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14
교랑의경 114화
아내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 장이 더 있네요?”
그제야 남편의 손에 든 문서가 두 장이라는 걸 발견한 아내가 물었다.
“이건……?”
“이건 은공께 드릴 거요.”
이대작의 말에 아내는 더욱 놀랐다.
“은공이요?”
“실은 이것도 원래 내 것이지만.”
이대작은 문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은공께 드리기로 했소.”
눈을 동그랗게 뜬 아내가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거리를 내려놓았다.
“주인장들이 가진 돈을 전부 털어 가게를 사고 수리를 하는 거라면서, 처음 몇 달 동안은 품삯을 주기 어려울 거라고 했소.”
아내가 순간 얼어붙었다.
“품삯을 안 준다고요? 그, 그럼…….”
“대신 지분을 나눠 주기로 했소. 반년 이후부터는 품삯을 주고 말이오. 대신 그전까지 집에서 먹을 건 전부 거기서 가져올 거요.”
아내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막막한 표정이었다.
“지분을 나눠 주는 게 그리 쉬울까요?”
아내는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당초 노태야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지만 차일피일 미룬 통에 결국 손자한테 쫓겨나게 됐잖아요. 그 일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 꼴이 되지도 않았죠.”
“나도 그리 말했는데 주인장이 웃으며 자기들은 작은 가게라 돈 몇 푼 못 벌 거라고 그러더군. 다 함께 먹고 살면서 마음 편히 지내면 그거로 족하다 했소. 말이 좋아 지분이지 품삯만도 못할 거요.”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지 사람인 데다 이쪽 업계는 문외한이면서 식당을 사들였으니 장사는 안 봐도 뻔했다. 애초에 예전의 취봉루와는 비교가 안 됐다.
“근데, 그게 은공과는 무슨 관계죠?”
아내가 또 물었다.
“그 주인장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과거 얘기가 나왔소. 서북에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병을 얻어 죽을 뻔했는데 길에서 도움을 받았다더군. 내 이야기를 듣고도 무척 감동했소. 우리처럼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은인의 은혜를 못 잊지. 주인장들은 그런 일이 있었으니 더더욱 나를 숙수로 써야겠다고 했소. 그게 은혜를 갚는 길인 것 같다나. 물론 별개의 일이지만 말이오.”
이대작은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서북 사내들이 참…….”
“정말 진국이네요.”
“그 주인장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보은이야말로 가장 큰 기쁨이라고 하기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이대작이 손에 든 계약서를 보며 말했다. 아니, 그때 누가 제안을 했던가? 아무렴 어쩌랴.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그럴 마음이 있었으니 상관없다.
“이 지분을 한 공자께 드린들 뭐 어떻소. 어차피 몇 달 후면 품삯을 받을 텐데, 이 지분이 대수라고. 한 공자께서 안 계셨다면 지분은커녕 품삯도 못 받았을 테니 깔끔하게 한 공자께 드리는 게 낫지.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게 대장부의 도리 아니겠소!”
이대작은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때의 장면이 떠오르는지 통쾌해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보며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아내의 얼굴을 본 이대작은 헛기침을 한 후 자세를 바로 앉았다.
“당신이 보기엔 별로인 것 같소?”
아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대낭, 당신 정말 다 나았네요. 방금 얘기할 때 생기가 넘쳐 보였어요. 그토록 생기 넘치는 모습은 처음 봐요.”
남편의 부드러운 눈길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에 존경심이 드러났다.
“아주 잘한 일이에요. 우리가 없이 살긴 해도 기회가 왔으면 은혜를 갚아야죠.”
이대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들이 전부 제대로 된 사람들 같았소. 진심으로 장사해 보겠다는 생각도 있고. 나도 열심히 해야지.”
이대작은 고생으로 거칠어진 아내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당신이 날 만나 고생이 많구려.”
아내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당신이 나한테 잘하잖아요.”
