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81
교랑의경 181화
술잔을 단숨에 비운 두칠은 탁자 위로 잔을 내던지며 통쾌한 듯 웃어댔다.
“주씨 가문 그 늙은이, 이젠 끝났어.”
우쭐한 표정이 감춰지지 않았다.
“일개 무관 주제에 겁도 없이 문관에 맞서려 들어? 그것도 중서문하성 관료한테? 발탁해서 키워 주는 건 힘들어도, 꼬투리를 잡으려 들면 어려울 게 뭐 있나? 떳떳하게 대놓고 말한들 누가 어쩌겠어?”
관리인이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럼요, 맞습니다. 이번에 의조부님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어요.”
“일개 벌레 새끼가 호랑이 털에 올라타니 제가 호랑이라도 된 줄 알았나 보지? 다른 호랑이의 피까지 빨아먹으려 하게?”
두칠은 냉소를 지었다.
“뱃가죽이 얇아 어차피 배 터져 죽을 텐데.”
두칠이 이번에도 술잔을 단숨에 비우자 관리인이 또 술을 따라 주었다.
“유 교리께서 경성에 오래 계신 덕에 움직임이 빨랐습니다. 뜻밖에도 진씨 가문이나 동씨 가문은 물론 그 누구도, 병이 있든 없든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죠.”
거기까지 말한 관리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무 간단한데? 두칠은 또다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본디 간단한 일이었어. 의조부님께선 수십 년간 명성을 쌓아 오셨고, 여기저기 이해관계가 얽힌 일이 많으니 함부로 못 나서지. 주씨 가문이 아둔하여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게야!”
관리인은 의혹이 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싱글벙글 웃었다.
“주씨 가문만 불쌍하게 됐네요. 돈을 크게 쓰지 않는 이상, 무사히 빠져나오긴 힘들 텐데요.”
“자업자득이지!”
두칠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태평거의 주인이 곧 두씨로 바뀌겠습니다.”
관리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그럼 설마 유 교리가 그저 화풀이나 하자고 나섰을까 봐? 화풀이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이익이 더 중하지. 명석한 사람이라면 응당 그럴 것이다.
“한 가지가 남았다.”
취기가 오른 두칠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더해졌다.
“의조부님이 나서셨으니, 나도 분풀이를 해야지.”
두칠이 손을 뻗어 탁자를 두드리자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사리 분별도 못 하는 이대작 놈 말이다. 따끔하게 혼내 줘야 해.”
두칠이 냉소를 지었다.
성문이 닫히자 어둠이 내린 큰길에 인적이 드물어졌다. 태평거의 등불도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종일 시끌벅적했던 식당도 조용해졌다. 바쁜 하루를 보낸 점원들 역시 웃고 떠들며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이대작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대작,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가지 마.”
오 관리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벌써 며칠째 못 간걸요. 오늘은 가 봐야 해요. 더위도 식힐 겸 다녀와야죠.”
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랑 채소, 쌀국수 챙겨 놨으니 가져가게.”
“아닙니다. 집에 있는 것도 못다 먹었어요.”
하지만 이미 점원 하나가 꾸러미 두 개를 나귀 등에 실어 놓은 후였다.
“이건 규칙이야. 자네 몫이니 가져가야지. 규칙을 어기면 쓰나.”
오 관리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이대작은 허허 웃으며 더는 사양하지 않고 모두에게 인사한 후 나귀를 타고 출발했다.
여름인데도 바람이 불어 무더위를 식혀 주었다. 이대작은 등롱을 들고 나귀를 끌며 천천히 걸어가면서 쌀국수와 고기, 채소를 어느 친척에게 나눠 줄지 생각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댁에는 지난번에 보냈으니 이번엔 됐고, 한동안 외숙과 연락이 뜸했으니 한번 뵈러 가야겠네. 이모님 댁도. 힘겨울 때 딱히 도와준 건 없지만 그래도 피붙이 아닌가. 이제 살 만해졌으니 힘껏 끌어주며 도와야지.
