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16
교랑의경 116화
손녀들이 진 노태야를 쳐다봤다. 아직 어린 진단랑은 언니들의 논쟁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원망’이라는 말은 알았다. 순간 긴장한 진단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 노태야를 보며 팔을 잡아 흔들었다.
“나라면 일단 생각을 했을 게다. 원망해 봤자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 원망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더냐?”
“물론 그건 아니죠.”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나머지 자매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남을 원망하는 건 쉽지만 그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차라리 내가 왜 그런 일을 겪었나 생각을 해야지. 정 낭자가 안 고친 게 아니라 내가 정 낭자의 원칙에 안 맞았기 때문이다. 정 낭자가 날 못 고친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병이 나 고생한 거야. 인과관계는 확실히 해야지.”
진 노태야는 크고 작은 손녀들을 쭉 훑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든 매사 원인과 결과를 자신에게서 먼저 찾도록 해라.”
“행하여 만족을 얻지 못하면 돌이켜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하나니, 자기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돌아온다(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 其身正而天下歸之 – 맹자)고 했죠.”
진십팔랑의 말에 진 노태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여인이라 벼슬길에 나가 백성을 구제할 순 없겠지만,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될 것이다. 자신을 바르게 하고 가정을 잘 살피며 남편의 내조를 잘하고 자식을 잘 훈육해야 한다. 늘 이 점을 명심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하지 말아라.”
손녀들이 얼른 공손히 예를 올렸다.
“조부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는 너희가 내게 질문했으니, 이번엔 내가 너희에게 질문하마. 만약 너희라면 2만 관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을 때 고치겠느냐? 안 고치겠느냐?”
무려 2만 관이다. 2관이 아니라! 자매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현재 경성에서 혼수를 제일 많이 해 간 여인이 대략 10만 관을 가져갔으니, 2만 관이면 웬만한 집 여식의 혼수로 충분한 액수였다. 2만 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원칙과 도의도 봐야겠지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도 봐야 한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는지도 봐야 하고.”
손녀들은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돌아가서 맹자의 상편과 하편을 각각 열 번씩 필사하도록 해라. 스승에게 시험을 보게 할 테니.”
손녀들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일어나 작별 인사를 올렸다. 뒤따라 나가던 진십팔랑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왔다.
“할아버지.”
진십팔랑이 눈빛을 빛내며 나지막이 물었다.
“아까 질문하실 때 전제를 빠뜨리신 거 아니에요? 그 병은, 고칠 수 있는 거였나요?”
진 노태야는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진짜든 가짜든, 가짜든 진짜든, 얽매일 필요 있겠느냐. 그만 가거라.”
진십팔랑은 더 묻지 않고 웃으며 예를 표한 후 나갔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매들이 천천히 걸어갔다. 진단랑이 울상을 지으며 진십팔랑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언니, 나도 필사해야 해?”
“넌 안 해도 돼. 글씨 연습부터 해.”
진십팔랑이 웃으며 대꾸했다.
“맞아, 맞아. 글씨 연습해서 정 언니처럼 멋진 글씨를 쓸 거야.”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진십팔랑은 멈칫했다.
“단랑, 정 낭자가 글씨를 잘 써?”
진십팔랑이 나지막이 물었다.
“응, 우리가 차정사 벽에 글도 남겼어.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기도 했는걸. 시는 내가 짓고 글씨는 정 언니가 썼다고 했더니 다들 안 믿으면서 날 놀리셨어.”
진단랑은 순간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우뚝 멈춰 섰다.
“단랑, 저번에 우리 같이 갔을 때?”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진십팔랑이 진단랑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읊었다. 진단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어린 나이인 데다 시일이 꽤 흐른지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무엇을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아버지가 서재에 둔 글씨야.”
진단랑이 말을 얼버무렸다.
“정말?”
진십팔랑이 다시 물었다.
“언니, 믿지도 않으면서 뭐 하러 물어! 아까 다른 언니들한테 뭐라고 했으면서 자기도 똑같네. 자기 생각만 믿지 내 말은 안 믿잖아.”
진단랑이 입을 삐죽이며 발을 구르자 진십팔랑이 웃었다.
“믿어, 믿어.”
진십팔랑은 몸을 굽히고 진단랑을 보며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단랑, 너 다음에 정 낭자한테 갈 때 이 언니도 데려가 주라. 어때?”
“좋아.”
진단랑이 호쾌하게 수락했다. 저쪽에서 진단랑의 유모가 다가왔다.
“아씨, 낮잠 주무실 시간이에요.”
진단랑은 언니들과 작별을 고한 후 유모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진십팔랑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준비를 해야겠네.”
진십팔랑은 흥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십팔랑, 뭘 준비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앞서가던 자매들이 돌아보며 물었다. 진십팔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웃었다.
“필사할 준비 말이야. 난 글씨가 별로라 미리미리 써야 해. 안 그럼 스승님한테 벌 받을 거야.”
“그럼 어서 가자.”
자매들도 웃었다.
치료비 2만 관을 거절했다는 소문은 하루 만에 쫙 퍼졌다. 그 일로 손녀들을 훈계한 진 노태야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얘깃거리를 좋아했다.
지난번에 염라대왕의 심기를 건드린 일로 신선의 비방을 도로 빼앗겼다는 설도 있고, 그 사람은 죽을 정도가 아니었으니 원칙상 고칠 수 없었다는 설도 돌았다. 거기에 돈이 적었다는 설이나 주씨 가문보다 신분이 낮기 때문이라는 설까지…….
