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auff RAW novel - chapter 352
‘젠장할……’
보디세아는 지켜보고 있는 영주의 옆에서 시중을 들어 주고 있었다. 그녀가 아니라는 것이 정말로 다행이라 싶었다. 자신을 향해서 돌진해 들어오고 방어하고 있는 가운데 검은 피부의 여자가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에 실리는 힘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움직임이 모두 보였던 것이다.
‘최대한 안으로 파고들어라……’
검투사에게는 그것이 기본이었다. 상대의 간격 안으로 들어가서 공격하는 것이다. 지금 검은 여자는 전력을 다하는 공격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막고 넘기고 피하고 있으면서 여러 번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지만 레나는 그것을 모두 넘길수 있었다.
“이얍!”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한번 내질러 기합을 질러 검은 든 오른 손을 내질러 보았다. 그리고 잠시도 안 되어서 상대의 가슴에 자신의 검이 박힌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마치 통나무 쓰러지듯이 쓰러졌다.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볼 수밖에 없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부여잡은 가슴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마치 바람 빠지듯이 숨소리를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쉰 소리가 계속해서 나고 있었고 검을 잡고 있는 레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피를 뒤집어쓰고 난 다음 공용 목욕탕에서 몸을 씻었다. 오른손으로 상대의 가슴을 찔렀을 때 그 느낌을 아직까지 지울수 없었다. 차가운 물로 몸을 계속해서 씻고 있었다. 그리고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 뒤쪽에서 게로가 서 있었다.
“게로……”
그도 목욕을 하러 온 것 때문인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서 있었다. 금발의 건장한 체격의 게로는 표정이 어두웠다.
“왜 그래?”
레나의 물음에 게로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내일 시합에 나가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게로에게는 이런 생활 자체가 견딜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레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보디세아와 함께 밤에는 영주에게 불려가고 낮에는 검투사 노예로서 이곳에 갇혀 있었다.
“오늘 시합에 나갔었지?”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살인이라……오른손의 느낌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아……”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들었을 때 어느 사이 게로가 가까이에 와 있었다. 레나는 팔을 뻗어 게로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따뜻한 느낌이 아주 좋았다.
“레나……”
살며시 자신의 어께에 손이 얹어 졌고 허리 숙여 키스해 올 때 야릇한 흥분 같은 것을 느낄수 있었다.
공용 목욕탕 구석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몸을 누였다. 게로는 부드럽게 레나를 대해 주었다. 레나에게 남자를 알게 된 것은 영주의 방에서 강압적으로 당했을 뿐이었다. 같은 동작으로 자신을 감싸주고 몸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고 있었다. 같은 동작이었지만 느낌이 전혀 달랐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렇지만 게로가 먼저 알아차리고 입을 막아 주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둘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서로 살을 맞대고 있었다.
한참 만에 일을 마친 두 사람은 구석에 등을 기대앉아 있었다. 레나는 조금 우습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처녀로서 이런 자리가 아닌 서로 다르게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라고 한다면 모두 밤에 어머니를 찾아오던 마을 남자들을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만 가본께……의심 사겠다.”
레나는 조급하다는 생각을 했고 엷게 웃어 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상하리 만큼 기분이 짜릿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니 보디세아가 영주의 방에 들어갔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갇혀 있던 다른 여자 검투사가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들어 온지 얼마 안 된 친구였기 때문에 보디세아가 영주의 방에 갔다 나오는 것을 보고 울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이거 참 낮에는 노예고 밤에는 창녀인가? 좋겠다. 그래……”
순간 조용히 걸어 들어오던 보디세아가 화를 벌컥 내면서
“개 같은 년! 혓바닥을 잘라 버리겠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주변에서 달려들어 보디세아를 방에 밀어 넣었다.
레나도 옆에 있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한참 동안이나 부스럭거리던 보디세아가 먼저 말을 건넸다.
“레나 오늘 잘 했다.”
“아? 응……”
어딘지 모르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참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보디세아는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고 남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너……”
“아참 내일 남자들 검투사 시합 때 너하고 내가 시중들라더라……미리 말해 두는 거 야……”
“응……”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레나는 방문 앞에 등을 기대앉았다.
“보디세아……”
“왜?”
“너 가족들 있니?”
“왜 물어?”
퉁명스럽게 반문했지만 거부하는 듯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엄마하고 여동생이 있어……노예 시장에서 헤어졌어……지금 어떻게 됐나 아무도 몰 라……”
잊어버리려고 했던 가족들이 다시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아니 지금 살아 만이라도 있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것 때문에 지금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죽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처음부터 노예였어?”
