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20
교랑의경 120화
정교랑과 시녀는 결국 태평거에 들어가는 대신 마차를 타고 성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마차는 옥대교 어귀에서 빌린 것이었다. 일찍 나갔다가 오후에 들어왔는데도 거리는 인파로 붐볐다.
“보수사 보름 법회네요. 아씨, 구경 가시겠습니까?”
빌린 마차의 마부가 묻자,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길을 가리켰다.
“보수사 북문으로 지나가요.”
그러면서 시녀는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구경하시겠어요?”
정교랑은 미동도 하지 않고 단정히 앉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평소에 편히 오는 게 나아요. 장터에서도 승려와 비구니가 생활비를 충당하려고 파는 물건이 대부분이고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누이가 잘 아네요.”
마부가 북적이는 인파 사이를 지나가며 덧붙였다.
“승려들이 예쁜 첩실까지 먹여 살려야 하니 시줏돈만으로는 부족하니까요.”
“그래도 감히 데리고 나오진 못하잖아요. 관부에서 잡아다 강제 노역을 시키니까.”
타지 말씨를 쓰면서 경성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터라 마부는 놀란 눈으로 시녀를 다시 훑어봤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데, 아내까지 들인 승려들한테 돈이 부족해야 얼마나 부족하겠습니까. 글을 배워서 경문을 읽을 줄 알았거나 언변이 좋았거나 차를 잘 우렸다면 나도 승려가 됐을 겁니다. 이렇게 고생하며 살지 않고.”
“경문을 읽고, 훌륭한 언변을 갖추고, 차를 잘 우리는 것 또한, 고생 없이, 거저 얻는 건 아니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마부는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말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어서 벙어리인가 했는데, 말을 할 줄 알긴 아네.
“맞는 말씀입니다요. 뭐든 다 고생이죠. 그래도 그냥 마시는 차인데 보수사 대선사(大禪師: 승려의 법계 가운데 하나)가 우린 차는 한 잔에 2백 관이나 받으니 말입니다.”
마부가 웃으며 투덜거리자 정교랑이 대꾸했다.
“거기서 파는 건 차가 아니라 참선이니까요.”
마부가 혀를 낼름거렸다. 아씨가 워낙 진지한 통에 뭐라 받아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자 한 자 떼어 놓고 보면 못 알아들을 말이 없는데도 합치면 도통 이해가 안 갔다. 평범하게 쓰는 흔한 말이건만 듣다 보면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시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웃고는 휘장을 내린 후, 바깥 풍경을 손으로 짚어 가며 정교랑에게 설명했다. 보수사 북문을 지나 후문을 도는데도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금가아가 갖고 놀게 귀뚜라미를 사다 줘야겠어요.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서 내린 시녀는 마부더러 앞쪽 어귀에 마차를 세워 놓으라고 하고, 꽃과 새, 물고기, 곤충 등을 파는 노점으로 갔다. 노점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시녀가 돌아보자 청포를 입은 젊은 사내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원조였다. 옆에 있던 동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시녀를 살폈다.
“공자님, 시험을 마치셨겠네요. 시험은 어떠셨어요?”
시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아무래도 삼 년 후를 기약해야겠어.”
한원조가 웃었다.
“3월에 방이 붙으면 꼭 먼저 알려 주세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시험을 어떻게 봤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한원조는 잠자코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보수사에 향불 올리러 온 건가?”
한원조의 물음에 시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 아씨랑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아씨? 한원조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마차가 여러 대 세워져 있었지만, 대부분 평범한 임대 마차였고 표식을 단 고관대작이나 부잣집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공자님은 향불 올리러 오셨어요? 지금은 좀 늦은 거 아닌가요? 시험 전에 성현들께 향불을 올리셨어야죠.”
군자는 괴력난신을 입에 담지 않는다지만 경성으로 시험을 보러 온 서생들은 남몰래 혹은 대놓고 공자묘를 찾아가 참배하곤 했다. 나머지 수재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운이나 좋게 해 달라고 절 올리러 왔어. 이번에 시험 전에 장강주 선생의 수업을 들었다면 붙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이번 시험관이 한림학사 모순 대인인데, 장강주 선생과 동문이시거든.”
시녀가 한원조를 쳐다봤다.
“우리 노야…… 아니, 장강주 선생께서 수업을 여셨어요?”
시녀가 놀라며 물었다.
“응, 시험 전 보름 동안.”
동료가 고개를 내저으며 아쉬운 듯 대답했다.
“아쉽게도 우리는 자리를 못 얻었지만.”
시녀가 아, 하고 대꾸한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서 일 봐. 우린 절 올리러 갈게.”
한원조의 말에 시녀가 얼른 예를 올렸다. 걸어가던 한원조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봤다.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의도가 불순하다 여겨 뭐라 거절하고 안 만나 줄지 다 생각해 놨건만, 뜻밖에도 상대가 찾아오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이 먼저 나서서 인사를 했으니 말이다.
“공자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
“옹주께 고맙다고 전해 줘.”
한원조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 숙수가 찾아와 일자리를 찾았다고 하면서, 옹주께서 선심을 쓰셨다고 했거든.”
옹주? 시녀가 멈칫하며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한원조는 벌써 동료들과 함께 저만치 가고 있었다. 한원조는 곧 인파와 함께 후문을 통해 보수사로 들어갈 터였다. 어리둥절한 모습이던 시녀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옹주?”
시녀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귀뚜라미통 두 개를 들고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던 시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퍼뜩 깨달은 표정으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씨, 이제 알겠어요.”
시녀가 마차에 앉아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옆에 둔 귀뚜라미통을 보면서 메마르고 감정 없는 눈길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뭘 알아?”
정교랑이 물었다.