무슨 말이 돌든 상관할 바 아니지만, 좋은 말은 전부 정교랑 차지고 짜증 나는 말은 주씨 가문이 죄다 뒤집어썼으니 주 노야 내외로서는 참기 힘들었다. 이게 우리랑 뭔 상관인데? 열이 받은 주 부인은 나았던 기침병이 다시 도졌다. 하인들 사이에서도 의논이 분분했다.
“사촌 아씨께서 노야와 부인을 열 받게 하려고 일부러 저러시는 건가? 아니면 진짜 못 고치는 건가?”
“당연히 노야와 부인을 열 받게 하려고 그러시는 거지.”
“죽은 사람도 살리는데 못 고칠 병이 어디 있어?”
여종들과 몸종들이 수군대는 말에 옆에 있던 이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아니에요.”
다들 멈칫해서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돌리니 한겨울인데도 소매를 걷은 채 이불보를 널고 있는 몸종이 보였다. 손이 꽁꽁 얼어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시선이 쏠리자 몸종은 피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네가 뭘 안다고.”
어멈 하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에요. 아씨가 그러시는 이유가 있어요.”
반근이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이유? 노야와 부인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지.”
“아니에요. 아씨께선 예전에도 그러셨어요. 노야와 부인 때문에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예전? 여종들과 몸종들이 반근을 꼼꼼히 쳐다봤다.
“아, 너 걔구나.”
반근을 알아본 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하긴, 원래 그 바보의 시중을 들었으니.”
“바보 아니에요! 그 누구보다 똑똑하신 분이에요! 알지도 못하면서!”
반근이 고개를 들고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사람들은 멍해졌다. 소리를 지르고 난 반근은 더럭 겁이 나는지 뒤돌아 뛰어갔다.
“뭐야, 진짜 이상한 애네.”
“저러니 아무도 안 데려간다고 하지.”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달음에 마당을 달려 나온 반근은 나무 아래에 서서 눈물을 닦았다. 저들은 몰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씨, 몸조리를 더 하셔야죠. 이렇게 서두르실 필요 없잖아요.”
“이번엔 이웃 부인의 병을 고치느라 전보다, 한곳에 며칠 더 오래 머물렀잖아. 이러면, 안 좋아.”
이러면 왜 안 좋은 건지, 전엔 반근도 몰랐다. 아씨를 따라다니면 딱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씨를 떠난 후로 예전에 있었던 일들은 반근이 유일하게 마음을 기댈 곳이 됐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곱씹고 또 곱씹었다. 덕분에 이제는 전에 이해할 수 없었던 일도, 아씨의 이해할 수 없었던 말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다.
“네가 가진 걸, 저들은 못 가졌어. 그런데 저들을 위해 쓰진 않겠다고, 네가 고집을 부렸잖아. 그러니까, 이건, 네 죄야.”
“그리고, 난 바보야.”
“여기로 생각해. 그럼 알 수 있잖아.”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작은 공을 세우는 게, 더 나아.”
“우선 널 믿게 하고 나서, 나머지는 천천히 풀어나가면 돼.”
“반근, 한 공자가 말했지. 이 정도 수고쯤이야, 누구나 도울 수 있는 일이니, 은혜랄 것도 없다고.”
“반근, 한 공자 같은 사람을 만나는 우연은 많지 않아.”
반근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건 아씨의 마지막 가르침이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아쉽게도 그땐 몰랐지만.
반근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돌려 정교랑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땐 아둔하여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여인 둘이서 먼 길을 떠날 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재능이 많으면 시기를 사고, 사람이 너무 좋으면 화를 초래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한 걸음 물러서고, 한 걸음 비켜서야 했다. 물러서고 비켜서는 건 겁나서가 아니라 더 잘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아씨는 병을 고쳐 명성을 크게 얻었으니 이미 충분해. 지금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게 더 나아. 아씨는 늘 그러셨어. 병주를 떠나던 그 순간부터 한결같으셨지.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신 거야. 남들이 뭐라 수군대고 소리치고 소동을 부리든, 개의치 않으셨지.
“우리 주씨 가문이 뭘 잘못했어! 고친다고 말한 것도 그 애고, 안 고친다고 말한 것도 그 애야.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주육낭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씩씩거렸다.
“그 여인은 외로운 처지고, 주씨 가문은 외가 혈육이잖아.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어른의 과오가 되는 게 당연한 이치지.”
진 공자가 웃으며 대꾸하자 주육낭은 냉소를 지었다.
“그럼 잘난 건 저 스스로 똑똑해서고?”
“아니면 정씨 가문 덕이거나.”
진 공자는 분기탱천한 주육낭의 얼굴을 웃으며 쳐다봤다.
“다 작심하고 저러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사건이 전부 다! 고치는 것도 안 고치는 것도 전부 제 뜻대로잖아.”
진 공자가 풉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저 여인이 자네 집안 뜻대로 하겠어? 육낭, 저 여인이 바보인지 자네 집안이 바보인지 모르겠군. 뻔한 일 아니야? 뭘 그렇게 괴로워해?”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꽉 쥐었다.
“어디 갔다더냐?”
주육낭이 고개를 홱 돌리며 묻자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여종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정 아씨께선 출타한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진 모르고요.”
아파서 병도 치료 못 한다고 해 놓고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해? 사람을 바보로 아는 거야?
주육낭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문밖을 바라봤다. 애초에 그 여인을 협박해 집으로 데려왔을 때부터, 여인에겐 우습게 보였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걸 바랐는지도 모르지. 협박이라. 대체 누가 누굴 협박한 거지? 누가 누굴 꼼짝 못 하게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