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28
교랑의경 128화
방 안.
정교랑이 물을 마시고 나자 시녀가 손을 뻗어 잔을 받았다.
“토란죽을 끓였는데 드시겠어요?”
“연근 넣었니?”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정교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녀가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방에는 정교랑과 반근만이 남았다. 반근은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녀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반근은 또다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려 왔다.
“너도 알 거야. 내가 전에는,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 지금은, 말하는 걸 안 좋아해.”
정교랑이 말했다.
“소인, 알아요.”
반근이 목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입을 열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감히 울 수 없어 꾹 참았다. 찢어졌던 입술에서 또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결국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반근은 얼른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닦았다.
정교랑이 반근을 힐끔 쳐다봤다.
“너, 다시 돌아오고 싶니?”
낯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감히 그럴 순 없었다. 하지만……. 반근이 바닥에 엎드렸다.
일찍이 마음이 가는 대로, 멋대로 잘못을 저지른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한 번 더 해도 되지 않을까?
“소인 돌아오고 싶어요.”
반근은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돌아와.”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차오른 눈물에 시야가 흐릿해져 눈앞에 있는 여인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 곁엔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자코 있었다. 원하는 것을 말했으니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넌 집에 가 있어.”
집? 반근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봤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던 금가아는 깜짝 놀랐다.
“반근 누나, 또 왔네.”
금가아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마차에서 내린 시녀는 웃으며 정과 꾸러미를 던져 주었다. 안에 있던 몸종도 소리를 듣고 나왔다. 미처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는 또 다른 몸종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소개 안 해도 다들 아는 사이지?”
시녀가 웃으며 반근을 가리켰다. 몸종과 금가아는 반근을 쳐다보더니 멈칫했다. 반근은 정씨 저택에서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았다. 몸종이 온 지 며칠 만에 떠난 터라 이미 기억이 흐릿했다. 더군다나 금가아는 아예 본 적도 없었다.
“혹시, 반근?”
어리둥절해하던 몸종이 누군지 알아보고 외쳤다. 금가아도 그 말에 퍼뜩 깨달았다.
“아, 원래 아씨를 모시다가 다른 사람 따라 도망친 그 반근 누나구나!”
반근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시녀가 금가아를 찰싹 때리며 꾸짖었다.
“얘가 뭐라는 거야. 반근 낭자는 주씨 가문 사람이니 주씨 가문으로 돌아오는 게 당연하지.”
금가아도 자신의 말이 당돌했던 걸 깨닫고 멋쩍어했다.
“저기, 우리 누나가 많이 고마워했어.”
금가아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수습할 말을 찾았다.
“우리 누나가 그때 입은 은혜를 생각해서 나한테 아씨를 잘 모시라고 했거든.”
반근이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네 누나라면…….”
“춘란 누나 말이야, 사공자를 모시던 춘란. 누나가 사공자의 병을 고쳐 줬잖아.”
얘도 병을 고칠 줄 알아? 하긴 그러니 아씨의 시중을 들었겠지. 몸종과 시녀가 반근을 쳐다봤다. 다른 건 몰라도 눈치는 많이 늘어난 반근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니야.”
반근이 금가아를 쳐다봤다.
“내가 사공자의 병을 고친 게 아니야. 아씨께서 고치셨어. 난 아씨를 대신해 가르쳐 줬을 뿐이고.”
금가아는 놀랐다가 금세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여긴 아씨가 사들인 집이야.”
시녀가 반근을 잡아끌었다. 어쩐 일인지 반근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싶진 않아 이름은 빼고 말했다.
“금가아 혼자 지내서 많이 심심한가 봐. 여기서 지내면서 청소 좀 도와줘.”
거기까지 말한 시녀는 반근의 손을 가볍게 토닥여 주며 바짝 다가갔다.
“금가아가 아직 어려서 철없는 말을 잘해. 이해해 줘.”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 알아. 난 아씨의 말씀만 들을 거야. 괜한 생각 안 해. 사실은 사실이니까. 현실도 인정 안 하고 남의 말을 두려워하면 제대로 살 수 없어.”
