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10
교랑의경 110화
경성으로 돌아온 서무수 등 세 사람은 빌렸던 말을 돌려줬다. 전부 어두운 표정이었다. 범강림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쓸모도 없지. 8천 관이라고 해 놓고 9천 관에 샀으니, 누이 얼굴을 어찌 보나.”
“우리 빌리러 갑시다.”
서무수가 돌연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향칠한테요.”
범랑김의 물음에 서무수가 대답했다.
“그 짠돌이한테 무슨요!”
서봉추가 소리쳤다.
“빌어 보기라도 해야지. 급하다는데 안 도와줄 사람은 아냐.”
“안 돼. 가더라도 내가 가. 자네가 갔다간 괜히 수모만 당해.”
그런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안에서 금가아가 뛰어나왔다.
“도련님들, 오셨네요. 반근 누나가 한참 기다렸어요.”
예전 같았으면 그 말에 바로 뛰어 들어갔겠지만, 오늘은 세 사람 다 걸음을 멈췄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련님. 아씨께서 저더러…….”
시녀가 안에서 웃으며 나왔다.
“반근, 누이한테 전해 줘. 우리가, 제대로 못 했다고.”
범강림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시녀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안 팔겠대요?”
“아니, 갑자기 값을 올리잖아. 아씨가 급하다고 하셨으니 지체할 수도 없고. 결국 돈이 더 들었어.”
“아씨가 급하다고 하신 게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협상을 제대로 못 했어.”
범강림과 서무수의 말에 시녀가 웃음을 지었다.
“난 또 뭐라고. 돈 좀 더 쓴 거잖아요. 아씨는 예상하고 계셨어요. 저쪽에서 돈을 많이 달라고 할수록 좋다고도 하신걸요.”
돈을 많이 달라고 할수록 좋다? 무슨 논리야?
“아씨 말씀이 손해 보는 게 곧 복이래요.”
시녀는 웃으며 비전을 꺼내 내밀었다.
“1만 관이에요. 충분하죠?”
1만! 서무수 등 세 사람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데 이게 돈이야?”
서봉추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종이를 살폈다.
“이건 비전이에요. 1만 관을 어떻게 옮기겠어요. 이건 복주 진주원 비전이니까 이걸 가져가면 저쪽에서 알아볼 거예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경성엔 참 별것이 다 있네. 서봉추는 더 묻지 않고 서무수가 비전을 받아드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다.
“아씨는 정말 돈도 많으시네.”
서무수가 중얼거렸다. 1만 관이라니. 벌써 마차에 오른 시녀는 그 말에 또 웃음을 지었다.
“아씨는 돈이 없으세요. 돈이 필요할 때 주겠다는 사람이 있을 뿐이죠. 나머지는 도련님들이 알아서 해 주세요. 너무 고민하실 거 없어요.”
서무수 등은 고개를 끄덕이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마차를 쳐다봤다.
시녀가 마당으로 들어설 무렵,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기다리다 지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날이 밝으면 데려가도 된다고 했잖아? 왜 안에선 아무 움직임도 없는 거야?”
동 부인이 울다시피 하며 소리쳤다.
“어서 들어가 보죠.”
밤을 새운 터라 쓰러지기 직전인 주 부인도 소리쳤다.
“잠깐만요.”
동 부인 곁에 있던 첩실이 막아섰다.
“그 시녀가 아무도 들어가지 말랬잖아요. 누구든 들어갔다간 노야께서 돌아가신댔어요!”
“그 말을 어찌 믿어!”
주 부인이 소리쳤다.
“전 믿어요!”
첩실은 누구하고든 필사적으로 싸울 태세였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필사적일 수밖에. 노야께서 살아나시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겠지만, 노야께서 돌아가시면 함께 순장될 처지가 아닌가.
시녀를 본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상황을 물었다.
“진정들 하세요. 제가 들어가 볼게요.”
시녀가 사람들을 제치고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안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병풍이 시선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문이 닫히고 마당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한참 만에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서 미소를 짓는 시녀를 보며 마당에 있는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다들 긴장 속에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또 뭐라고 하려나? 처음엔 돈을 요구했고, 두 번째는 금침을 사 오라고 했고, 세 번째는 약을 사 오라고 했다. 네 번째는 문을 나섰고 이번에는 다섯 번째인데 이번엔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을 할까?