뒤에서 낮고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밤길을 다니는 마을 사람들인가? 이대작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장정 네다섯 명이 어렴풋이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순간 이대작에게 자루가 씌워졌다.
“당신들 뭐야!”
이대작이 소리쳤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면에서 몽둥이가 날아왔다. 처참한 비명이 밤하늘을 가르자 사방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목숨은 붙어 있게 해라.”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쏟아지던 몽둥이세례가 멈췄다. 이대작은 축 처진 채 몸을 웅크리고 신음 소리만 간신히 냈다.
“그렇지만.”
사내가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도 헛걸음할 수야 없지.”
말뜻을 알아들은 사내들이 음흉하게 낄낄거렸다.
“형님, 어느 쪽 손으로 할까요?”
누군가가 묻자 먼저 말했던 사내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듣자니 숙수라던데, 궁금하군. 오른손이 없는 숙수도 음식을 만들 수 있는지.”
정신을 잃어 가던 이대작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며 버둥거렸다.
“살려 주십시오······.”
이대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애원하고, 손을 뻗어 기어가려고 했다. 도망쳐야 해, 어서······.
하지만 곧 누군가가 몸뚱이를 밟았다. 동시에 앞으로 뻗었던 손도 밟혔다.
안 돼. 살려 줘······.
밤은 어두웠고, 마대 자루로 덮인 탓에 더욱 시야는 더욱 캄캄했다. 누군가가 땅바닥을 나뒹굴며 꺼져가던 등롱을 들더니 단도를 꺼내 빛을 비췄다.
처참한 비명이 또다시 밤하늘을 갈랐다. 옆에 있던 등롱으로 피가 튀면서 마지막 남은 불씨를 꺼뜨렸다. 천지는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 * *
밤이 깊자 태평거는 고요해졌다. 문 앞에 내건 등롱 외에는 뒷마당에 있는 두부방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두부방의 등은 밤마다 켜져 있었다.
손재는 두부에 간수를 친 후 열쇠로 안에서 문을 따고 나왔다. 문밖 회랑 아래에서 웃고 떠들던 점원들이 얼른 일어났다.
“다들 정신 단단히 차려. 일하는 시간에 술 훔쳐 먹었다가는 내쫓을 줄 알아.”
손재는 문을 나오며 점원 둘에게 훈계를 했다.
“사부님, 하루에 세 번씩 말씀하시잖아요. 잘 알겠으니 그만하세요.”
점원 하나가 웃으며 말하자 손재가 벌컥 성을 냈다.
“열 번을 말해도 마음에 안 담아 두면 소용없어! 모처럼 온 좋은 날이야. 너희도 모처럼 운수가 트이게 됐고. 누구든 열심히 안 하면 비렁뱅이로 살게 도로 내쫓을 줄 알아!”
“사부님, 염려 마세요. 사부님이 열심히 안 하셔도 저희는 열심히 할 겁니다!”
두 점원이 대답했다. 손재는 두부 틀을 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스갯소리를 하려던 손재는 돌연 동작을 멈추고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사부님, 왜 그러세요?”
점원 하나가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여럿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손재의 말투에는 확신이 없었다.
깊은 밤이라 벌레 소리도 잠잠해진 지 오래였다. 두 점원도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봤다. 흐느끼는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직 칠월 보름도 안 됐으니, 귀, 귀신은 아닐 텐데······.”
점원 하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손재가 화를 버럭 냈다.
“귀신은 얼어 죽을!”
손재는 눈을 부라리며 앞쪽 식당과 뒤쪽 두부방을 차례로 가리켰다.
“여기가 어딘지 몰라? 태평거와 태평 두부라고. 부처님이 드시는 두부를 만드는 두부방! 대체 어느 귀신이 감히 여길 와?”
