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48
교랑의경 148화
진안 군왕께서는 어떤 왕비를 맞이하시려나.
부싯돌이 부딪히는 소리에 감상에 빠져 있던 궁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에 있던 소년은 부싯돌 놀이도 싫증이 나는지, 부싯돌을 내려놓고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궁녀가 자세를 바로 앉고 다른 궁녀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역시나 또 주무시려나 봐.”
궁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들어가서 말씀을 올릴까? 폐하와 태후께서 책을 외우라는 벌을 내리셨는데, 다 못 외우시면 어떡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두 궁녀는 급히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쾅 소리와 함께 소년이 문을 걷어찼다. 문밖으로 나온 소년은 기지개를 켜며 심호흡을 했다.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구나.”
두 궁녀가 얼른 일어나 나지막이 고했다.
“전하, 지금은 나가실 수 없어요. 폐하와 마마께서 금족령을 내리셨잖아요.”
진안 군왕은 김이 새는지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며칠 남았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궁녀에게 물었다.
“아직 이틀 남았습니다.”
궁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다시 짧게 아, 하고 대꾸하고는 긴 옷소매를 휙 털고 뒷짐을 졌다.
“그럼, 책 같이 읽을 사람 좀 불러줘.”
책을 읽는 일에 같이 읽을 사람이 왜 필요하나, 그저 같이 놀아줄 사람이 필요한 거겠지.
궁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시가 불려 왔다. 내시가 안으로 들어간 후로 책 읽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바둑 두는 소리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내가 본 건 다른 사람이었어.”
진안 군왕이 길쭉한 손가락으로 바둑 한 알을 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내시도 조심스럽게 한 수 두며 대답했다.
“하지만 진소, 진십팔랑은 한 명밖에 없습니다.”
진안 군왕은 바둑알을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고민했다.
“그날 입궐한 사람도 진십팔랑이고요.”
내시가 덧붙여 말했다. 진안 군왕이 다음 수를 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잘못 본 거겠지. 그날 성에서는 틀림없이 봤어. 그 낭자였다고. 분명 진씨 가문이었어. 진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면, 필시 진씨 가문과 연관이 있을 거야.”
“다만 군왕께서 지금 궁 밖을 나가지 못하시고, 나가실 수 있다 하더라도 진씨 가문의 부녀자를 보러 가긴 어렵습니다.”
내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안 군왕은 다시금 바둑알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혹은, 그 낭자가 진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면? 진씨 가문 사람들과 같이 있다고 해서 꼭 진씨 가문의 사람인 건 아니잖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자 군왕의 표정이 초조해졌다.
진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면 왔다가 떠날 수도 있는데. 그날 잠시 왔다가 바로 떠났을 수도 있잖아.
진안 군왕은 자세를 고쳐 앉고 그날 문 앞에서 고개를 돌리던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군왕이 입을 떼려던 찰나, 문 앞에 있던 궁녀가 아뢰었다.
“군왕, 이 태의께서 오셨습니다.”
진안 군왕은 얼굴에 있던 초조한 기색을 싹 거두고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꿨다. 바둑판 뒤에 앉은 진안 군왕은 안으로 걸어오는 이 태의를 쳐다봤다. 이제 막 일을 마쳤는지 이 태의는 아직 관복을 입고 있었고 뒤따라오는 아이의 손에는 약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 대인께서 어찌 시간을 내어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맞이했다.
“현비마마께서 회임으로 헛구역질이 심하시다 보니, 태후께서 마마를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은 궁에서 지내고 있지요.”
이 태의가 예를 표하고 군왕 앞에 꿇어앉았다.
“요즘 밖에서 사부님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 귀찮아 죽겠어요.”
뒤에 있던 아이가 덧붙였다.
“이 대인의 의술이 고명해서 그렇겠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이 태의의 의술이 고명하다는 말은 아첨이나 허언이 아니었다.
