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26
교랑의경 126화
정교랑의 마차가 옥대교에 멈춰 섰다.
“아씨, 여기서 지내세요?”
몸종은 보따리를 끌어안고 마차에서 내려 저택을 훑어보며 물었다.
“아니, 여긴 아씨의 저택이고 아씨는 외조모님 댁에서 지내셔.”
시녀는 달려 나온 금가아를 보며 웃었다.
“둘은 한 식구였으니까 잘 알지?”
“청매 누나!”
금가아가 대번에 알아보고 놀라 소리쳤다.
“누나도 경성에 온 거야?”
몸종이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금가아, 또 내 이름을 잊었구나.”
전에는 청매라고 불렀고 아씨를 따른 후부터 반근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씨를 모신 지 얼마 안 되어 정씨 저택에서 이사를 나간 탓에 정씨 가문 하인들은 대부분 몸종의 새 이름이 익숙하지 않았다.
“반근 누나.”
금가아가 몸종과 시녀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휴, 반근 누나가 둘이 됐네. 똑같이 부르면 헷갈리지 않을까?”
“안 그래.”
몸종과 시녀가 동시에 말했다. 그러더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 이름은 됐으니 원래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 우린 이만 돌아가야 해. 둘은 여기서 지내.”
시녀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일 올게. 너한테 맡길 일이 있어.”
정교랑이 마차의 휘장을 들고 몸종을 보며 말하자 몸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잘됐네, 이제 너랑 같이 있을 사람 있겠다.”
시녀가 금가아를 보고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금가아와 몸종은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너무 잘됐다, 청매…… 아니, 반근 누나. 누나도 와서.”
“그래, 너도 아씨를 따라왔구나.”
두 사람은 웃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주씨 저택.
마당으로 들어서던 정교랑이 걸음을 멈췄다. 시녀도 멈칫하여 대청 쪽을 바라봤다. 몸종들은 회랑 아래에 조용히 시립해 있고, 활짝 열린 문 안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주육낭의 모습이 보였다.
“신선이 돌아오셨군.”
주육낭이 냉소했다. 정교랑이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왔다.
“공자님, 또 무슨 일이세요?”
시녀가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
“저희 아씨의 규방인데, 함부로 들어오시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그러더니 시녀는 주육낭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깜박했네요. 여긴 공자님의 댁이고 우린 얹혀사는 건데 말이죠.”
시녀는 예를 표하는 시늉을 하며 사죄했다.
“소인이 무례를 범했으니 용서하세요.”
“시끄럽다! 어느 안전이라고 네가 입을 열어!”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정교랑이 자리에 앉아 주육낭을 쳐다봤다.
“그럼, 그쪽이 말해 봐요.”
주육낭이 바닥에 있던 검을 발로 탁 차올려 손에 쥐고 정교랑에게 건넸다.
“신선이면 어진 마음이 있겠지?”
정교랑은 시녀가 건네는 물을 받고 주육낭을 힐끔 쳐다봤다.
“할 말 있으면 해요.”
주육낭이 정교랑의 팔을 홱 낚아채더니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아씨!”
시녀가 놀라 소리치며 얼른 부축하려고 했다. 정교랑의 손에 있던 물이 바닥에 엎질러졌다. 끌려나가느라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정교랑이 금세 중심을 잡고 따라 나간 덕에 봉변을 당하진 않았다.
“공자님, 왜 이러세요?”
시녀는 따라가며 막으려 했지만 주육낭이 밀치는 바람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마당에 있는 여종들과 몸종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문 채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시녀는 눈물을 흘릴 새도 없이 일어나 뒤따라갔다. 길에서 마주친 여종들과 몸종들은 황급히 놀라 비켜서며 주육낭이 정교랑을 끌고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서 부인께 고해.”
여종과 몸종들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주육낭이 방문을 발로 찼다. 낮고 어두운 하인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벽 쪽에 있는 침상에 여인 하나가 누워 있을 뿐이었다.
“신선, 어진 마음이 있다면 이 검을 들고 가서 통쾌하게 보내 줘라!”
주육낭이 정교랑을 안으로 밀치며 소리쳤다. 보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챙 하는 소리를 냈다. 침상 위에 누운 여인은 이미 의식이 없는 듯, 검 소리가 나는데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교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똑바로 선 채 자신의 팔만 천천히 주물렀다.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아씨!”
울며 따라 들어온 시녀는 문가에 선 주육낭을 들이받고 곧장 달려가 정교랑의 팔을 확인했다.
“육낭!”
진 공자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리더니 두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급히 걸어왔다.
“이게 웬 소란이야!”
“그래, 내가 소란을 피웠다! 애초에 내가 네 시녀를 데려가면서 소란을 피웠어. 내가 매정하고 의리가 없었지. 그리고 저 애도!”
주육낭이 몇 걸음 걸어가 침상 위에 누운 여인을 가리켰다.
“이 애도 마찬가지야. 널 버리고 날 따라 도망쳤지. 얘도 매정하고 의리가 없었어. 그래, 우리가 둘 다 매정하고 의리 없이 굴었다. 바보인 네가 어떻게 지내든 신경 안 썼어. 이젠 복수했으니 됐냐? 얘가 자결하겠다고 목을 맸단 말이다.”
자결하겠다고 목을 맸다는 소리에 시녀는 저도 모르게 울음을 뚝 그치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정교랑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지. 고생해도 싸고 죽어도 싸. 진작 죽었어야 했다.”
침상 위의 반근이 흐느껴 울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주육, 괜히 일 만들지 말랬지!”
진 공자가 소리치며 들어와 정교랑을 쳐다봤다.
