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13
교랑의경 113화
“원하는 대로 사다 줘라.”
사정을 들은 주 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돈이야 쓰면 되지, 돈이 무슨 대수라고. 우리는 정씨 가문처럼 돈돈 하면서 먹을 것으로 우리 교교를 박대하지 않아. 그깟 돈…….”
거기까지 말한 주 부인은 손거울을 내려놓더니 머리를 빗고 있던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는 차를 마시던 주 노야를 바라봤다.
“노야, 그 1만 관 말이에요. 교교가 갖고 있긴 좀 그렇겠죠?”
1만 관! 주 노야가 손을 멈췄다. 요 며칠 바빠 그걸 깜빡했군. 그 큰돈을 어린애한테 맡길 순 없지.
경성 밖 송가촌.
정월 하순의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낡은 집 마당에서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낭(大郎), 왜 나왔어요?”
거름 광주리를 등에 진 아낙이 들어오다가 문가에 선 사내를 보며 말했다.
“이제 괜찮소. 계속 쉬고만 있을 순 없지.”
이대작이 마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봄인데 슬슬 농사일을 시작해야지.”
아낙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내를 부축해 앉혔다.
“소를 빌리면 우리 친정집에서 도우러 올 사람이 있을 거예요. 걱정 말아요.”
이대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속일 필요 없소.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자네 친정에서 기꺼이 도와줄 리도 없고. 돈을 꾸러 갔을 때도 울면서 돌아오지 않았소.”
이대작의 말에 아낙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튼 너무 염려 말아요. 방법이 있겠죠. 그래도 병은 나았잖아요.”
“좋은 분을 만난 덕분이지.”
이대작이 문밖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은인의 존함은 기억하고 있소?”
아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수재래요. 지금 가서 인사하느니 과거에 급제하거든 그때 찾아가서 감사를 전해요.”
거기까지 말한 두 사람은 씁쓸해졌다. 고마움을 어찌 표한단 말인가. 지금 형편으로는 일가족이 봄을 날 수나 있을지 걱정인데.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참, 대낭. 취봉루가 문을 닫았대요. 이사를 갔다네요.”
얼른 화제를 돌리려던 아낙은 말을 뱉어 놓고 후회했다. 하필 그 얘길 꺼내다니! 역시나 이대작의 표정은 더욱 암담해졌다.
“그렇구려.”
“아마 팔았나 봐요. 새로 온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렇소? 또 식당을 열려나.”
이대작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식당을 열든 말든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당 분위기는 또다시 어두워졌다. 부부는 딱히 이야기를 나눌 흥이 나지 않아 멍하니 문만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야로 마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 * *
새해엔 마을을 찾아오는 친척이 꽤 있었지만, 나귀만 타고 와도 훌륭하지 마차는 구경도 힘들었다. 누구네 친척이려나. 이대작 부부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마차가 이대작의 집 대문 밖에 멈춰 섰다.
마차의 휘장이 들리더니 밝고 화사한 치마를 차려입은 여인이 내렸다. 황량한 겨울인지라 하얀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대작 부부의 시선에도 문득 생기가 돌았다.
시녀는 좌우를 살피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했다. 길을 물으러 왔나?
그때 시녀가 이대작 부부를 보며 활짝 웃었다.
“기억이 틀렸나 했네요.”
시녀는 웃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오더니 예를 표했다.
“언니, 저 기억하시죠?”
기억하고말고, 은인과 함께 왔었잖아. 의원까지 불러 준 은혜를 어찌 잊을까. 이대작 부부가 얼른 일어났다.
“공자님과 함께 왔었잖아요.”
아낙의 말에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함을 내밀었다. 이대작 부부는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정초에 찾아오면서 빈손으로 올 순 없죠.”
시녀는 웃으며 함을 내려놓았다. 이대작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그제야 자리를 내주려 했지만, 앉을 만한 자리가 딱히 없었다.
“괜찮아요. 실은 오라버니한테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네, 네. 말씀만 하십시오.”
이대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공자와 잘 아는 사이면 나쁜 사람은 절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이미 꼴이 이러하니 해치려 들 사람도 없고.
“아는 친구들이 경성에 올라왔는데 마침 신선거 자리를 내놨더라고요. 그래서 거길 사들였어요.”
이대작 부부는 깜짝 놀랐다.
“거길 댁들이 샀다고요?”
시녀가 빙긋 웃었다.
“저희가 아니라 제가 아는 사람이요. 외지 사람인데 서북에서 돈을 모아 상경했죠. 형제들의 생계가 막막하니 가게라도 열어 먹고살려나 봐요.”
이대작 부부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근데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그 사람들이 여기 사정을 잘 모른다며 저한테 숙수를 구해 달라는데, 오라버니가 생각나더라고요. 한 공자를 통해 전에 숙수를 하셨단 얘길 들었는데, 부엌을 좀 맡아 주실 수 있어요?”
시녀의 물음에 이대작 부부는 멍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러잖아도 먹고살 길이 막막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사람이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니. 한 공자라……. 이번에도 한 공자가 도움을 주는 것이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어디 간들 숙수 하나 못 찾겠는가.
“고맙습니다.”
이대작 부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두 사람이 얼른 예를 표했다. 정말 귀인을 만났구나. 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지.
시녀가 손을 비비며 문 안으로 들어설 무렵, 하늘에서는 또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안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병이 나는 바람에 등불놀이 못 보러 가서 너무 아쉬워요. 난 할아버지랑 같이 갔었는데 엄청 화려했어요.”
문밖에 있던 몸종이 시녀를 보고 다가와 공손히 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 있는 진단랑은 작고 정교한 꽃등을 들고 있었다.