“이렇게 하시는 거 한 공자를 위해서죠?”
시녀가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
“불의를 위해 나섰던 그 정의감을 위해서요. 그 선의와 의협심을 위해서, 맞죠?”
남을 돕고자 한다면 앞으로 좋은 일이 줄줄이 생기도록, 먹고 입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이상으로 완벽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단순하고 화끈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누가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누가 남을 돕기 위해 이토록 공을 들일까.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하면서.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시녀를 힐끔 쳐다봤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가서 하면 돼. 남이 이뤄 줄 필요는 없지. 남이 이뤄 준 건 남의 것일 뿐 그 사람 게 아니야.”
시녀는 멈칫했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 앞에 하신 말씀이면 충분해요.”
당신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가서 해라. 당신이 좋아하는 거라면 당신 마음대로 다 해라. 난 그저 당신을 돕고 응원하겠다. 당신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당신이 베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당신이 계속 정의로운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하던 시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달아올랐다. 살면서 이런 도의를 경험한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아씨.”
시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아씨를 불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저 입 안을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진안 군왕이 다시 태후 침궁에 들어섰을 때, 곁에는 한 사람이 늘어 있었다.
“형님.”
금빛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 여섯 살 난 사내아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느껴져요?”
진안 군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사내아이를 쳐다봤다.
“뭐가요?”
“맛있는 냄새요.”
“전하, 먹을 것 좀 그만 생각하세요.”
진안 군왕이 하하 웃었다. 문밖에 있던 궁인이 맞이했다.
“이황자님, 군왕.”
궁인들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두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 침궁에 있던 태후가 기뻐하며 손짓을 했다.
“마마, 무슨 맛있는 걸 드시기에 이렇게 냄새가 좋아요?”
이황자가 태후 앞에 앉으며 앳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먹보, 그저 먹을 것만 밝히지. 네 부황이 알면 발전이 없다고 또 나무랄 게다.”
“마마, 전하께서 음식을 좋아하는 걸 보니 쑥쑥 크시려나 봅니다.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옆에 있던 진안 군왕이 웃었다. 진안 군왕 역시 무심결에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가 정말 좋네요. 어떤 맛있는 걸 드셨습니까?”
태후가 웃으며 궁인에게 눈짓을 했다.
“둘 다 먹보구나. 진씨 가문에서 보낸 튀긴 참새를 가져오너라.”
진안 군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씨 가문이요?”
“진소의 집 말이다.”
“마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진 대인의 부친이 좋아지셨다죠?”
“그래.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한데, 강주에서 신의를 모셔 와서 며칠 만에 고쳤다더구나.”
어느새 궁인이 참새 두 접시를 가져와 이황자와 진안 군왕 앞에 차려 놓았다.
“대단하네요. 못 고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안 군왕이 물었다. 그런 일에 관심이 없는 이황자는 벌써 참새를 먹고 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지 않느냐. 나무라자는 게 아니라 너무 오래 편히 지내다 보니 태의들 실력도 퇴화한 것 같다.”
태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민간엔 정말 신의가 있는 모양이야.”
“마마, 맛있어요. 더 먹을래요.”
벌써 두 개를 먹은 이황자가 손에 기름기를 묻히고 말했다.
태후는 얼른 궁인을 시켜 닦아 주도록 했다.
“더 남았다. 진 부인이 숙수를 궁에 남겨 두고 갔어. 어전방 숙수가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 앞으로는 너희가 먹고 싶을 때 먹고 먹을 수 있을 게야.”
“아, 저도 봤습니다. 진 부인이 숙수를 데려왔군요. 찬모도 데려오고요.”
진안 군왕이 참새를 들고 먹으며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자 태후가 웃었다.
“아니다. 그 애는 진 부인의 여식이야.”
태후가 웃으며 옆에 있던 궁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랬지? 옷차림이 아주 독특하더구나. 얼굴도 예쁘장하고.”
“이름은 ‘소’고, 집에서 열여덟째라고 합니다. 올해 열네 살이고요.”
궁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궁인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입을 닦았다.
진소, 진십팔랑이라?
잠시 한담을 나눈 진안 군왕은 태후의 침궁에서 태교 중인 현비를 생각해 이황자에게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모후께서 전하의 공부 내용을 물으실 겁니다.”
진안 군왕의 말에 이황자는 시무룩해졌다.
“마마.”
이황자가 태후를 보며 몸을 배배 꼬았다.
“착하지, 어서 가거라. 황후가 다 널 위해 그러는 거야. 스승님께 열심히 배우라고.”
태후가 웃었다.
“온 김에 참새를 싸 가세요. 마마 덕에 인심 좀 쓰면 좋죠.”
진안 군왕의 말에 이황자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도 웃으며 궁인에게 싸 주라고 명한 후, 자애로운 미소로 진안 군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 보거라. 이황자는 아직 어리니 네가 잘 돌봐 주고. 나중에 너와 대황자 모두 출궁하면 외로울 게야.”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괜한 걱정이세요, 마마. 곧 아우가 생기지 않습니까.”
태후가 활짝 웃었다.
“그래, 네 상서로운 말대로 됐으면 좋겠구나. 현비에게 가서 전하거라. 군왕이 함께 놀 아우를 기다리고 있다고.”
웃으며 말을 전하러 갔던 궁인이 금은보화가 담긴 함을 들고 왔다.
“현비마마께서 군왕께 상으로 내리신답니다.”
“감사합니다, 마마.”
진안 군왕은 웃으며 함을 받고 태후를 보고 말을 이었다.
“마마, 현비마마께선 이런 걸 주시네요.”
태후가 멈칫했다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얌체 같은 것, 또 본궁의 주머니를 탐내지?”
태후가 궁인에게 눈짓했다.
“상을 내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