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69
교랑의경 169화
주씨 가문에서는 그 바보의 사주단자를 가지러 왔으며, 모친의 혼수도 가져간다고 했다. 정씨 가문에서 이 일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딱 잘라 거절하자 양쪽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외지로 부임한 정 이노야도 휴가를 청하고 불려왔다.
“주씨 가문에서는 그 바보를 시집보내려는 게 아니야. 혼수를 가져가려고 핑계 대는 거지.”
정육랑은 뭔지 알겠다는 투로 말했다.
“주씨 가문엔,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
주씨 가문엔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 그러니 바보가 태어났겠지. 이는 정씨 가문 전체가 굳게 믿는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주씨 가문에서는 정씨 가문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서 자기네 딸이 바보를 낳았다고 굳게 믿었다.
이런 생각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머릿속 깊이 각인된 것이어서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누가 바보랑 혼인하겠어?”
정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과 불쾌함이 서린 표정이었다.
“혹시 상대도, 바보인가?”
정오랑의 말에 정칠랑이 까르르 웃었다.
“웃기지 좀 마.”
정칠랑이 깔깔대며 웃자 머리에 꽂은 황금 장식이 흔들거렸다. 정오랑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참 나, 바보가 혼인을 하긴. 주씨 가문에서 그 바보를 키우기 싫으니까 핑곗거리를 찾은 거야.”
정육랑이 정칠랑을 보며 말했다.
“숙부님도 참, 어떻게 그 말을 곧이들으신대? 숙부님이 그 바보의 혼처를 찾아준다고 하면 아마 주씨 가문에서 당장 그 바보를 데려올걸? 숙모님도 그래. 숙모님 눈엔 그저 돈만 보이시겠지. 그 바보가 돌아오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도 안 하시고.”
정사랑과 정오랑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이부인은 이들의 적모(嫡母)였지만 대부인은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서녀 처지인지라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못 들은 척했다.
아직 어린 정칠랑이지만 말귀는 잘 알아들었다. 정칠랑은 콧방귀를 뀌며 허리를 곧추세우고 받아쳤다.
“우리 어머니는 아니야. 눈에 돈만 보이는 건 백모님이지. 자기가 돈 끌어모으려고 우리더러 아끼라고 하시잖아.”
“살림을 안 맡아 봤으니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도 모르겠지!”
정육랑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눈에 돈만 보이는 게 아니고서야 어쩜 그리 생각이 짧아?”
몇 살 어린 정칠랑은 말문이 막히자 열이 받아 울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울보야. 할 말 없으면 울기나 하지. 집에서는 부모님이며 조모님이 오냐오냐 받아주시지만, 나중에 시집가면 남편이랑 시부모님이 응석 안 받아줄걸!”
밖에 있던 몸종과 여종이 얼른 들어와 달랬다.
“우리 쟤랑 놀지 말자, 쟤랑 놀지 마.”
정칠랑은 울며 몸종과 여종에게 정사랑과 정오랑을 잡아끌게 했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나가던 여종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잘 지내던 아씨들이 왜 또 싸우시지?”
“주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잖아.”
“그게 아씨들이 싸우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 바보 얘기가 나왔잖아.”
“아, 그렇지. 그 바보랑 얽히면 좋은 일이 없다니까.”
이부인은 손님과 함께 대청에 앉아 있었다. 손님은 서른 남짓으로 보이는 여인으로 얼굴이 희고 살집이 있었다. 여인은 이부인 앞에서 겸손한 웃음을 짓고, 정칠랑을 달래는 이부인을 보며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칠랑, 울지 말고. 이 여덟째 외숙모가 갖고 놀 거 줄게.”
여인은 손에서 금반지를 빼 정칠랑에게 주었다. 꽤 오래 낀 것으로 보이는 데다 딱히 눈에 띄지도 않는 실반지가 정칠랑의 눈에 들 리 없었다. 정칠랑은 대꾸도 하지 않고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순금으로 된 꽃무늬 팔찌를 밖으로 보이게 한 후 통통거리며 뛰어나갔다.
머쓱해진 여인은 반지를 도로 챙기며 방석을 끌어당겨 엉거주춤 앉았다.
“칠랑은 참 말을 잘 듣네요. 달래니까 울음을 뚝 그치고.”