두 부부는 누추한 방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따스한 겨울밤을 보냈다.
동녘에 해가 뜨면서 새벽빛이 밝아 왔다. 정교랑은 주 부인이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모습을 보였다.
“교교, 좀 괜찮니?”
주 부인이 정교랑의 안색을 살피며 다정하게 물었다.
“안색은 많이 좋아졌네.”
사실 정교랑의 안색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긴 힘들었다. 언제나 똑같았으니까. 정교랑은 네 하고 가볍게 대답하며 고개를 까닥여 감사를 표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른 의원을 불러다 줄까? 약은?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주 부인의 질문엔 끝이 없었다. 정교랑은 세 마디 당 한 마디 꼴로 대답했다.
“돈은 걱정하지 마. 우리 주씨 가문이 다른 건 몰라도 먹고 마시는 건 얼마든지 써도 돼. 네 아버지처럼 먹는 거로 너 섭섭하게 안 해. 네 오라비가 돌아와서 하는 말 듣고, 네 외숙이 당장이라도 네 아버지를 찾아가 따진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주 부인은 눈물이 글썽해 한숨을 지었다.
“세상에, 네 어머니가 해 간 혼수로 먹고살면서 널 그리 대하다니.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친족이니 뭐니 신경 안 쓰고 당장 널 데려오는 건데.”
정교랑은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건 걱정 마. 그 사람들한테 빼앗기진 않을 테니. 너 시집갈 때 우리가 보태서 해 줄게.”
주 부인이 화제를 돌렸다.
“네 돈은 내가 관리하마. 그냥 보관해 둬도 좋고 점포를 몇 개 늘리는 것도 좋지. 교교, 외숙과 외숙모가 너 먹고 입을 걱정 안 하고 떵떵거리며 살게 해 줄게.”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동씨 가문에서 준 비전을 가져오렴. 돈을 그냥 거기 두긴 아깝잖니. 우리 집에서도 잘 관리할 수 있어.”
주 부인이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필요 없어요.”
주 부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교교, 네 돈을 탐내는 게 아니니 걱정 마. 넌 아직 어려 간수하기 힘들잖아. 내가 대신 보관할게. 나중에 줄 거야.”
주 부인은 웃음을 짜내며 설득했다.
“네가 갖고 있으면 괜히 보관하는 비용만 들잖아. 이 외숙모가 관리할게. 돈이 돈을 낳는 거야. 나중에 너 다 줄게.”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다시 말했다. 얘는 왜 이렇게 고집이 세? 주 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시녀가 말을 받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희 아씨께서 필요 없다니 이제 그만하시죠? 이러다 아씨께서 울기라도 하시면 남들이 비웃어요.”
저 천것이! 격분했던 주 부인이 곧 냉정을 되찾았다.
“교교, 널 위해 이러는 건데 싫어?”
주 부인이 물었다.
“싫어요.”
정교랑이 주 부인을 보며 말했다.
“나 배고파요.”
배고파? 나 배고파요? 지금 말이야? 무슨 배가 고파?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멈칫하던 주 부인은 무언가 머릿속을 번뜩 스치는 듯 정교랑을 쳐다봤다. 주육낭의 목소리가 갑자기 귓가에 울려 퍼졌다. 강주에서 돌아온 아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던 때의 목소리였다.
“절 보자마자 딱 한 마디 하더군요. 그 말에 정씨 집안이 발칵 뒤집혀 망신을 톡톡히 당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이러더군요. ‘나 배고파’.”
나 배고파……. 참으로 꼭 필요한 때에 딱 맞는 사람 앞에서만 하는 말이었다.
주 부인은 눈앞에 검은 머리를 길게 드리우고 앉은 여인을 바라봤다. 검은 두 눈은 깊은 심연처럼 속을 알 수 없어 사람을 꼼짝 못 하게 했다.
이 바보가, 감히 날 협박하다니!