“봐요. 언니 주려고 특별히 산 거예요. 어때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시녀가 다가가 꽃등을 받았다.
“정말 예쁘네요.”
시녀도 감탄했다. 옆에 있던 여종은 진단랑에게 그만 가야 한다고 했다. 진단랑은 못내 아쉬운 눈치였지만 가족들이 신신당부한 터라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다 나으면 우리 집에 놀러 와요.”
“다 나았어. 염려 안 해도 돼.”
정교랑이 말했다. 배웅하러 대문 밖으로 나간 시녀는 마차가 보이지 않은 후에야 돌아섰다.
“아씨, 다녀왔어요. 다 잘 처리했고요.”
시녀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도련님들도 그쪽으로 옮겨 가셨어요.”
얘기가 나오자 시녀는 저도 모르게 불평을 쏟아냈다.
“그 두칠이란 자가 정말 지독해요. 가게를 아주 싹 비웠더라고요. 기둥까지 뽑아갈 정도로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탓할 것 없어.”
“아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장인을 불러다 싹 수리했어요. 셋째 도련님 말로는 2월 보름쯤이면 얼추 될 거래요.”
시녀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작도 동의했어요. 제가 같이 가진 않았지만, 아마 지금쯤이면 도련님들이랑 만났을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할지, 셋째 오라버니한테 잘 전했지?”
“아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했어요.”
시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녁 무렵, 마차 행렬이 거리를 질주했다. 선두에 달리던 두 사람이 말고삐를 당기고 거리를 둘러보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기이하네. 취봉루가 여기 아니었나?”
식당은 한쪽 문만 열려 있고 사람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밥 짓는 연기도 나지 않고 떠들썩한 인파도 없이 쓸쓸한 모습이었다.
“문 닫았어요.”
길가에서 말을 끌고 가던 노인 하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문을 닫아요?”
말에 타고 있던 사람은 더욱 놀랐다.
“경성으로 옮겨 갔어요. 아주 대박이 났거든.”
노인이 무리를 살피며 말했다.
“이런 부자 손님들만 오시니 대박이 안 나기도 힘들지.”
노인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탄식을 내뱉고는 소를 끌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랬군. 두 사람이 말 머리를 돌렸다.
“군왕, 취봉루가 문을 닫았답니다.”
두 사람은 마차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럼 쉬지 말고 곧장 성으로 들어가자.”
마차 안에서 소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 행렬이 대로를 질주하면서 눈보라가 일었다. 서봉추가 문밖으로 나와 좌우를 살피면서 멀어져가는 인파를 쳐다봤다.
“그래도 여기가 위치는 괜찮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
이대작이 그 말을 듣고 따라 나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경성에서 가깝다고는 하지만 멀어도, 가까워도 문제죠. 어쨌거나 지나가는 손님은 꽤 많아요.”
병을 앓고 난 터라 아직 초췌하긴 했지만 한결 생기가 도는 얼굴이었다.
“요리가 맛있는 게 더 중요하지.”
서무수가 이대작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숙수가 잘 좀 해 주시오. 우리 형제들은 이런 거 잘 모르니까.”
이대작은 황공한 듯 얼른 예를 표하며 겸손하게 굴었다.
“주인어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할 얘기가 좀 있는데 이거 미안해서, 원.”
무슨 일이지? 하루 사이에 뜻밖의 일이 너무 많이 생기네.
“어려워 마시고 편히 말씀하십시오.”
이대작이 공손하게 말했지만 서무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대청을 가리켰다.
“자, 들어가서 얘기하지.”
이대작이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날이 어둑해진 무렵이었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 나와 목이 빠지게 이대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그게 사실이에요?”
아내가 물었다.
“한 은공의 소개인데 가짜일 리가 있소?”
이대작은 아이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어서 밥부터 차리시오. 먹고 나서 얘기합시다.”
아내는 긴말하지 않고 밥을 차려 왔다. 전에는 마을에서 이대작네 형편이 좋은 편이었지만 병을 앓으면서 수입이 끊긴 탓에 지금은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차려 온 밥상이라고 해 봐야 수제비가 전부였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아내에겐 겸상할 자격이 없었다. 남편과 시모가 식사를 마치고 아이에게 밥을 먹인 후에야 부엌에서 부랴부랴 한술 뜨는 게 전부였다.
“어떻게 됐는데요? 어떤 사람이에요? 정말 식당을 열겠대요?
정리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아내가 물었다. 이대작은 등잔불 앞에 앉아 종이를 보고 있었다.
“이거, 문서예요?”
아내의 물음에 이대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합의 인감도 있소.”
아내는 몹시 기뻐하며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식당이나 할 사람 같진 않아 보였소. 군인 같더군.”
이대작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서북에서 왔다고 했잖아요.”
아내는 바느질거리를 손에 들으며 말을 이었다.
“식당을 사들여 제대로 운영해 보려는 것 같으니, 당신은 음식이나 잘하면 돼요.”
이대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개업한대요?”
한시름 놓게 된 아내의 바느질 손놀림이 경쾌해졌다.
“아직 수리 중이오. 보름이면 될 거요. 나도 같이 공사를 감독했는데 공을 많이 들이더군. 전부 새것으로 바꿨소. 방 안엔 꽃무늬가 있는데 무슨 꽃인지도 모르겠더라고. 방마다 다른 꽃이 놓여 있었소. 아주 훌륭해.”
아내는 더욱 마음이 놓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아내가 고개를 들었다. 남편은 여전히 손에 든 문서를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글도 모르면서. 읽어 준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죠?”
아내가 웃으며 물었다.
“아니, 이건 내 것이 아니오.”
이대작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