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00
교랑의경 100화
그러던 자신이 눈 깜짝할 새에 진소 상공 댁 대문을 넘었다. 게다가 진씨 가문 안주인, 다시 말해 고명 부인이 직접 나와 맞이하기까지. 서무수는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쳐다봤다.
등불 아래에 있는 정교랑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았다. 처음 만난 때부터 지금까지 늘 변함이 없었다. 세상사는 전혀 모른다는 듯한 표정. 기쁠 일도, 슬플 일도, 노여워할 일도, 원망할 일도 없다는 듯이.
범강림이 나서서 건배를 제안하면서 떠들썩한 연회가 시작됐다. 정교랑이 자리하긴 했지만 사내들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술 몇 잔을 걸친 터라 스스럼없이 웃고 떠드는 분위기가 됐다.
음식은 얼마 먹지도 못했으면서 술을 비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결국 시녀는 술을 아예 단지째 들고 왔고, 술을 못 마시게 했던 금가아도 분위기에 섞여 몇 잔 들이켰다.
“세상에, 이렇게 성대하게 차려놓고 새해를 맞이할 날이 오다니.”
서봉추는 술잔을 들고 불콰해진 얼굴로 취한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이어 고개를 젖혀 가며 술을 들이켰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술보다 몸에 흘린 술이 더 많았다.
“그러게, 몇 달 전만 해도 쫓기는 목숨이었잖아. 망할 관군들한테 붙잡혀 감방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이 오다니. 경성에서 술을 다 퍼마시고.”
다른 형제도 서봉추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동조했다. 그 말에 서무수가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맞은편의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아무 말도 못 들은 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문밖을 보고 있었다.
서무수가 그만하라고 소리치려던 걸 간신히 삼키는데, 쨍그랑하는 소리가 났다. 취한 서봉추가 곯아떨어지면서 술잔을 떨어뜨린 소리였다. 다른 형제들을 보니 대부분 만취해 있거나 누워 있었다. 탁자에 기댄 채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했다. 금가아마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누이한테 웃음거리가 됐네.”
서무수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서무수를 쳐다봤다.
“기분 좋아요. 웃음거리 보여 줘서.”
멈칫하던 서무수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서무수가 정교랑을 향해 술잔을 들었다. 정교랑은 앞에 있던 물잔을 들었고, 두 사람은 각자 잔을 비웠다.
시녀는 방 안에 있는 화로에 숯을 더 넣고 밖에 나가 아궁이를 살폈다. 방 안은 따뜻했다. 술에 취해 잠든 사내들은 한기를 느끼기는커녕 잠꼬대를 하며 옷을 풀어헤치기도 했다.
“늦었는데 누이도 이만 가서 쉬어.”
서무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믐이니 밤을 새워야죠. 안 자요.”
“그럼 날이 추우니 누이도 술 한 잔 마시지.”
서무수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 술은, 맛없어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는 웃으며 혼자 마셨다.
“술이 맛없다는 거야? 아니면 이 술이 맛없다는 거야?”
서무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 술이요.”
정교랑이 서무수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맛없어요.”
서무수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격부를 하며 노래까지 부르던 누이가 어찌 술을 못 마시나 했네.”
웃음소리와 함께 밖에서 이따금 들리던 폭죽 소리가 점점 커졌다. 사내들도 잠에서 깨 몽롱한 채로 밖을 쳐다봤다.
“새해다, 새해. 폭죽 터뜨리러 갑시다, 어서요.”
서봉추는 소리치며 비틀비틀 뛰어나갔고, 잠에서 깬 나머지 사내들도 웃으며 따라 나갔다.
마당에 피운 모닥불에 대나무를 하나씩 던지자 폭죽 소리를 내며 터졌다. 시녀는 귀를 틀어막고 웃으며 정교랑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반근, 누이한테 두봉 갖다 줘. 바람이 차네.”
서무수가 말했다. 시녀는 혀를 날름거리고는 얼른 안에 들어가 두봉을 가져다 정교랑에게 걸쳐 주었다.
“반근 누나, 누나도 하나 태우면서 복 받아.”
금가아가 대나무를 들고 소리쳤다. 시녀도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웃으며 치마를 들고 다가갔다. 회랑 아래엔 서무수와 정교랑만 남아 나란히 서 있었다.
“오라버니도 가서 놀아요.”
“난 글공부를 했잖아. 이런 거 안 해.”
서무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교랑은 또다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 참.”
서무수가 무언가 떠오른 듯 소매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건넸다.