여인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말을 돌렸다. 이부인은 성가신 눈치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무슨 일인지 얘기해 봐요. 보다시피 이 집안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요.”
이부인이 재촉하자 여인은 더욱 무안해했다.
“둘째는 원래 백부를 따라 입학하려 했는데 연말에 병을 얻어 크게 앓았어요. 애 아버지도 생계가 막막하고요. 농사도 잘 안 돼서 간신히 봄을 났죠. 성 동쪽에 있는 양어장에서 물고기를 길러 볼까 하는데…….”
거기까지 말한 여인은 더욱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요즘 살기 힘든 거로 따지면 누군들 안 힘들겠어요. 나도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니에요. 집안 살림이 내 손에 없으니 춥고 배곯지 않을 정도로 버티는 것뿐이죠.”
이부인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여인이 창피한 듯 웃으며 맞장구를 치자 이부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칠랑과 아들이 아직 어리다지만 애들을 위해 준비는 해 둬야죠. 나이가 찬 딸도 둘이나 있고요. 아, 그 큰애는 마침 혼담이 나오고 있어요. 내가 계모라지만 그래도 남한테 얕보일 순 없잖아요. 어떻게든 제대로 해서 보내야지…….”
듣고 있던 여인이 놀라 입을 열었다.
“그 큰애요? 그 애도 혼담이 오가요?”
당초 대방의 노처녀 십구랑이 남의 집에 재취로 들어가게 됐는데, 전처 소생의 바보가 하나 있다는 말은 온 집안사람이 다 알았다.
“혼담이 오가지 않으면, 평생 집에 두란 말이에요?”
이부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얘기가 나오자 또 울화통이 치밀어 돈이나 뜯어낼까 하고 온 친정 여인을 상대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올케도 그만 가 봐요. 나중에 다시 부를게요. 집에 손님이 계셔서요.”
여인은 쫓겨나다시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 배웅하는 여종들도 마지못해 따라 나왔다. 바깥마당으로 나오자 사내들이 싸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여종들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대노야와 이노야께서 또 주씨 가문 사람과 싸우시나 보네. 이게 벌써 며칠째야, 끝도 없이.”
“그 바보의 혼수가 여간 많은 게 아니니 쉽게 끝낼 수가 없지. 주씨 가문에서 그걸 다 가져가려면 정씨 가문의 재산을 절반은 내줘야 할 텐데. 노야와 부인께서 동의하실 수가 없잖아. 안 싸우는 게 이상하지.”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여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여인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혼수? 정씨 가문 재산의 절반?
“어멈들, 그 주씨 가문이라는 게 누굴 말하는 게야?”
여인이 물었다. 두 여종은 같잖다는 듯 힐끔 쳐다봤다. 이부인의 친정에서 돈을 뜯어내러 온 가난한 곁가지임을 잘 아는 터였다.
“우리 이방 선부인의 친정이요. 우리 이방의 사돈이기도 하고요.”
여종은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조강지처는 죽어서도 정실이었다. 후처인 팽씨가 살아 있고 팽씨를 중심으로 왕래하며 정을 나눈다 해도 도리상 정씨 가문 이방의 정통 사돈은 영원히 주씨 가문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인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정씨 가문이 누굴 중시하든 덕을 보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여인의 머릿속에는 혼수와 정씨 가문 재산의 절반이라는 말만 계속 떠올랐다.
“그 바보가, 큰딸이죠? 주씨 가문에서 왜 그 혼수를 가져간단 거예요?”
여인이 웃으며 물었다.
“큰따님이 혼인을 하려면 당연히 혼수를 가져가야죠.”
여종은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씨의 혼수는 무려…….”
옆에 있던 여종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
“시간이 늦었네요. 살펴 가세요. 저희도 얼른 들어가 봐야 해서 이만.”
여종이 다른 여종을 잡아끌며 들어갔다. 여인은 들어가는 여종들의 모습을 아쉬운 듯 보다가 대문 근처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 바보의 혼수가 정녕 그리도 많단 말이지?
저택의 다른 쪽 서재에 있던 정사낭이 서책을 내려놓았다. 옆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몸종 춘란이 얼른 다가가 물었다.
“또 싸우나 보네요.”