“진작 나으셨는데 제가 외출하느라 시간이 지체됐네요. 어서 데려가세요.”
시녀가 웃으며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고 말했다. 병풍은 이미 치워진 상태라 들것 위에 누운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기엔 들어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노야.”
동 부인이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첩실을 뿌리치고 가장 먼저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곧이어 나머지 사람들도 달려갔다. 이리 밀치고 저리 밀쳐진 주 부인은 여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쪽 옆에 있었고, 첩실은 얼어붙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사셨어요? 사셨어요?”
“숨이 붙어 있어요, 숨이!”
“노야께서 움직이셨다, 움직이셨어!”
“여보, 여보. 나 아완이에요. 아완이라고요. 나 알아보겠어요?”
“노야께서 물을 찾으신다. 어서 물을 가져와라! 세상에, 노야께서 물을 드시겠대!”
시끄러운 소리들이 마당에 울려 퍼졌다. 그 말에 첩실은 긴장이 확 풀린 듯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 울었다.
* * *
같은 시각 주 노야의 방 안.
꿇어앉은 두 시녀는 분주했다. 하나는 다병(茶餠: 찻잎을 벽돌이나 원반형으로 뭉쳐 굳힌 것)을 불에 굽고, 하나는 잘 구운 다병을 찧어 부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각종 다구가 놓여 있고, 방 안에는 차 내음이 가득했다.
주 노야는 소금을 집어 차에 넣은 후 잘 섞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 훅 마셨다. 매운 풀 내음에 피로가 확 풀리는 듯했다.
“천것 같으니라고.”
주 노야가 찻잔을 쾅 내려놓았다.
“고칠 수 있는 건 안 고친다고 하더니, 고칠 수 없는 건 또 고치겠다니. 귀신을 속이라지!”
시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소리도 못 냈다.
“복수를 하는 게야.”
주 노야는 혼잣말을 하며 이를 갈았다.
“저리 소란을 피워 봤자 결국 망신을 당하는 건 저 애가 아니라 우리란 말이다! 우리 주씨 가문!”
거기까지 말한 주 노야가 탁자를 탁 내리치자 안에 있던 시녀들이 놀라 벌벌 떨었다.
“분풀이를 하려고 저러나 본데, 참으로 아둔하구나. 저리 시야가 좁아서야, 원. 제 혈육을 욕보이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아? 그리고 제가 한스러울 게 뭐 있어? 그러게 누가 바보로 태어나랬나. 오히려 한스러운 건 우리 주씨 가문이지, 주씨 가문! 저 바보가 태어난 바람에 얼마나 많은 조소와 냉대를 당해야 했는데!”
주 노야는 문밖으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저 애가 태어난 후로 사람들이 우릴 업신여겼잖아! 바보를 낳았다고! 우리 주씨 가문 혈통에 바보의 피가 흐른단 소리가 돌았어! 사내들은 장가들기 어려워지고, 여인들은 시집가기 어려워졌는데, 그게 누구 때문이야? 저 계집 때문이지!”
주 노야는 탁자를 붙잡고 일어서려고 했다.
“저 화근덩어리는 애초에 익사시켜야 했어. 저런 애를 안 죽이고 살려 두는 집이 어디 있어? 누이가 싸고도는 걸 모친이 눈감아주시는 바람에 저 애를 세상에 남겨 둔 거야!”
주 노야가 비틀거리자 시녀들이 얼른 일어나 부축했다.
“노야, 취하셨어요.”
시녀들이 두려워하며 말했다.
“내가 취해?”
주 노야는 현기증이 났다.
“좋은 차로구나! 차 일곱 잔에 취하다니! 맛좋은 술도 이만 못할 것이다!”
주 노야는 시녀를 밀치며 밖으로 걸어갔다.
“보검을 가져오너라. 저것을 베어 버리겠다. 어차피 재수 없게 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게 생겼으니, 둘이 죽는다 해도 다를 바 없겠지. 저 애를 죽이고 동씨 가문에 사죄한 뒤 강주로 가 정씨 가문을 박살 낼 것이다!”
시녀들이 놀라 주 노야를 부축하며 만류했다. 그런 실랑이가 벌어지는 와중에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주 노야가 우뚝 멈춰 섰다.
