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95
교랑의경 195화
주육낭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대인,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게 오해였지 않느냐. 두 집안의 오해가 풀렸으면 됐어.”
유 교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 아버지의 일은…….”
주육낭이 못 참고 물었다. 어린 자들은 성격이 급해 일을 못 숨기지. 유 교리는 주육낭을 향해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춘부장의 일은 나도 들은 게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
유 교리의 말투는 온화했다.
“폐하께선 자비로운 분이니 화가 누그러지시면 잘 풀릴 게야.”
물론, 화가 안 풀리면 어쩔 수 없고. 유 교리는 감격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소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려서 그런지 정과 의를 중시하고 패기가 있었다. 피가 끓어오르다 보니 한 가지 일에만 몰두했다. 일 하나를 하려 해도 이리 고민하고 저리 고민하느라 움직이지 않는 노회한 자들과는 달랐다.
“그래, 그럼 어서 가 봐. 집안사람들한테 사정 설명 잘 하고. 겁낼 것 없어. 꾸중하고 매를 드는 것도 다 잘되라고…….”
유 교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유 대인께 약포가 있다고 하니, 그럼 제 비술로 대인과 함께 일하면 어떨까요. 저는 늘 조용히 의술을 행하길 바라 왔어요.”
“얼씨구, 아주 꿈도 야무지네. 태평거를 물어내게 됐으니 약포가 탐나나 봐? 어디서 감히 입을 놀려!”
두칠이 소리쳤다.
유 교리는 두칠을 노려보며 제지하고, 정교랑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소. 내 점포가 워낙 작아서…….”
“이 비술은 돌려받을 수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유 교리는 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마주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거참, 이럴 필요 없대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 교리는 도리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낭자가 의술을 행하고 싶으면, 우리 약포로 오시구려. 병을 고치고 받는 돈은 낭자가 갖고, 약 짓고 문진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우리가 갖는 거로 합시다. 정 낭자가 오면 우리 약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테니, 내게도 큰 이득이 남을 거요. 어떻소?”
당연히 좋겠지. 돈도 벌고 든든한 뒷배까지 두게 됐으니, 그깟 식당보다 훨씬 좋을 거야. 치료비로 무려 1만 관을 달라는 여인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유 교리가 밑지는 장사다.
“아닙니다. 대인의 점포에서 신세를 지는 일인걸요. 원칙대로 제가 가져갈 돈만 가져가겠습니다.”
“거참…….”
유 교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하세요, 할아버님. 소손이 크게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까.”
두칠이 옆에서 거들자 유 교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정 낭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안 받으면 화해하겠다는 성의가 안 보이겠지.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유 교리가 손뼉을 탁 치자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유 교리 역시 껄껄 웃었다.
“그렇구려, 정말 좋은 소식이오.”
좋은 소식이라……. 주육낭은 쿵쾅대는 가슴을 안고,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둘 다 웃고 있구나. 끝까지 웃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어차피 둘 다 사기꾼이잖아! 좋은 인간은 절대 아니라고! 주육낭은 일어나 옷소매를 털었다.
떠나는 소년과 소녀를 보며 두칠은 분노로 씩씩거렸다.
“할아버님, 저 계집이 너무 뻔뻔합니다. 감히 할아버님한테 제안을 하다니요!”
내가 지분 배당 문서를 바치겠다며 울고불고 매달릴 때랑 태도가 다르잖아. 방금 뭐랬어? 난들 가족의 정이 부족해 양조부로 모신 줄 알아? 뒷배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아니지, 아니지. 나랑 비교해 봤자 나도 뻔뻔한 사람이란 얘기밖에 안 되지. 두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아버님, 저 계집은 할아버님의 권세에 기대 재기하려는 겁니다. 저 계집한테 잘해 주시면 안 돼요!”