“응? 아니……피츌레족이었나? 그 사람들한테 마을이……”
불타오르는 마을을 눈앞에 떠올렸다. 몸이 가늘게 떨렸다. 너무나도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던 마을이었다. 적어도 그러했다.
“애석하다……우리가 조금이라도 힘이 있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참 너는 어느 행성계 출신이야?”
평소와는 다르게 말을 많이 했다.
“글쎄 잘 몰라 그런 게 무엇인지……다른 것은 필요 없어 가족들을 다시 만나 봤으면 해……”
“글쎄……나는 모르겠다. 엄연하게 살아 있고 어디에 살았는지도 아는데……”
보디세아는 엷게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버지는 귀족이셨어……원 참……처음에 노예가 되었을 때 그 노예상인의 말이 참 우습더라……애비가 얼마나 못났으면 딸자식들이 이렇게 노예가 되었냐고……”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잠시 말을 끊었다가 대답해 주었다.
“아……에이센인 들한테……군대를 이끌고 나서셨는데……전사하셨어……”
가슴 아픈 일일 것이다.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서로 어차피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이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조금 깊게 한숨을 내쉰 다음 피곤하니 자야겠다고 했고 레나는 잘 자라고 했다.
“응……”
서로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레나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곳에서 살아 나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고 있었다.
발바이스제국력 10년 가로스레(10월) 16일 정오 알리샤 레나는 보디세아와 함께 검투 경기장의 특별석에서 영주와 영주의 손님들의 접대와 시중을 하고 있었다. 영주의 주위로 많은 수의 거만한 얼굴을 한 유력한 자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앉은 자리에서 술과 과일을 먹고 있었는데, 저녁 무렵에는 큰 연회도 열릴 것이라고 했다. 이때에도 레나와 보디세아는 다시금 이들의 접대에 나서기로 되어 있었다.
영주의 옆에 앉은 사람들 모두 이 행성의 부호들이라고 했다. 젊은 남자도 있었고 뚱뚱한 남자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고 아리따운 여성들을 옆에 데리고 있었다. 그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커다란 웃음을 지으면서 아가씨들의 가녀린 몸을 연신 탐하고 있었다. 이들 사이를 레나와 보디세아가 돌아다니면서 잔을 채워주고 부족한 과일 같은 것을 날라 주고 있었다.
이들이 연회를 벌이는 좌우로는 경호를 위한 건장한 군인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고 그 좌우의 넓은 원형 경기장의 일반석에는 수많은 주민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모두들 자신들의 아래쪽 모래밭에서 펼쳐질 검투 경기를 기다리며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런 노예들의 검투 경기는 이 행성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빈번하게 행해지고 있는 영주들이 주민들에게 베푸는 최고의 오락거리였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주민들은 검투사들이 서로 피를 튀기며 원시적인 칼과 망치, 도끼 같은 것을 가지고 서로 온갖 기술을 사용해서 죽고 죽이는 것을 보며 환성을 지르며 즐기고 있었다.
“와아아!!”
레나가 영주의 옆에 선 키가 큰 부관의 야릇한 시선을 피해 내면서 조심스럽게 영주의 비어 있는 잔을 채워 주었다. 잔을 채우고 난 뒤 부관의 눈길을 피해 조금 구석진 곳으로 이동한 그녀는 조금 고개를 돌려 경기장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남자 검투사들을 지켜보았다.
약 20명의 검투사들이 줄을 지어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 모두 원시적인 칼과 방패, 도끼, 창 같은 것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상반신을 완전히 드러낸 사람도 있었고 가죽 갑옷으로 몸을 가린 사람들도 있었다. 개중에서는 강철투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도 있었다.
검투 경기에 나서 보았던 레나는 저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그 검투사들 중에서 게로가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반드시 살아남기를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바랬다. 레나가 게로와 종종 공용 목욕장에서 만나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이 영주의 귀에 들어간다면 자신은 물론 게로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살기 위해 영주에게 몸을 바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반드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하고, 헤어진 엄마와 에인샤도 찾아야 했다. 레나는 마음속으로 굳은 결의를 다지면서 잔을 내미는 부호들이 짜증 부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처럼 보이려 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지금 입장하고 있는 검투사들에게 환호성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최고의 검투사는 저런 건장한 사내들이 아닌 자신과 함께 이일을 하고 있는 보디세아였다. 그녀는 이제까지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자신 보다 몇 배나 큰 체구의 사내들도 날렵하게 움직이며 베어 버리는 실력자였다. 어디에서건 보디세아는 묵묵히 자신의 임무에 충실히 했다. 한번이라도 패하면 죽게 되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움직임 모두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보디세아는 그런 목숨을 거는 검투를 워낙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들을 많이 연출해 냈기 때문에 최고의 검투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레나도 보디세아와는 결코 싸우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거의 친구를 사귀지 않고 있던 보디세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도 보디세아와 함께 영주의 침실에 같이 들어갈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비록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런 기회를 통해 어느 정도 그녀와 친해질 수 있었다. 적어도 영주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질려 하지 않는 이상은 같이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술병을 들고 있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레나는 순간 실수로 자리에 앉아 있던 40대 중반의 금발 머리 중년 남자의 어깨에 부딪쳤다. 있어서는 안 되는 실수였기 때문에 레나는 황급히 사죄했다.
