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68
교랑의경 168화
“정 언니!”
잔꽃으로 수놓은 치마를 입은 진단랑이 웃으며 층계를 뛰어 내려왔다.
“아씨, 천천히요.”
시녀가 웃으며 무릎을 구부리고 붙잡아 주려 했다. 진단랑은 벌써 정교랑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정 언니, 정말 우리한테 식사 대접할 거예요?”
진단랑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우리한테 대접하는 게 아니라, 조부님한테 한다고.”
곧이어 걸어 나온 진십팔랑이 말했다. 자연스레 정교랑에게 팔짱을 끼던 진십팔랑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정교랑을 훑어봤다.
“엇, 전에는 나보다 작았던 것 같은데, 며칠 못 본 사이에 나보다 더 큰 것 같네요?”
“정 언니가 언니보다 더 커.”
진단랑이 말했다.
진 노태야의 마당에는 초목이 무성했다. 초여름 햇빛은 소녀와 여자아이의 몸에 얼룩을 만들었고, 그 밝은 웃음은 눈부시게 빛났다.
진 노태야는 눈앞에 펼쳐진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경을 미소로 감상했다. 세 사람은 나막신을 벗고 버선만 신은 채 대청으로 들어왔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이 늙은이의 병이 나은 후로 정 낭자가 이리 찾아온 건 실로 오랜만이구려.”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미소로 받았다.
“꺼리는 건 아니어도 제가 피하는 게 옳죠.”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녀 또래의 소녀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매사 나아가고 물러섬에 이치가 분명했고,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으며 원망도 공포도 없는 듯했다.
아무리 떠들썩하고 시끌벅적한 자리에 앉아 있어도 소녀는 시종일관 홀로 고립된 모습이었다. 일찍이 의지할 곳 없이 살았으니 지금도 의지하지 않고 살려는 거겠지.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이렇게 특별히 찾아왔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진십팔랑과 진단랑이 영문을 모르겠는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우리 어머니가 보내 주신 옷 때문에요?”
진단랑이 묻자 진십팔랑이 진단랑을 노려봤다. 그건 노태야께 고마워할 일이 아니잖아. 그럼 뭐 때문이지?
진십팔랑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많았다. 모든 일에 왜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꼬치꼬치 캐묻는 건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를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십팔랑은 조부를 쳐다봤다. 진 노태야의 담담한 표정에는 미소가 살짝 어려 있었다. 이 낭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는 게 분명했다.
감사라고? 은혜를 베푼 사람과 은혜를 입은 사람은 훤히 아는 일이건만,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만은 영문을 몰랐다.
그간 정 낭자와 조부님은 재진을 받을 때 한 번 본 게 전부인데, 혹시 그때 조부님한테 뭘 부탁드렸나? 요즘 정교랑과 관련된 일은 딱히 없었는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일 리도 없고. 그럼 이렇게 미리 와서 감사를 표할 리 없으니.
“정 낭자, 별말을 다 하시오. 낭자는 내 생명의 은인 아니오.”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생명의 은인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의원의 도를 행했을 뿐이죠. 더구나 노태야께서는 치료비를 주셨으니, 서로 빚진 것도 없고요.”
“그리 말하자면, 나 역시 이번에 딱히 도와준 게 없잖소. 낭자 스스로 자신을 구했을 뿐이지.”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도 미소를 지었다.
“세상살이란 건 힘드니까요. 누군가는 굳이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하지 않아도, 그저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제게, 더없이 큰 도움이 돼요.”
진 노태야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경탄이 섞인 웃음이었다.
사실 진 노태야 역시 이런 일을 벌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적당히 말을 흘려 명성을 얻게 해 주었을 뿐인데, 눈 깜짝할 새에 태평거에서 사람까지 죽어 나가다니.
더구나 이 소식은 보수사의 늙은 승려가 직접 말해 준 것이었고, 겸사겸사 좋은 차까지 대접받았다. 사건이 벌어진 후 이미 닷새가 흐른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놀라 식은땀을 흘렸지만 내심 다행스럽고 기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다회에서 늙은 승려에게 이야기를 꺼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찾아갔다면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이 부족했을 터였다.