“새해잖아. 가진 것 중에 딱히 좋은 게 없네. 누이한테 주는 새해 선물이야. 약소하지만 받아 줘.”
나한테 주는, 새해 선물? 정교랑은 서무수의 손을 잠시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받았다. 모닥불과 등롱에 비춰 보니 은으로 만든 빗이었는데, 오래되고 소박한 양식이었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건데, 난 갖고 있어도 쓸 데가 없네.”
서무수가 어색해하며 말하다가 웃음을 지었다.
“아니, 말을 잘못했어. 선물은 진심을 전하는 거라고 하지. 이건 내가 가진 물건 중에 가장 귀중한 거야. 누이가 받아 줬으면 해.”
정교랑은 빗을 들어 머리에 꽂더니 고개를 들어 서무수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마당에서는 연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고, 이웃집과 거리에서 나는 폭죽 소리도 함께 어우러졌다. 어느덧 동녘이 밝아오며 새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날이 밝을 무렵, 황궁에서 황제를 알현한 이들이 줄지어 나왔다. 예복을 갖춰 입은 이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다가 궁문 밖 길가로 나온 후에야 긴 한숨을 토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궁문 밖에서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며 반갑게 웃고 떠들었다. 모처럼 찾아온 명절 휴가에 술 약속을 잡기도 했다.
진소의 부인도 인파에 섞여 있었다. 며느리를 대동하고 온 다른 집 부인들과 달리 어린 몸종 하나만 데려온 진 부인은 쓸쓸해 보였다.
“경사네요.”
고명 부인의 예복을 차려입은 동 부인이 진 부인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밝은 표정이었다. 점잖은 진 부인도 그 말에 기쁜 표정을 드러냈다. 진 부인의 맏며느리는 회임을 하여 함께 입궐하지 못한 터였다.
진소의 집안은 손이 귀했다. 진소의 형제는 본디 넷이었지만 첫째와 둘째가 연이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진소와 진 사노야만 남게 됐다. 진소는 혼례가 늦기도 했거니와 여기저기 부임지를 전전하느라 나이가 꽤 찬 후에야 아들을 보고 첩실을 셋 들여 간신히 삼남 사녀를 두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맏아들의 부인과 시첩이 동시에 회임하고 진 노태야의 중병도 완치됐으니 실로 집안의 경사였다.
하지만 경사는 어디까지나 집안 식구들끼리의 일이고, 남들이 알면 시기를 살 만한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 밖에는 소문내지 않고 가까운 이들에게만 알린 터였다.
“듣자니 이 태의가 그 댁 며느리를 살피고 있다면서요.”
동 부인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의 태의잖아요. 그분을 모셔 온 건 잘한 일이에요.”
동 부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안 군왕을 집으로 모셔 올 수 있으면, 아마 진 부인도…….”
얼굴이 붉어진 진 부인은 동 부인을 살짝 밀어냈다.
“동 언니, 점점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네요.”
동 부인은 입을 가리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별안간 앞쪽이 조용해졌다. 진 부인과 동 부인도 이야기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앞쪽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던 어린 낭자를 본 두 여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엄숙하고 경건한 겨울 황궁이었건만 낭자의 예복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낭자는 짙은 청색의 두봉을 걸치고 커다란 두모를 쓴 모습이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두봉이 휘날리면서 안에 입은 암청색 옷자락이 드러났다. 금실로 수를 놓고 비단으로 허리를 동여맨 후 긴 옷소매를 앞으로 엇갈리게 두자 흡사 물 위로 떨어지는 먹물처럼 색이 번져 나가는 듯했다.
낭자가 걸어오자 다른 여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저쪽의 사내들도 저도 모르게 힐끔거렸다. 뉘 집 낭자가 저리 단정하면서도 우아하고 선녀처럼 아름다울까.
“어머니.”
진 부인을 본 낭자는 소리쳐 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낭자는 손을 뻗어 진 부인을 부축하고 살짝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반쯤 드러냈다.
“십팔랑.”
그제야 자신의 딸을 알아본 진 부인이 깜짝 놀랐다.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길?”
“숙모님과 언니들이 마음이 안 놓인다며 저더러 마중을 나가래요.”
진십팔랑이 손난로를 건네주며 이미 식어 버린 진 부인의 손난로를 받았다. 밤새 잠도 못 자고 찬바람을 맞으며 한나절을 서 있었던 진 부인은 따뜻한 난로가 손에 들어오자 따스함과 안도를 느꼈다.
“그래.”
진 부인은 사랑이 지극한 눈길로 딸을 쳐다봤다.