“오늘 낭자의 몸종이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다가 그만 못된 마음을 먹고 자결을 시도했답니다. 낭자와는 무관한 일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위로할 것 없어. 누가 위로해 달래?”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서 정교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고 싶었던 광경이 이거지? 넌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가 잘못을 저질러서 자기한테 미안해하기를. 빌어먹을, 아마 좋아하기도 모자랄걸?”
“주육, 입 다물어!”
진 공자도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정 낭자, 얘가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나서 이러는 겁니다. 반근도 생각을 잘못했고, 육낭도 생각을 잘못했어요. 그 잘못된 생각으로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매듭을 풀지 않으면 끝나지 않겠죠. 이들의 업보고 인과응보입니다. 육낭이 어리석었으니 너무 언짢아하지 마세요.”
진 공자는 그러면서 옆에 있던 시녀를 재촉했다.
“어서 너희 아씨를 모시고 돌아가라.”
시녀가 얼른 정교랑을 부축했지만 정교랑은 걸음을 옮기는 대신 뒤돌아 침상을 쳐다봤다. 낡고 해진 이불을 덮은 작은 형체가 구석에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지는지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방 안은 고요했다.
“아씨, 아씨.”
반근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침상 위에서 쿵쿵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리며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을 깼다.
“아씨, 제가 아씨를 버리고 갔어요. 육공자를 따라가고 싶었거든요. 제가 아씨를 버린 거예요. 아씨를 뵐 낯이 없어요. 마지막 인사조차 못 올리고 떠났죠. 이 반근이 아씨를 떠났어요. 이 반근이 아씨를 버렸다고요…….”
아씨, 반근이 말씀도 안 드리고 떠났어요. 반근이 아씨를 버린 거예요. 아씨, 반근이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났다고요…….
반근은 결국 엎드려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안팎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정교랑이 손을 뻗었다.
“물.”
다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정교랑의 손에 들려 있던 물잔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물을 마시려다가 주육낭에게 끌려 나오면서 물을 쏟게 됐지만, 물잔은 여전히 손에 꼭 들린 상태였다.
아무리 큰 위기가 닥치고 아무리 속수무책의 상황이 와도, 아씨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으며 그저 묵묵히 인내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었으니, 자신을 통제하는 일은 포기하는 일이 없었다. 마차에서 납치될 때도 그랬고, 비틀비틀 끌려가면서도 그랬다.
시녀는 왈칵 눈물이 나왔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좀 봐!”
진 공자가 굳은 얼굴로 소리치며 또다시 지팡이로 주육낭을 내리쳤다. 시녀는 어수선한 방 안에서 물을 찾았지만, 낡은 주전자며 그릇은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물 가져와.”
시녀는 울면서 앙칼진 목소리로 밖에 대고 소리쳤다. 밖에서 구경하고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가 곧 물을 가져왔다.
자리에 앉은 정교랑은 잔을 받고 천천히 물을 마셨다. 반근은 엎드려 울고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한쪽 옆에 서 있었지만, 진 공자는 자리에 앉았다.
“정 낭자, 육낭이 이리 아둔하게 군 건 뜻밖의 일 때문입니다. 마음이 급했어요.”
잠시 침묵하던 진 공자가 입을 열었다.
“뜻밖? 얘가 이렇게 만든 거야!”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자 진 공자는 다시 지팡이로 주육낭을 쳤다
“아직도 남 탓을 해? 아직도? 누가 가라고 떠밀었어? 저 몸종을 데려온 것도 누가 떠밀어서 한 일이야? 본인이 자초한 화인데 누굴 원망해! 황당한 소리!”
“그래, 나도 알아. 내가 잘못했어. 우리 주씨 가문이 다 잘못했다고!”
주육낭이 소리치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 이제 다 밝혀진 일인데 계속 이렇게 시치미 뗄 거야? 그래,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속 시원히 말해 줄 순 없어?”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주육낭을 쳐다봤다. 눈밭에서 싸리나무를 지고 와 죄를 청한 후로, 이 여인이 주육낭을 똑바로 직시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굳은 얼굴의 주육낭도 팽팽한 시선으로 맞섰다.
“사실 그쪽이 한 일은, 미안하다고 할 수 없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
주육낭은 코웃음을 쳤다.
“어떤 게 진짜 미안한 일인지, 알고 싶어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낮고 어두컴컴하며 싸구려 연지와 조악한 향분 냄새가 섞인 방 안에서 자리에 앉은 소녀와 꼿꼿이 선 소년이 대치하고 있었다. 서 있는 건 분명 자신인데, 이번에도 상대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육낭은 몸을 더욱 곧추세우며 소녀의 두 눈을 피하지 않고 팽팽한 시선으로 받아쳤다.
한쪽 옆에 있는 시녀도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실수를 세 번 거듭하면 안 된다고 했던 아씨의 말이 떠올랐다. 주육낭이 아씨 앞에서 시비를 건 게 벌써 세 번이 넘었는데, 그럼 아씨는, 이제 어떻게 하실까?
“정 낭자, 낭자의 뜻은 잘 압니다. 이들이 아둔했어요. 낭자의 말을 못 알아듣고,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았죠. 그러니…….”
진 공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진 공자를 쳐다보며 말을 잘랐다.
“그래도 저 사람은, 여전히 당신의 친구예요. 그렇죠?”
진 공자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멈칫했다가 곧 빙긋 웃었다.
“당신은, 저 사람이 잘못한 걸 알아도, 저 사람을 나무라는 대신, 계속 돕겠죠.”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언제나, 저 사람을 도왔어요. 술을 마실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곡진히 위로하고 있잖아요.”
동병상련을 느끼며 함께 울분을 토로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대립하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한 것도 사실이었다. 진 공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역시 잘 아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