” 죄송합니다. 미천한 제가 그만 무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아······부딪치지 않게 조심해!”
그 남자는 빙긋 웃으며 기분 좋게 받아 넘겨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순간 아찔했던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남자 검투사들이 모두 영주의 앞에 모여 들어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어 보였다.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검투사들 모두 입을 모아 각자의 다짐을 영주의 앞에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곧바로 서로 물러섰다. 곧바로 검투 경기가 진행되려 하고 있었다.
긴장의 순간. 잠시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레나는 마음속으로 게로가 살아남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기원했다.
긴 나팔소리와 함께 시작 신호가 울리고 검투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싸움을 시작했다. 게로를 비롯한 많은 검투사들이 맞붙어 격렬한 싸움을 벌었다.
강철과 근육이 맞부딪치고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검투사 경기라는 것은 너무 일찍 끝나도 좋지 않고 너무 늦게 끝나도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난투전이 되어 버린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빠르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런 때 보디세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약한 녀석부터 노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코 한 자리에 멈추어 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상대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체구가 작고 힘이 남자에 비해서 떨어지는 여자인 자신들이 거구의 남자를 상대할 때는 그 남자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동작의 틈을 노려야 한다고 했다. 레나는 그것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동작의 틈······’
게로는 나름대로 실력이 꽤 뛰어난 것 같았다. 사실 레나는 그가 검투 경기를 벌이는 것을 처음 보았다. 레나는 게로가 젊고 건강하고 실력이 뛰어나니 저런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남자들이 슬며시 레나의 엉덩이나 허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영주의 옆에서 묵묵히 서 있던 부관도 그녀에게 잔을 받아 들면서 다른 손으로는 레나의 엉덩이를 손으로 슬쩍 건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것에 익숙한 듯 살짝 눈웃음을 치면서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 주면서 남자 검투사들이 경기를 곁눈질로 지켜보았다. 게로의 뒤로 거구의 사내가 덤벼들었는데 게로는 어느새 그 남자를 받아 냅다 업어 쳐 버렸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서 있는 사이 뒤쪽에서 날이 양쪽으로 갈라진 창을 든 남자가 달려 들어와 게로의 허벅지를 냅다 찔러 버렸다. 레나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하지만 게로가 몸을 일으키면서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그 상대의 목을 쳐 버리는 것에 안도했다.
5 분여의 난투가 끝나고 결국 살아남은 사람은 은색의 투구를 쓴 검은색 가죽 갑옷을 입은 남자와 게로 두 명 이였다. 멀리에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은색 투구를 쓴 남자는 검은 색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왼손에는 손도끼와 오른손에는 무슨 기다란 채찍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레나는 저런 채찍같이 길이가 긴 무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상대도 많은 검투사들을 해치운 장본인이었다. 게로는 허벅지에 상처를 입고 있어 다리를 절고 있었다.
서로 잠시 노려보고 있다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것도 없이 게로의 오른쪽 팔에 채찍이 감겨 버리고 번개같이 달려든 남자는 곧바로 왼손에 들고 있던 손도끼로 게로의 목덜미를 찍어 버렸다. 게로는 잠시 그대로 서 있더니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까악!”
그 장면에 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순간 경기를 관전하고 있던 영주는 불쾌한 표정으로 힐끗 뒤돌아보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들어 레나의 얼굴에 끼얹었다. 레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면서 연신 영주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놀라 아무 정신이 없었다.
그때 은색 투구의 남자는 승리했다는 자만심에 굳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있는 게로에 등을 보이고는 양팔을 높이 치켜들어 올렸다. 관중들의 환호성을 자신에게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도 죽어버린 것 같았던 게로가 순간적으로 팔을 앞으로 내질러 그 검투사의 등을 찔러 버리자 들었던 팔을 그대로 멈춰버렸다.