“봐라, 봐. 죽었지? 죽었더냐?”
주 노야가 바깥에 대고 소리쳤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을 타고 어렴풋이 곡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누가 문밖에서 들이닥치며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노야, 노야. 살았습니다, 살았어요!”
사환들과 하인들이 소리쳤다. 주 노야가 눈을 끔뻑거렸다.
“뭐야?”
시녀들을 밀치고 문가로 간 주 노야는 문을 붙잡고 서서 마당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노야, 아씨께서 동 내한을 고치셨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쳐다보던 주 노야가 별안간 손으로 다리를 탁 내리쳤다.
“우리 교교!”
밖으로 달려나가던 주 노야는 문턱을 제대로 못 보고 넘어지기까지 했다. 안팎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진소가 차를 우려 부친께 올렸다.
“그때 떠돌이 도인 하나가 여도사들이 수련하는 도관 근처에 잠시 머물렀다고?”
진 노태야가 찻잔을 돌리며 물었다.
“떠돌이 도인은 아니고요. 딱히 누구라 할 수도 없는 자입니다. 사람이 아직 안 와서 소식만 대강 들었는데, 거기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해 줬답니다. 근방에 사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쳐 주고요.”
“몇 살쯤 됐다더냐?”
“서찰에 쓰인 바로는 쉰이 좀 넘었답니다.”
진소의 대답에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오거든 확실히 물어보자.”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노태야, 노태야.”
사환 하나가 기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동 내한이 살았답니다!”
진소 부자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당연하지. 웬 호들갑이냐.”
진 노태야가 밝게 웃었다. 진소는 미소를 지으며 부친이 실수로 엎지른 차를 잠자코 닦아 주었다.
소식을 들은 경성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소 부친의 일이 놀라움을 안겨 줬던 건 사실이지만, 그때는 병이 중하여 고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꽤 오랜 시간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터였다. 죽을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기에 병을 고쳤을 때 사람들이 받은 충격도 그리 직접적으로 와닿진 않았다.
하지만 동 내한은 금석을 먹고 혼절하여 사경을 헤맸고, 경성 부잣집에서는 그런 일을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데다 워낙 병세가 급했다. 옛말에 염라대왕이 삼경에 데려간다고 하면 그 누구도 오경까지 붙잡고 있을 순 없다고 했는데, 붙잡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어디 붙잡다 뿐인가. 아예 살려 놓은 것을.
“틀림없어요. 들여갔을 땐 이미 죽은 상태였다니까요.”
“이 태의도 후사를 준비하라고 했다고요.”
“또 이 태의로군. 지난번에 진 노태야를 고칠 수 없다고 했던 것도 이 태의였는데, 이번에도 이 태의잖아. 정 낭자는 둘 다 고쳤고.”
“이 태의의 의술도 이젠 안 통하나 보네.”
“이 태의와 정 낭자가 한통속인 거 아니야?”
갑자기 화제가 자신에게 쏠리자, 안으로 들어서던 이 태의는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태의국 앞에서 잡담을 나누던 하급 관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난 못 믿는다. 동씨 저택으로 가자.”
수많은 사람이 동씨 저택으로 몰려왔지만, 동씨 가문 사람들은 문을 닫아걸고 아주 가까운 친척 외에는 손님을 들이지 않았다. 물론 이 태의는 예외였지만.
“이 대인께서 늘 잘 살펴 주신 덕입니다. 안 그랬으면 이번에 부친께서 정말 위험하실 뻔했어요.”
동씨 가문 자제들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천자를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수려한 문장력을 자랑하는 동 내한이 아니던가. 동씨 가문 사람들의 입에선 듣기 좋은 말이 술술 나왔다. 좋은 말이야 많이 해도 나쁠 게 없으니.
“정 낭자가 그리 말했습니까?”
이 태의가 의혹에 찬 눈초리로 물었다. 동씨 가문 자제들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튼소리. 그 여인이 그런 말을 했다니.”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었다. 정교랑의 의술이 궁금하긴 했지만 이 태의는 의원끼리 서로 자리를 피해 주는 법도를 지켰기에 정교랑과는 진씨 저택에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였다. 하지만 말 한마디만 나눠도 대충 성격이 나오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 낭자가 남을 칭찬한다? 어림없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