유 교리는 정교랑이 약포로 들어간 후에 가져가겠다며 두고 간, 비술이 쓰인 종이를 조심스레 들어 잘 챙긴 후 수염을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외로운 여인이 가엾구나. 어미를 잃고 아비에게 버려졌어. 그렇다고 외숙과 가까운 것도 아니고 정인이 있다 한들 걸림돌만 될 뿐이니. 저 여인도 말하지 않았느냐. 경성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고. 조만간 귀덕낭장도 이 일을 알게 될 텐데, 알면 어찌 나오겠어?”
유 교리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봐도 훤하니, 저 애들이 살길을 찾으려는 게지.”
그런가……. 두칠은 코를 어루만지며 눈을 껌뻑였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저 여인이 자발적으로 비술을 들고 약포로 찾아오도록 꾀려고 할아버님께서 일부러 그리 말씀하신 겁니까?”
두칠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이 자신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건 본성인데, 꾀었다고 할 수야 없지.”
유 교리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여인은 보통 사람보다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어.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지.”
두칠은 다시 코를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진 상공과 동 내한의 힘을 빌려 태평거를 운영하고, 이제는 할아버님의 힘을 빌려 약포를 운영하려는 겁니다. 치밀한 계략이죠!”
“계략이 아무리 뛰어나도 좋은 운엔 못 당하지.”
유 교리는 후련한 마음으로 웃었다. 태평거가 대수인가. 그래 봤자 식당인데 누구나 할 수 있잖아. 그는 처음부터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비술을 원했다.
뭐라고? 비술을 이미 손에 넣지 않았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손안에 들어왔다고 그걸 덥석 받아? 정말 받을 생각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떳떳하게 밝히며 받아야 한단 뜻이다.
이를테면 그 여인이 자신의 약포로 와서 의술을 펼친다든가. 물론 그 약포가 실은 자신의 것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 없겠지. 어마어마한 명성을 날리게 될 때쯤 천재지변이 닥칠 것이다. 불이 난다거나 강도가 든다거나. 미인박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가고 없지만 다행히 생전에 거둔 제자가 있으니 그 비술은 전승되겠지.
그때부터 그 비술은 더 이상 정씨의 것이 아니다. 유씨 성을 가진 이의 손으로 전해지겠지.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술을 쥐고 있는데 그 어느 벼슬아치가 내게 밉보일 수 있을까.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겠지!
유 교리는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별실에서 울려 퍼진 맑은 웃음소리가 대청까지 들리자, 대청에 있던 점원들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누가 저렇게 웃는 거야?
유 교리가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웃은, 건가? 이럴 수가!
유 교리는 지난 십수 년 동안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없었고, 이는 이미 습관이자 본능이 됐다. 습관과 본능까지 바꿀 정도라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내가 요즘 신중하지 못했던 것 같군.
“경하드립니다, 할아버님. 소원을 푸셨습니다.”
옆에 있던 두칠은 유 교리가 귀신이라도 본 듯 갑자기 멍해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유 교리가 왜 웃음을 터뜨렸는지는 잘 알았기에 얼른 따라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경하는 개뿔.”
유 교리는 두칠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벽에 건 글씨가 일곱 칠(七)까지 가도록 서무수 형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게 순조로우며 먹고 입는 것만 조금 불편할 뿐 더 이상의 형장은 없을 거라는 진 공자의 말이 커져 가는 시녀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그 외의 나머지 일은 진행이 빨랐다. 태평거는 관부에 고해 수속 중이었고, 이춘당에서도 관리인이 찾아와 정 낭자를 초빙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정 낭자가 성격이 급하네.”
두칠은 빨간 인장이 큼지막하게 찍힌 계약서를 쳐다봤다. 계약서에 쓰인 자신의 이름을 보자 속이 후련해졌다.
흥, 원래 우리 집 가산이었잖아.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 게지. 더 비싼 값으로.
두칠은 자신에게 그런 봉변을 안긴 여인을 바라봤다. 이 여인의 명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우쭐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비꼰 것이었다.
“천하장사라도 감옥에서는 얼마 못 버티죠. 그 사람들은 내 은인이에요.”
정교랑의 말에 두칠은 혀를 찼다. 말은 그럴싸하네!