“세상에, 십팔랑. 며칠 못 본 사이에 또 이렇게 컸구나.”
동 부인이 진 부인의 손을 놓고 진십팔랑의 손을 잡으며 위아래를 꼼꼼히 훑었다.
“장화를 신어서 그래요.”
진십팔랑이 웃으며 대답했다. 동 부인은 웃으며 진십팔랑을 처음 본 것처럼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래도 많이 컸지, 이제 열네 살인데.”
동 부인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어서 마차에 오르죠. 날도 추운데.”
진 부인은 동 부인이 그만 쳐다보도록 웃으며 말을 건넸다. 두 부인이 앞에서 걸어가고 진십팔랑은 몇 걸음 뒤에서 걸었다. 오가는 인파 속에서 마차에 도착할 때까지 수많은 시선이 진십팔랑에게 집중됐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진씨 가문 여식이라고?”
“나이가 꽤 찼네.”
마차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며느리와 여종들, 몸종들이 줄줄이 나왔다. 진 부인은 옷을 갈아입고 탕을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십팔랑, 그 옷은 누가 지은 거야?”
식사를 하던 진 부인이 함께 모여 웃고 떠들던 딸들을 보며 물었다. 두봉을 벗고 겉옷만 입은 진십팔랑이 웃으며 일어났다.
“제가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어머니, 예뻐 보여요?”
꽃처럼 싱그러운 나이의 풋풋한 소녀가 점잖은 색의 옷을 입으니 그것대로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정초에 입기엔 좀 수수하구나.”
그러면서도 진 부인은 웃기만 할 뿐 나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십팔랑, 이거 정 언니 옷 따라 만든 거잖아!”
여종을 따라 들어오던 단랑이 옷을 보더니 대번에 외쳤다. 그 말에 다들 퍼뜩 깨달았다.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는데 의문이 풀린 것이다.
“십팔랑,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만 해 입었네.”
“빨리 말해. 한 벌만 지은 거야? 아니면 여러 벌?”
낭자들이 십팔랑을 에워싸고 조잘조잘 떠들면서 방 안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진단랑도 그 사이에서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시끄러운 진씨 저택과 달리 옥대교 근처 정교랑의 저택은 조용했다. 부모 형제가 없다 보니 세배를 하거나 고향을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날이 밝을 무렵 제사를 지낸 후 정교랑과 서무수 등은 각자 쉬러 갔고,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오후였다.
서무수 등은 몸을 씻고 면도를 한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대문을 열어 두었다. 몇몇은 마당에서 웃고 떠들고 몇몇은 대문 밖으로 나가 거리 풍경을 봤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정교랑과 시녀가 나오고 있었다. 둘 역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마당에 있던 사내들은 순간 넋을 잃었다.
“누이, 새 옷 입으니까 못 알아보겠어!”
서봉추가 가장 먼저 소리쳤다. 그 말에 대문 밖에 나가 있던 사내들까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정교랑은 새하얀 비단 치마에 붉고 긴 저고리를 입었는데, 소맷부리와 치맛자락엔 커다란 금빛 자수가 있었다. 언제나 길게 내려뜨리고 있던 머리는 낮게 틀어 올리고, 붉은 비녀 대신 작은 은빗을 꽂았다. 은빗을 쳐다보던 서무수가 시선을 거뒀다.
“역시 나이가 어리니 이렇게 입는 게 더 예쁘네!”
서봉추도 옆에서 거들었다.
“이게 좋아, 이게. 매일 점잖은 거만 입으니까 차가워 보이잖아. 어쩔 땐 좀 무섭다니까.”
범강림이 눈을 부라렸다.
“말을 할 줄 모르면 입 다물고 있어. 누이는 어떻게 입든 다 예쁘니까.”
시녀는 빙그레 웃으며 정교랑의 옷을 쳐다봤다.
“진 부인이 보내 준 새 옷이에요.”
시녀가 서무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가져오신 셋째 도련님께 감사드려요.”
서무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웃기만 했다. 정교랑은 벌써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녀가 식사를 가져왔다. 서무수는 잠시 머뭇거리며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셋째 오라버니.”
정교랑이 부르는 소리에 서무수가 얼른 돌아섰다.
“다들 식사는 했어요?”
“먹었어, 먹었어.”
정교랑의 물음에 서무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오라버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요.”
서무수가 눈빛을 반짝이며 안에 단정히 앉은 여인을 쳐다봤다. 여느 때와 다른 차림새지만 화려한 옷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여전히 그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어두운 옷을 입지 않아도 그 위엄엔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