“무슨요, 그 사람들은 사부님께서 못 고친다고 말씀하시길 기다리는 거예요. 애초에 사부님한테 병을 봐 달라고 하려는 게 아니고요.”
아이가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뭐라고?
“못 고친다고?”
진안 군왕이 물었다. 이 태의는 언짢은 듯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아이를 꾸짖었다.
“무례하구나. 언제부터 군왕 앞이 네가 함부로 낄 수 있는 자리더냐?”
아이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아니, 괜찮다, 괜찮아. 계속 말해 보거라.”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심심해 죽을 뻔했는데, 재밌는 얘깃거리구나. 어서 말해봐라. 어쩌다 못 고친다는 말을 들으려 다들 안달이 났을까?”
아이는 뜸을 들이면서 사부님의 눈치를 살폈다. 사부를 모시는 것은 평생의 아버지로 섬기는 일과 같다지만, 충과 효는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법이다. 군왕께서 하문하시는데 답을 안 해드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게, 그 사람들은, 정 낭자한테 치료받고 싶어 하거든요.”
아이가 쭈뼛쭈뼛 말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혼란스러운 말에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정 낭자가 누군데?”
“진 노태야와 동 내한의 병을 고친 사람이에요.”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며 눈빛도 반짝거렸다. 아이는 손까지 이리저리 휘저어가며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능력이 있는데, 죽을 정도의 불치병이 아니라면 절대 치료를 하지 않는대요. 듣자니 이 진인의 제자래요!”
“닥쳐라!”
이 태의의 호통에 아이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사정을 눈치챈 진안 군왕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된 일이군!”
군왕이 손으로 이 태의를 가리켰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만 고친다니, 진 노태야와 동 내한도 전부 이 대인이 못 고친다는 진단을 내린 후에 그 낭자가 고쳤겠군요. 그래서 다들 하나같이 대인한테 못 고친다는 말을 들으려고 찾아가는 거고요. 정말, 정말 너무 재밌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와, 급기야 군왕은 체면도 내던진 채 박장대소했다.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이 태의가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했다. 진안 군왕이 서둘러 이 태의를 붙잡았다.
“아, 잘못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진안 군왕은 이 말을 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풉 웃었다.
이 태의를 붙잡고 한참 동안 좋은 말로 달랜 끝에 이 태의가 겨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아이를 밖으로 내쫓은 후, 진안 군왕과 이 태의는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군왕의 바둑 상대가 내시에서 이 태의로 바뀌었다.
바둑 두 판을 끝내자, 이 태의는 별 재미가 없는지 예를 표하고 물러나려 했다.
“요 며칠 군왕께 금족령이 내렸다기에, 심심해하실까 싶어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이 태의가 수염을 쓰다듬고 놀리는 웃음을 지으며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진안 군왕도 따라 웃었다.
“맞습니다, 맞아요. 서로 위안 삼을 수 있으니 좋네요.”
그 말의 속뜻을 알아차린 이 태의가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떴다. 이 태의가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진안 군왕은 다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진짜 뜻밖이네. 그토록 궁에 있기 싫어하던 이 태의가 궁에 숨어들게 할 정도라니. 정 낭자라는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하네.”
“소인도 소문을 들었습니다. 진씨 가문이 특별히 강주에서부터 모셔온 신의라고 합니다. 이 진인을 만나 신선의 비방을 얻어 죽은 사람도 살린대요. 병을 치료하는 원칙이 좀 독특하지만요.”
진안 군왕은 개의치 않고 웃었다.
“독특하지 않으면 이 넓은 땅에서 어떻게 돋보이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그 낭자는…….”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진안 군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생각났어, 그 저택.”
내시는 멈칫하며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했다.
“어떤 저택이요?”
“그날 내가 본 저택.”
진안 군왕이 몸을 돌려 내시들을 쳐다보면서 명했다.
“가서 알아봐라. 그 낭자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시들이 동시에 네, 하고 대답했다.