“사실 낭자도 귀덕낭장이 돌아오기 전에 믿을 만한 뒷배를 찾는 게 좋겠지.”
두칠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씀도 맞고요.”
정교랑이 두칠을 보며 말했다.
“아씨, 그만 가세요. 이대작의 상처를 살피러 가셔야죠.”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두칠을 힐끔 보며 시녀가 말했다.
“그래, 빨리 나아야지. 내가 이래 봬도 뒤끝은 없는 사람이야. 숙수랑 점원들은 해고 안 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 해.”
두칠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대작 일가는 어제 집으로 돌아왔지만 송씨댁은 몹시 불안해했다.
“뭘 그리 불안해하시오?”
이대작은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한숨을 내쉬는 아내를 보며 물었다.
“돌아가라고 했다는 건 별일 없다는 뜻이고 안전하다는 거요. 좋은 일인데 마음 푹 놓아야지.”
송씨댁은 자리에 앉아 이대작이 손을 움직이도록 도와주며 한숨을 쉬었다.
“실은 오늘 태평거에 짐을 가지러 갔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송씨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뭐라 했든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 아씨께서 심사숙고하여 결정하시겠지.”
이대작의 말에 송씨댁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심사숙고 끝에 포기를 택하셨을 수도 있죠.”
송씨댁이 중얼거렸다. 이대작은 손을 움찔하며 송씨댁에게서 손을 뺐다. 힘을 주자 극심한 통증이 엄습해 얼굴이 일그러졌다.
“포기라니? 아씨께서 한 은공을 위해 세우신 점포인데!”
이대작의 말에 송씨댁은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낭, 상황이 그렇잖아요. 자신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이대작이 낙담하며 물었다.
“누구한테 넘기는데?”
잠시 침묵하던 송씨댁이 입을 열었다.
“누구겠어요, 두칠이죠.”
벌떡 일어선 이대작은 씩씩거리며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봤다. 오른손은 여전히 천으로 칭칭 감겨 있었지만, 피로 얼룩졌던 손이, 잘린 그 손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대작은 손을 높이 들었다가 옆에 있던 탁자 위로 쾅 내리쳤다. 다행히 눈치 빠른 송씨댁이 서둘러 손을 뻗어 막는 바람에 끔찍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낭, 미쳤어요!”
송씨댁이 소리쳤다.
“이걸 둬 봤자 뭐해? 남겨 둬서 뭐 하냐고!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이대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게 아니죠, 아니에요. 손이 있으면 다른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다른 집으로 가요. 다른 집으로 가서…….”
송씨댁이 흐느꼈다.
“다른 집으로 가라고?”
이대작이 실소를 터뜨렸다.
“다른 집으로 가라고? 다른 집으로 안 간다고 해서 손이 잘렸는데, 어딜 갈 수 있단 말이오?”
송씨댁은 멈칫했고, 곧 두 부부는 끌어안고 통곡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맑고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리자 두 부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밖에서 고개를 들이민 시녀의 얼굴이 보였다.
“기억이 틀렸나 했네요. 언니, 저 기억하시죠?”
시녀가 생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이 저번과 같다고 볼 수 있나?
“손이 아파서 그래요?”
시녀가 물었다. 이대작 부부는 얼른 일어나며 눈물을 닦고 맞이했다. 시녀 뒤로 정교랑의 모습도 보였다.
“아씨, 반근 낭자, 어쩐 일이십니까?”
“약 갈아야죠.”
정교랑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두 분도 잊은 거예요?”
시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대작과 송씨댁은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랬다. 두 사람도 잊고 있었던 걸 아씨는 기억하고 계셨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까지 신경 쓰시다니.
“아씨.”
이대작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
“태평거를 버리실 겁니까?”
“아니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렇게 호탕하게 대답하다니. 둘러대는 말이거나 위로의 말이겠지.
“아씨, 저희를 속이지 마십시오.”
이대작이 고개를 숙인 채 쓴웃음을 짓자 정교랑이 웃었다.
“난 위로하는 말 안 해요. 듣는 사람이, 위로하는 말로 여길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