살인은 가게를 지키는 사람이 했다지만, 어쨌거나 진짜 주인은 정교랑이었다. 무려 살인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본인도 놀라지 않았으려나?
진 노태야는 눈앞에 있는 어린 낭자를 바라봤다. 무뚝뚝한 표정에서는 놀란 기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설마, 사람이 죽어 나갈 줄 알고 있었던 건가? 어쩌면, 이 낭자의 명으로 죽였을지도 모르지. 문제를 단번에 풀 수 있을 뿐더러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에 충분하니까.
살인이라! 진 노태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쪽에서는 진단랑이 정교랑에게 무언가를 떠들고 있었다. 정교랑의 팔을 먼저 잡고 웃으며 재잘댔다. 정교랑 역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몸을 살짝 틀어 진십팔랑이 속삭이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해가 바뀌는 동안 저 소녀가 많이 컸구나. 여전히 여윈 모습이지만 백옥처럼 희기만 하던 피부에도 혈색이 돌아왔고 살짝 미소를 지으면 더없이 맑고 고와. 초롱초롱한 두 눈도 여느 소녀들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
진 노태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애야. 딱히 의지할 곳도 없는 어린애.
“언니, 우리 밥 사 주러 어디로 데려갈 거예요?”
질문을 던진 진단랑은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대답했다.
“난 태평 두부를 먹고 싶어요.”
“너한테 대접한다는 것도 아니잖아.”
진십팔랑이 웃으며 말했다.
“노태야는 조용히 요양하셔야 해.”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대접하려면 성의를 보여야지. 내가 직접 노태야께 탕을 만들어 올릴 거야.”
그 말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언니가 직접 만든다고요? 반근한테 시키지 않고요?”
전에 먹었던 간식도 정교랑이 만든 것이라고 하긴 했다. 몸종과 시녀는 주인의 것이므로 몸종과 시녀가 만든 음식은 곧 주인이 만든 음식을 뜻했다. 그러니 정교랑 본인도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쭉 바보로…… 지냈다고 하지 않았나? 먹고 마시는 것도 누가 시중을 들어야 한댔는데?
문가에 조용히 꿇어앉아 있던 반근이 나서며 예를 올렸다.
“소인의 음식은 전부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반근이 웃으며 말하자 진 노태야는 퍼뜩 옛일을 떠올렸다.
“언니, 정말 맛있어요. 이거 이름이 뭐예요?”
“팥 춘권이야.”
“어린 낭자가 솜씨도 좋구려.”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아, 역시…….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오호, 그럼 기쁘게 받겠소이다.”
진소가 문을 나설 때였다. 몸종 몇 명이 웃고 떠들며 달려가는 모습에 진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곁에 있던 시종이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무슨 짓이냐? 버릇없이.”
겁을 먹은 몸종들이 쭈뼛쭈뼛 예를 표했다.
“노야께 아뢰옵니다. 정 낭자께서 직접 요리를 하신다기에, 저, 저희도 구경하러 가고 싶어서요.”
정 낭자? 진소 얼굴에서 불쾌한 기운이 순식간에 걷혔다.
“오늘 정 낭자가 왔느냐?”
과연 정 낭자라는 한마디에 진소는 화를 풀었다. 진씨 가문은 자녀의 법도에 엄격했지만 정 낭자는 진씨 가문에서 진씨 가문의 자식들과 같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법도를 엄격히 지키지 않아도 됐다.
세 몸종은 으쓱해져서 고개를 숙인 채 혀를 날름거렸다.
“네, 노태야를 뵈러 특별히 오셨대요. 지금은 노태야를 위해 요리하고 계시고요.”
몸종들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직접 부엌에 들어갔다고? 이 낭자가…….
“알았다.”
진소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눈빛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몸종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숙인 채 쿡쿡 웃다가 까치발을 들고 달아났다.
대청 안. 진 부인이 남편의 옷을 받아 정리하며 웃었다.
