. 태자 전하의 뒷배가 되고 그 내부에 영공 저하의 힘과 영향을 침투시켜 장차 태자 전하께서 저하의 힘이 없으면 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 전하와 일심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태자 전하의 예측을 불허하는 행동력과 그 기질입니다. 또한, 국혼을 하였다고 해도 이자겸의 사례가 있사옵니다. 비록 영공 저하께서 그 역신과 같은 역심을 품고 계시진 아니하나 태자비께서 원손을 낳으시기 전까지는, 혹은 태자 전하의 세력의 원천을 흡수하기 전까지는 인종 대왕과 같은 사태가, 아니… 최악 광종 대왕의 재래를 염두에 두고 방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지하는 법이 바로….”
거기까지 말한 최종준은 말을 그만두고 고개를 숙였다.
이다음 내용은 이 자리가 시작되기 전에 질리기 설명한 것이라 설명해 봤자 입만 아팠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최우는 다음 내용을 알고 있어 빙그레 웃으며 혼잣말로 대신 입 밖으로 내주었다.
“끌. 그야말로 분사(分司)의 업(業)인가.”
* * *
교서를 전하고 별실에서 머물고 있던 최린은 세자의 부름에 세자가 묵고 있는 별궁으로 찾아갔다.
그 안으로 들어가 최린은 자신을 기다리던 왕식에게 고개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바둑판 앞에 앉은 왕식도 작게 답례하고 바둑돌을 꺼내 바둑판 위에 올려두었다.
단지 묘한 것이 있었다면 바둑판에는 이미 검은 돌이 5점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내 적적하여 최공과 바둑이나 한번 두려고 불렀네. 받아주겠는가?”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나이까.”
“흑과 백 어느 것을 가질 것인가?”
백은 상급자, 실력이 비슷하거나 처음이라면 연상이 백돌을 사용하고 어린 사람이 흑돌을 집는 것이 바른 법이다.
하물며, 지금 눈앞의 바둑판에는 흑점이 5개나 깔려 있었다. 그러나 최린은 주저 없이 흑을 선택하였다.
“흑을 쥐겠나이다.”
“호오?”
의외라는 듯 표정을 짓는 왕식이었으나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백을 쥐고 있다곤 하나 진심으로 승부에 임해 돌 하나 하나를 필사적으로 두고 있는 것은 왕식이었고, 최린은 묵묵히 왕식의 행마(行馬)를 지켜보는 것으로 대응했다.
“국혼을 치른 뒤 서경에 분사 제도를 재개할 것이라고 하였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을 뿐입니다.”
“경은 눈치가 빠르고 지략이 풍부하지만, 그 이상으로 신중하다고 들었네. 허나 지금 과인이 듣고 싶은 것은 그 추측을 듣고 싶을 뿐이니 부디 말을 아끼지 말아주게.”
“단순한 소견이라도 상관없으시다면, 그리하도록 하겠사옵니다.”
“허면 분사는 어떻게 복원되는 것인가?”
왕식은 싸늘한 눈빛을 보내며 최린에게 물었다. ‘언제’가 아닌 ‘어떻게’라는 왕식의 질문이 의외였던 것일까.
바둑돌을 쥔 최린의 손이 잠시 멈추었으나 이내 원래대로 둘 곳으로 움직였다.
“나라가 어지럽고, 북방의 문제가 시급하니 최대한 많은 권위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못하여도 예종 대제 치세로 복권을 하되, 태자 전하께서 국정을 운영하시는 만큼 추가적인 조치도 취해야겠지요.”
점잖게 말하며 두는 수에 왕식은 백돌을 쥐어 사혈을 뚫기 위해 놓았다.
“그 추가적인 조치라는 것은 대간(臺諫)들인가.”
“…….”
“왜 그렇게 침묵하는가? 그대의 추측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도록 하라! 틀려도 좋다.”
왕식의 질책 같은 물음에도 최린은 침묵한 채 담담한 표정으로 바둑을 두었다.
왕식이 집을 만들려고 하나 최린의 두터운 방어를 뚫지 못하고, 견제도 막지 못해 어찌해도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결국 왕식은 잡은 돌을 다시 집어넣었다.
“결국 패했나.”
“시작하기에 앞서 명백했으니 말입니다.”
“백돌은 질 운명이었던가.”
“전하의 바둑은 참으로 강렬하옵니다. 허나,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 : 하늘의 때를 얻는다 하더라도 지형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기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강맹한 대군이라 할지라도 지리의 우점을 쥔 상대를 이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법입니다. 하물며 상대의 군세가 대군이고 방심을 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힘든 법이지요.”
“…그런가. 칙서를 들고 오느라 피로하였을 것인데 과인의 바둑 상대까지 되어 수고하였네. 이만 돌아가서 쉬게.”
“전하께서도 순행 후 많은 피로가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부디 옥체를 귀중히 여겨주시옵소서.”
“후. 대간이 아니랄까 봐, 벌써 걱정해주는 것인가? 알겠네.”
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고, 홀로 남은 왕식은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답이 없다. 이 말인가.”
영락없는 패배다. 왕식은 그날 처음으로 자신이 완패하였음을 인정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