“다만, 물어야 할 것만 물어보고 묻지 말아야 할 것은 함부로 묻지 말아라.”
진안 군왕이 다시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본왕이 어떤 오해도 받아서는 안 된다.”
내시들이 다시 황급히 대답했다.
이렇게 조심스럽고 긴밀하게 찾으시다니. 도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군왕께서 한 번 보고 저토록 못 잊으실까.
반근은 진십팔랑의 시녀가 준 보따리를 받아 들고 연신 감사를 표했다.
“20일에 열릴 선다회 때문에 집에 친척들이 와 계시거든. 십팔랑 아씨께서 손님을 맞이하느라 며칠간은 집을 비우시기 어렵다며 아씨께 말씀을 전하라 하셨어. 정 아씨께서도 동행하신다 하니, 진 부인께서 집안 아씨들 옷을 새로 지으면서 정 아씨의 옷도 한 벌 지어주셨어.”
“마음 써 주신 부인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줘.”
반근이 재차 감사를 표했다.
“그럼 언니, 얼른 들어가, 20일이 되면 마차를 타고 정 아씨를 모시러 올게.”
진십팔랑의 시녀와 반근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반근은 마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였어?”
서무수가 회랑 아래 서서 물었다. 반근이 설명하자 서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또 들렸다.
“또 뭘 까먹은 게 있나?”
대문을 연 반근은 깜짝 놀랐다. 문밖에는 웬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반근을 보자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오랜만에 왔더니 이 집 찾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구려. 하마터면 못 찾아올 뻔했어.”
반근은 다급하게 문을 가로막았다.
“누굴 찾아오셨어요?”
서무수도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자 사내는 흠칫 놀란 듯했다.
“여기 진씨 저택 아닙니까?”
사내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고개를 들고 편액을 올려다봤다. 편액은 글씨가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여긴 진씨 저택 아니에요. 정씨 저택입니다.”
사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내밀어 안쪽을 들여다보려 했다. 서무수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반근이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도련님, 진씨 저택을 찾아온 분이 계시네요.”
서무수를 본 사내는 저도 모르게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여기는 진씨 저택이 아니오, 정씨 저택이지. 잘못 찾아왔으니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시구려.”
사내는 서무수를 훑어보더니 곧 예를 표하며 사과했다.
“제 기억이 틀렸나 봅니다.”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물러났다. 사내는 좌우를 살피며 중얼거리다가 옆집의 문을 두드리러 갔다.
“사람을 찾아왔으면서 제대로 묻지도 않고, 저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한담.”
반근이 투덜거렸다. 두 사람은 시선을 거두고 대문을 닫았다.
길을 묻던 사내는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다시 이쪽을 쳐다보더니 꾸부정했던 자세에서 허리를 곧게 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사내의 얼굴에 가득했던 타향 사람의 초조함 같은 것이 일순간 걷혔다. 사내는 미간을 좁히고는 가던 방향을 틀어 성큼성큼 떠나갔다.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반근과 서무수는 이런 그의 모습을 알 길이 없었다. 시녀가 방문을 열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도 아니다. 사람을 찾는 이였어. 누이는 일어났고?”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은 이미 대청에 앉아 있었다.
“관리인은 일단 두부를 조각할까 생각 중이야.”
서무수가 말했다.
“조각이요? 조각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정교랑의 대답에 서무수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손재는 밤낮없이 두부를 만들고 있고, 이대작이랑 그…… 반근 낭자도 쉴 새 없이 시도 중이야.”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겠지요. 성공할지 모르겠네요, 불과 네댓새 만에.”
“이대작의 칼솜씨가 꽤 쓸 만해. 이렇게 부드러운 것을 조각해 본 게 생전 처음이니 좀 어색해하지만 말이야.”
정교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조각할 때, 물에 넣고 조각하라고 해요.”
물에 넣고? 서무수는 되묻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억해 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