시녀가 웃으며 손을 토닥였다.
“그래야지. 다 같은 반근이니 이 이름값을 해야 하잖아.”
시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휴, 내가 또 내 칭찬을 했네. 비웃지 마.”
반근이 웃었다. 여전히 조심스러운 웃음이었지만 눈 속에 담겨 있던 불안은 많이 걷혀 있었다. 반근은 마차를 타고 떠나는 시녀를 바라봤다.
“마침 밥을 짓고 있었는데 많이 했거든. 셋이 먹어도 충분하겠다.”
몸종은 웃으며 말하고는 금가아에게 소리쳤다.
“가서 장작 가져와.”
금가아가 알았다고 하고 뛰어가려는데, 반근이 한발 먼저 움직였다.
“내가 할게.”
반근이 마당으로 들어갔다. 몸종도 웃으며 따라 들어가고, 금가아는 맨 뒤에 남아 대문을 닫았다. 두 사람이 늘었으니 북적북적하겠네. 그런데…….
“반근이 너무 많아.”
금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부르지?”
삼월, 봄비가 내린 후 날씨는 한결 따뜻해졌다.
정교랑의 작은 서재에 있던 진단랑이 붓을 내려놓았다. 진단랑은 코를 비비고는 맞은편에서 여전히 진지한 모습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 정교랑과 진십팔랑을 쳐다봤다. 잠시 망설이던 진단랑은 치마를 들고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마당은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였고, 화단에는 파릇파릇 푸른 싹이 돋아나 있었다. 진단랑이 심호흡을 했다.
“단랑 아씨.”
문 앞 회랑 아래에 앉아 버선을 짓고 있던 시녀는 진단랑을 보고 얼른 일어났다.
“다 쓰셨어요?”
진단랑은 쪼르르 달려와 자리에 앉더니 마당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난 한 장 썼어.”
진단랑이 손목을 흔들었다.
“난 집에서 숙제 마치고 나서 온 거야.”
진단랑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기껏 왔는데 놀지도 못하고 글씨 연습을 해야 한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왔지.
“아씨는 아직 어리니 한 장 쓴 것도 잘하신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아씨들께서 글씨 연습을 마치고 같이 놀아 주실걸요.”
시녀가 바느질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간식 가져다드릴까요? 어제 아씨께서 직접 만드신 거예요.”
진단랑은 손뼉을 치며 좋다고 하고, 안에서 쟁반을 들고 오는 시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접시 몇 개에 사각형, 원형, 마름모꼴 간식이 담겨 있었다. 색상도 노란색, 흰색, 검은색으로 다양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우와.”
진단랑은 시녀가 건네는 은수저를 받아 신이 나서 먹기 시작했다. 진십팔랑과 정교랑이 글씨 연습을 마치고 나왔을 무렵, 진단랑은 이미 접시를 깨끗이 비운 후였다.
“단랑 아씨, 그만 드세요.”
시녀가 접시를 빼앗으며 말했다.
“간식을 밥처럼 드시면 안 되죠.”
“착한 언니야, 하나만 더 먹을래.”
진단랑이 은수저를 들고 애걸했다.
“단랑, 무례하게 굴지 마.”
진십팔랑이 나섰다.
“언니, 정 언니가 만든 간식은 엄청 맛있어.”
진단랑이 진십팔랑을 붙잡고 눈빛을 반짝였다.
“알아.”
진십팔랑이 웃었다.
진 노태야가 진단랑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정교랑을 만난 일은 이미 집에서 여러 번 언급된 이야기였다. 물론 진단랑이 팥 춘권을 얻어먹었다는 세부적인 내용도 빠지지 않았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식탐을 보이거나 게걸스럽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가정교육을 받은 정단랑이었다. 더구나 진씨 가문은 먹고 입을 걱정이 없는 집안이었다. 그런데도 그토록 잊지 못하는 걸 보면 아무 데서나 먹을 수 없는 훌륭한 맛이 틀림없을 터였다.
진십팔랑은 시녀가 들고 있는 쟁반으로 눈길을 돌렸다. 쟁반에는 죽통 두 개만이 남아 있었다.