그건 그렇지. 두 점원은 자세를 바로 하고 똑바로 섰다.
“오늘은 날이 더우니 난 마당에 자리 깔고 자야겠다.”
손재가 고개를 쳐들고 몸에 힘을 주며 말했다. 손재가 마당으로 걸어가자 밖에서 들리던 여인의 흐느낌이 한층 가깝게 들렸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울음소리라고 할 순 없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의미 없는 절규 같기도 했다. 그런 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사람이 저런 소리를 내지? 아니면, 사람이 아닌가······.
손재가 으악 비명을 지르자 회랑 아래에 있던 두 점원도 놀라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태평거의 등불이 하나씩 켜졌다. 창문과 문이 열리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손재, 무슨 일이야?”
서봉추가 위층에서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마당에 있던 손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손을 덜덜 떨며 밖을 가리켰다.
“귀신이 울어요!”
손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밖을 쳐다봤다. 사방이 소란스러워진 통에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서무수가 걸어 나왔다.
두부방이 워낙 특수한 곳이었기에 서무수 형제는 두부방을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잤다. 만일의 경우 가장 신속하고 빈틈없이 두부방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손재가 신경 쇠약이 있나 봐요.”
서봉추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게 아닙니다. 밖에 누가 운다니까요!”
손재가 소리쳤다. 신경 쇠약이라는 누명을 쓸 순 없었다. 그랬다간 밥그릇이 날아갈 텐데.
서무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들 조용!”
시끄러운 소리가 순식간에 뚝 그쳤다. 동시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날카롭고 긴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어렴풋이 들려왔다. 마당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저기 좀 봐요. 횃불이야!”
위층에 서 있던 사람이 손으로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횃불? 위층에 서 있던 사람들은 까치발을 들었고,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우르르 문 쪽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타오르는 횃불 서너 개가 뱀처럼 이어져 빠르게 움직였다.
“송씨댁이에요!”
위층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송씨댁? 이 대작의 부인?
서무수가 고개를 들어 소리친 사람을 쳐다봤다. 이대작이 데려온 점원으로, 이대작의 식구와 잘 아는 사이였다. 점원은 놀란 표정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전부 우리 마을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들고 오고 있어요.”
서무수와 범강림의 눈이 마주치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일 났구나!
경성 성문은 미시(未時)에 북이 울리면 닫혔다가 오경에 북이 울리면 다시 열렸다. 지금은 여름이라 날이 일찍 밝아 사경으로 바뀌었다. 한밤중인 삼경에 문을 두드려대자 성문을 지키는 위병의 표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행패야! 밤길 다니는 귀신이면 우릴 부를 필요도 없을 텐데.”
위병들이 고개를 빼고 소리쳤다. 성문 앞에는 열댓 명이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횃불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사이로 이들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귀신과 다를 바 없는 몰골이었다.
위병들은 성문을 지키며 산전수전 다 겪은지라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저기 좀 봐.”
누군가가 팔꿈치로 동료를 툭툭 찌르며 말했다.
“피야.”
고개를 숙여 쳐다보니 횃불 아래에 선 사람들의 몸이 피로 얼룩덜룩했다. 성문을 지키는 위병은 순간 몸을 뒤로 뺐다.
“관졸 나리, 저희는 성으로 들어가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급병이니 사정을 봐주십시오!”
서무수가 소리쳤다. 법령에서는 병이나 출산, 장례에 관한 일일 경우 예외적으로 성문을 열게 되어 있었다.
급병이라고? 어쩐지. 성문 위병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통행증은 있소?”
서무수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통행증을 꺼내 들었다.
성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위병 몇 명이 다가왔다. 이들도 사람을 확인하고는 기겁을 했다. 들것 위에 누운 사내는 이미 원래의 용모를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었다. 여기저기 멍들고 퉁퉁 부었으며 얼룩덜룩 핏자국까지 있었다. 구타를 당한 흔적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