“스스럼없이 구네요. 정중하게 답례를 전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소?”
진소가 웃으며 묻자 진부인이 웃으며 눈을 흘겼다.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진소가 자리에 앉아 시녀가 건네는 차를 받아 천천히 마셨다.
“처음엔 많이 이상했어요. 좀 서먹하기도 했죠. 근데 오래 보다 보니까 오히려 좋더라고요.”
진 부인도 자리에 앉아 감상에 젖어 말했다.
“조용하고 쓸데없는 일을 안 하면서도 예절을 알고 도리에 밝아요.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워요. 그래서 단랑이 그리도 좋아하고 따르나 봐요. 좋은 사람은 아이들이 제일 잘 알아보잖아요.”
“그렇소. 사람의 좋은 점이 보이면 좋게 느껴지지.”
같은 시각 강주의 정씨 저택에는 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봄에 새로 수리한 연못은 경치가 수려하여 사람이 살기 좋았다. 집안 낭자들은 다시 연못 근처로 거처를 옮겨 왔다. 비가 오자 자매들은 한데 모여 바둑을 두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밖에서 딸각딸각 나막신 소리가 들리더니 도롱이를 입은 정칠랑이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층계를 올라 회랑 아래로 온 정칠랑은 나막신을 벗어 던졌다. 회랑 아래에 앉아 있던 몸종들이 얼른 일어나 도롱이를 벗겨 주고 정칠랑을 안으로 안내했다.
“칠랑, 내 돗자리 젖잖아! 아버지가 남양에서 사다 주신 귀한 돗자리란 말이야!”
정육랑이 소리쳤다. 정칠랑은 콧방귀를 뀌며 비켜서기는커녕 돗자리에 두 번이나 힘껏 발을 굴렀다. 두 자매가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를 취하자 몸종들과 여종들이 얼른 말렸다.
“이게 중요한 게 아냐. 엄청난 소식이 있어.”
정칠랑이 눈을 반짝이며 자매들 앞에 앉았다.
“엄청난 소식을 네가 어떻게 알아.”
정육랑이 같잖다는 듯 턱을 들어 올리며 대꾸하자 정오랑과 정사랑이 중재에 나섰다.
“칠랑이 왜 안 보이나 했더니, 엄청난 소식을 듣고 왔구나.”
정칠랑이 손을 내저었다.
“진짜라니까.”
정칠랑이 앞으로 나서며 세 언니를 쳐다봤다.
“그 바보가, 혼인을 한대!”
정칠랑이 상상했던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세 자매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누가 또 정칠랑의 심기를 건드려 바보라고 불리는 거지? 집안 자매? 아니면 자주 만나는 낭자들?
“어느 바보?”
정오랑이 물었다.
“어느 바보겠어? 집안에 바보가 하나밖에 더 있어?”
기분이 상한 정칠랑은 소리치며 입을 삐죽였다.
“다들 따라서 바보가 된 거야? 말도 못 알아듣고…….”
세 사람은 그제야 퍼뜩 깨달았다.
“아, 그, 네 적장녀 언니!”
정육랑이 손짓을 하자 정칠랑이 발끈해서 일어섰다.
“그, 그건 네 언니지! 전에 백모님이 키우기로 하셨잖아! 가깝기로 따져도 너랑 제일 가깝고!”
진짜 어린애라니까. 지금이 말꼬리 잡고 늘어질 때야? 정육랑은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고 질문했다.
“걔가 어떻게 혼인을 해? 바보와 혼인하겠단 사람이 있어?”
정칠랑이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진짜야. 방금 아버지랑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거 들었어.”
정칠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주씨 가문에서 바보를 시집보낼 거라며 사주단자를 달라고 했다는데, 그럴 거면 우리가 아무한테나 시집보내버리면 되잖아.”
주씨 가문. 그 말에 정육랑 등은 사정을 대충 눈치챘다.
주씨 가문의 사람이 온 지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딸들인지라 직접 가서 방문 이유를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조그마한 집안에서 소식을 숨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곧 시녀와 몸종을 통해 말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