“죽통으로 만든 각서(角黍: 찹쌀을 싸서 찐 음식)예요.”
시선을 느낀 시녀가 웃으며 설명했다.
“맞아, 엄청 맛있어. 안에 대추랑 밤도 들었어.”
진단랑도 거들었다. 이쪽에 있던 정교랑이 손에 든 물잔을 내려놓았다.
“아씨, 나가시려고요?”
시녀는 얼른 간식을 내려놓고 물었다. 요즘 들어 정교랑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매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진십팔랑과 글씨 연습을 한 후 옥대교 저택으로 갔다가 거기서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그 말을 들은 진단랑은 먹을 것에 연연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언니, 우리 집에 가서 놀아요.”
“다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나랑 같이 놀러 나갈래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정교랑과 진단랑, 진십팔랑은 밖으로 나가며 얘기를 나눴다.
“삼월이라 나들이 가기 좋은 때거든요.”
진십팔랑이 말을 이었다.
“맞아요. 정 언니, 우리 같이 놀러 나가요.”
진단랑이 정교랑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문 밖으로 나가 보니 진씨 가문의 마차는 벌써 대기 중이었지만, 주씨 가문의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아씨, 부인과 아씨들께서 다들 출타 중이시라…….”
여종 하나가 불안해하며 말했다.
“마차가 한 대도 없다고요?”
시녀가 언짢은 듯 인상을 쓰며 물었다.
“아랫것들이 타는 마차만 남았는데…….”
“그럼 내 거 타요. 가는 곳으로 데려다줄게요.”
진십팔랑이 얼른 나섰다.
“그래요.”
정교랑은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눈 깜짝할 새에 봄이 온 듯했다. 거리에는 생기가 넘쳤고, 머리에 꽃을 꽂고 지나가는 사내들도 점점 많아졌다.
“아씨, 앞쪽 길이 막혔습니다. 다른 길로 가시죠.”
마부가 말했다. 휘장을 들고 바깥 풍경을 보고 있던 시녀는 얼른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쪽에는 과연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세상에, 깜빡했네요.”
시녀는 퍼뜩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오늘은 방이 붙는 날이에요.”
정교랑도 바깥을 쳐다봤다.
“아직 국자감에 도착한 것도 아닌데, 사람이 이렇게 많네?”
진십팔랑의 물음에 시녀는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밤부터 와서 자리를 맡는 사람도 있는걸요. 저 앞 거리는 사람으로 발 디딜 틈도 없어요. 방을 보려는 수재들은 일부고, 구경 온 사람과 사윗감을 찾으러 온 사람이 더 많죠.”
시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진십팔랑은 올해 처음으로 경성에 온 터라 그런 풍속에 대해 들어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진십팔랑이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까맣게 몰려든 인파가 길을 따라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저 안쪽에서 환호와 고함 소리가 수시로 들려왔고, 이따금 울음소리도 들렸다.
시녀는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좌우를 살핀 다음 마부에게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려 주었다.
“반근은 경성을 아주 잘 아네요.”
진십팔랑은 바깥에 있는 시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오래 살았거든요.”
“엇, 언니도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
진단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니.”
정교랑은 바깥에 시선을 둔 채로 대답했다. 진십팔랑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진단랑을 제지하고,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밖을 쳐다봤다. 오가는 인파 속에서 젊은 사내 하나가 반근 옆으로 와 섰다.
“이런 우연이, 또 보네.”
한원조가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 방을 보러 오셨어요?”
시녀 역시 웃으며 물었다. 다정하고 공손한 태도였다. 아씨께서 이 공자를 위해 그토록 애를 쓰신 걸 보면, 아씨께 중요한 인물이 틀림없었다. 한원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삼 년 후를 기약해야겠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공자님.”
시녀의 위로에 한원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심 안 해. 출중한 재주를 갖춘 것도 아닌데, 한 번에 붙을 리가 없지.”
한원조가 크게 울적해하지는 않는 걸 보고 시녀도 마음을 놓았다. 한원조가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