정사낭이 귀를 기울였다.
“책 읽는 데 방해가 되세요?”
춘란이 걱정하며 묻자 정사낭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책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건 방해가 되지 않아. 꽤 읽었으니 좀 쉬어야겠다.”
춘란이 안도하며 웃었다.
“그럼 차를 내올게요. 현묘관의 다과도 드디어 샀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탁자 앞으로 간 정사낭은 무늬 없는 명주로 덮어 놓은 종이를 쳐다봤다.
“현묘관 간식은 날개 돋친 듯 팔리는구나.”
정사낭이 감탄했다.
“아무리 날개 돋친 듯 팔려도 사려고 마음만 먹으면 살 수는 있죠. 근데 이상하게도 매번 우리 집에서 사러 가면 똑 떨어졌더라고요.”
쟁반을 들고 다가온 춘란이 탁자를 내려다보는 정사낭을 쳐다봤다.
“공자님, 그림을 그리시려고요?”
“붓질 몇 번만 더 하면 완성이야.”
정사낭은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이 그림을 오래 그리셨는데 드디어 다 그리셨나 봐요. 소인도 좀 볼 수 있을까요?”
춘란이 웃으며 몇 걸음 다가섰다.
“안 된다. 절반밖에 안 그려서 아직 제대로 안 보여. 나중에 전체적으로 봐야 잘 보이지.”
정사낭이 웃으며 말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몸종이 들어와 예를 표했다.
“공자님, 대부인께서 부르세요.”
정사낭이 나간 후 춘란이 다과를 정리하려는데 누가 문발을 들고 들어왔다.
“엇? 사낭은 없네?”
춘란이 몸을 돌리자 남색의 긴 소매가 달린 비단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보였다. 정사낭과 비슷한 연배로 용모도 준수했다. 다만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얼굴이 갸름해 다소 경박해 보였다.
사내를 본 춘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부채로 춘란의 얼굴을 톡톡 쳤다.
“이런 미인만 방에 홀로 남겨 두고?”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춘란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십칠공자.”
춘란은 예를 표하며 몸을 비켰다.
“공자님께선 대부인의 부름으로 방금 나가셨어요.”
십칠공자는 대부인의 친정 조카로, 학업 때문에 최근 정씨 저택에 기거하고 있었다. 말이 학업이지 실은 집에서 사고를 치고 피해 온 것이었다.
“아, 그럼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네.”
십칠공자는 춘란을 향해 눈썹을 찡긋거렸다.
“춘란, 차를 가져오너라.”
춘란은 못마땅했지만 차를 따르는 수밖에 딱히 도리가 없었다. 방 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십칠공자의 모습이 보였다.
“십칠공자, 드세요.”
십칠공자가 잔을 받았다. 잽싸게 피하려 했지만 춘란은 어느 틈에 십칠공자에게 꽉 잡혔다. 분한 마음에 눈물이 차올랐다. 찻잔을 들고 안을 서성이던 십칠공자가 탁자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게 뭐지?”
십칠공자가 물으며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세요. 저희 공자님의 그림인데 아직 못다 그리셨어요. 건드리시면 안 돼요.”
춘란은 다급히 외치면서 희롱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서서 막았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은 때였다. 십칠공자가 명주를 걷어치웠다.
“무슨 좋은 물건이기에 못 보게 해?”
명주를 걷자 탁자 위에 있던 그림이 눈앞에 드러났다. 십칠공자와 급히 달려들던 춘란 모두 멈칫했다. 마차에 앉아 휘장을 걷고 이쪽을 쳐다보는 미인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검은 눈썹에 길게 늘어뜨린 흑발, 하얀 피부의 여인은 아무 감정도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단한…… 미인이네…….”
십칠공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누구지?”
춘란은 짓궂은 십칠공자와 바짝 붙어 서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옷깃을 꽉 쥐며 눈앞에 있는 그림을 쳐다봤다. 그림은 전에 본 적 있는 한 사람의 모습과 겹쳐졌다.
산속 작은 도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손에 서책을 든 여인이 이쪽을 쳐다봤다. 늘 너울로 가리고 다니더니, 저리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을 줄이야.
“이노야 댁의 그 바보 낭자예요.”
춘란도 중얼거리듯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