주육낭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길에서 만난 여종들과 몸종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켜서면서 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소년을 쳐다봤다.
“공자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누가 또 공자님의 심기를 건드린 거야? 아침 댓바람부터.”
“요즘 통 기분 좋은 일이 없으신 거 같아.”
“정 아씨 쪽에 가시나 본데.”
반근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불안한 표정으로 저쪽을 바라봤다. 아씨…….
“야, 서둘러. 밥값은 해야지?”
다른 몸종이 못마땅한 듯 소리쳤다. 반근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방망이를 움켜쥐며 다른 몸종과 힘을 합쳐 풀을 먹일 이불보가 담긴 광주리를 들어 올렸다.
“정교랑, 무슨 도둑이라도 막아? 싫으면 싫은 거지, 뭐 하러 어머니 심기를 그리 건드려?”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을 보며 주육낭이 소리쳤다.
“공자님, 저희 아씨는 병이 나셨어요.”
시녀가 눈썹을 치켜뜨며 따졌다.
“내 앞에서 연극하지 마. 그런 거짓말은 남들한테나 하라고!”
주육낭이 소리쳤다.
“정교랑, 그깟 몸종 때문에 이래? 우리가 너한테 관심을 안 줬다, 이거 아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주육낭은 앞에 앉은 여인의 그 무뚝뚝한 표정을 보며 가슴속에 열불이 치솟았다. 모친 때문에 분노로 화가 난 건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뜻에서 한 것도 네 눈엔 악의로만 보이지. 까놓고 말할 순 없어? 이렇게 꽁해 있지만 말고?”
“그깟 돈이 무슨 대수라고. 우리가 그걸 탐낼 거 같냐!”
“우리가 농간을 부린다 치자. 정교랑, 넌 네가 잘났다고 여기잖아. 아무것도 겁날 것 없지 않아? 네 눈에 우리 주씨 가문은 지긋지긋하기만 한 거 아냐?”
“정교랑, 네가 이제 명성 좀 얻었다고 우리가 네 덕 좀 볼까 욕심내는 줄 아는데, 앞으로 네 비바람을 막아 줄 건 우리 주씨 가문이야. 가족의 보호가 없으면 여기저기서 물어뜯기고 잡아먹히게 돼 있어!”
정교랑은 물잔을 내려놓고 얼굴이 시뻘게진 채 따지고 드는 주육낭을 쳐다봤다. 주육낭이 한 말을 전혀 못 들었다는 듯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이었다.
“누가 날 먹어요?”
주육낭은 이를 갈았다.
“계속 시치미 떼든가!”
주육낭이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리자 실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꿇어앉은 시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씨…….”
“괜찮아.”
정교랑이 문밖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또 내 심기를 건드리네. 같은 실수를 세 번 거듭하면 안 되는데.”
같은 실수를 세 번 거듭해? 육공자가 경솔하고 무례하게 군 일? 세 번이 넘으면 뭐? 시녀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글씨 연습해야겠다. 책 읽어 봐.”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옆에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경성, 저잣거리.
아직 밥때도 안 됐는데 신선거는 벌써 인파로 북적였다. 노래를 부르며 술을 따라 주는 기녀와 다과를 파는 소리, 웃고 떠들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들과 노구솥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까지, 대청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일 층은 저마다 자리를 찾아 앉아야 해서 다소 복잡했지만, 별실로 꾸며진 이 층은 조용하고 품격이 있었다. 점원들이 차와 술을 들여가고 내올 때만 열린 문틈으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별실로 들어간 두칠은 얼른 문을 닫았다. 커다란 별실이었다. 맞은편에 화초 병풍이 놓여 있고, 뒤에 앉은 두세 사람이 병풍 너머로 어렴풋이 보였다. 두칠은 더욱 웃음을 짜내며 병풍을 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넓적한 얼굴에 큰 귀, 하얀 얼굴에 긴 수염을 가진 사내가 있었다. 오십 대의 사내는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