마지막 승리자에게 환호성을 지르던 사람들도, 승리했다는 자신감에 휩싸여 있던 은색 투구를 쓰고 있던 검투사도, 그 한순간 마치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두 사람이 거목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한껏 올라 있던 분위기는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이 순간 크게 부아가 치민 영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호페를 불러댔다. 저렇게 되어 버리면 애써 준비한 검투 경기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호페!!!!”
영주는 검투사들을 훈련시키는 호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레나를 비롯한 보디세아도 그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야유와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대충 정리를 하고 레나와 보디세아는 잠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보디세아는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있는 레나에게 왜 소리를 질렀냐고 한소리 했다.
“조심해······영주님이 화내시면 꽤 무섭다.”
그녀의 걱정에 레나는 미안하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곧바로 영주의 부관이 들어와 보디세아를 불렀다.
그녀가 나가고 레나는 잠시 대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게로가 그렇게 죽어 버렸다. 레나는 아직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그렇게 죽어 버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도······’
게로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갑자기 자신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버리자 갑자기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녀는 양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무릎에 묻고는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시간에 영주관에서는 다시금 연회가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서는 정오에 있던 검투사 경기가 끝나고 영주의 부관에게 불려갔던 보디세아는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레나와 머리를 짧게 깎은 검투사인 넬라를 비롯하여 몇몇의 다른 여자 노예들이 연회장 한쪽에서 나누어 주는 과일과 술병을 들고 연회장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열심히 술을 따르고 과일 같은 것들을 날라 주고 있었다. 낮에 있던 검투경기에서 게로가 죽어버려 무척 슬퍼했던 레나 이었지만, 만약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그녀는 울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넓은 연회장 안에는 푹신한 시트와 붉은색 천이 깔려 있었고, 시트위에 참석자들이 앉아 붉은색 천위에 놓여지는 과일과 술을 먹으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대부분이 옆에 젊고 아리따운 여자들을 한 둘씩 데리고 있었다.
연회장 가운데 마련된 둥그런 작은 무 대위에는 반라의 무희가 야릇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연회에서 참석자들의 시중을 들어 주도록 되어 있던 레나를 비롯한 여자노예들도 모두 안에 입고 있는 속옷을 벗고 그 위에 허리에서부터 반투명의 흰색 천만을 슬쩍 감싸 허벅지 위로 살짝 가리고, 목에서부터 똑같이 흰색 천을 한번 둘러 가슴과 등을 살짝 덮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살짝 몸 위를 덮고 있는 얇은 옷차림 때문에 허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숙일 때마다 가슴이나 엉덩이 아래 부분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처음에는 남들 앞에서 이런 차림을 하고 있기 매우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익숙해 졌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귀족들은 시중 들어주는 여자들의 손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살며시 덮여 있는 천조각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등 여자노예들의 엉덩이나 가슴을 더듬기도 했다.
레나는 그런 사람들의 손길을 모른 척 하면서 슬쩍슬쩍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주고 과일들을 날라 주었다.
연회가 한창 열이 올라 있을 때 영주의 옆으로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살집이 좀 풍부한 귀족이 다가와 뭐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정오의 검투 경기장에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괜찮다고 말을 해 주었던 그래도 착실해 보이는 귀족이 앉아 있었다. 거리가 좀 있고 상당히 시끄럽다보니 무어라 하는지는 자세히 들을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심각한 말들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연회에 참석한 자들 대부분 여자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연회장 속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그들 중에서는 여자가 자신의 머리를 남자의 아랫도리에 파묻고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자신의 아래쪽에서 봉사해 주는 여자를 흡족하게 내려 보고 있던 한 뚱뚱한 남자가 자신의 빈 잔을 레나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살며시 웃으며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 주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술병의 술이 떨어지자 레나는 조심스럽게 연회장의 구석으로 가 과일이 가득 담겨있는 쟁반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부족한 것들을 내려 주고 있었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영주는 40대 중반의 남자와 말을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조금 전 영주와 말을 나누던 30대 중반의 남자의 앞에 과일들을 내려놓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을 때 그 남자가 헤헤 웃으며 손목을 잡아 당겼다.
“아?”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그 남자는 레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안으려고 했다.
“놓으세요!”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겨우 이런 상황을 피해 왔지만 갑자기 이렇게 덥석 잡혀 버리니 순간 너무 당혹스러웠다. 남자가 자신을 끌어당기려 하자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그 남자의 얼굴에 엎어 버렸다. 그순간 레나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당황하기도 전에 왼쪽 뺨에서 불이 번쩍했다.
그 남자가 레나의 뺨을 후려쳐 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세게 얻어맞았기 때문에 그녀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