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02
교랑의경 202화
정사낭은 당황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매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는 주씨 가문 문지기의 모습에 난감한 표정이었다.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었다. 정교랑 모친의 장례 때 대놓고 싸운 일은 이후 강주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오르내렸다. 하지만 당시 정사낭은 아직 어릴 때라 사환들에게 업혀 사람들 뒤로 숨어 구경했기에 이미 기억이 흐릿했다.
“나, 나는 누이를 보러 왔소.”
“글쎄, 누이가 누군데?”
문지기가 손을 허리에 대고 말했다.
“이 인간이 제정신이야?”
사환이 보다 못해 앞으로 나서서 눈을 부라렸다.
“우리 공자님의 누이면 당연히 정 아씨지.”
아, 맞다. 잊고 있었네.
“그 사람 여기 안 살아요!”
문지기는 손을 휘두르며 이들을 내쫓았다.
“가라고요, 가. 성가시게 하지 말고.”
여기 안 산다고? 깜짝 놀란 정사낭이 물었다.
“그럼 지금 어디 살고 있소?”
대답 대신 쾅 하고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 밖에 남겨진 정사낭과 사환이 눈을 마주쳤다.
“공자님, 여기서도 똑같나 봅니다. 도관 같은 곳으로 보내졌겠죠.”
사환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정사낭은 한숨을 내쉰 후 주씨 저택의 대문을 힐끔 쳐다봤다.
“가자. 천천히 알아봐야지.”
이쪽에서 정사낭과 사환이 자리를 뜰 무렵, 저쪽의 주 노야는 옥대교 앞에 와 있었다. 마차가 멈췄지만 주 노야는 마차 안에서 꼼짝도 않은 채 창 너머로 보이는 저택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이 세 번째로구나. 처음엔 교랑을 집에서 내쫓을 때 데려다주는 시늉을 하러 와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두 번째엔 진씨 가문의 혼담을 전하러 신이 나서 왔다가 들어오란 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거절을 당했지.
“아버지?”
주육낭이 밖에서 부르자 주 노야는 심호흡을 하고 휘장을 들어 올린 다음 마차에서 내렸다.
금가아는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옆에 있는 주육낭이 아니었다면 금가아는 주 노야를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선은 주 노야가 찾아온 일이 드물었고, 금가아 역시 주씨 저택엔 가 본 일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이 늙은이의 태도가 몹시 공손하고 온화해졌기 때문이다.
“정 낭자를 좀 볼 수 있을까?”
주 노야가 고개를 들으며 묻자, 반쯤 열린 대문 너머로 회랑 아래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여인이 보였다. 안개비가 내리고 있어 여인의 모습이 환영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녀가 차를 내주자 주 노야는 놀란 눈치였다.
“괜찮다, 괜찮아.”
시녀는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차 한잔 정도는 저희도 대접할 수 있어요.”
주 노야는 멋쩍은 듯 마른기침을 했다.
“이번에 교교 네가 정말 고생 많았다.”
머뭇거리던 주 노야는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숙여 답례했다.
“외숙부님을 놀라게 해 드렸네요.”
더욱 놀란 주 노야는 하마터면 찻잔을 엎을 뻔하며,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여인을 쳐다봤다.
예를 표했다? 감사도 전하고? 사과까지? 무슨 생각이지? 대문에 들어선 후로 지금까지 내가 말실수를 하거나 뭐 잘못한 건 없지? 얘가 원래 이렇게 예의 바르고 철이 들었었나?
“교교, 나머지 일은 걱정 말거라. 유가 놈이 내 약점을 잡을 수 있다면, 나 역시 그놈의 약점을 잡을 수 있어. 놈이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죗값을 받아야지!”
“폐하의 성정은 어떤 편이세요?”
정교랑의 물음에 멈칫했던 주 노야는 곧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멋쩍어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선 관대한 분이지. 놈이 풍질을 얻었으니 틀림없이 측은하게 여기실 게야. 더구나 그 늙은이가 평소에 사람 좋은 시늉을 많이 했거든.”
주 노야가 중얼거렸다. 지금 자신이 나서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유 교리의 죄를 추궁하려 들면 도리어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것이다.
“그냥 두자니 그놈만 좋은 꼴 아니냐.”
“순리에 맡기죠.”
달리 도리가 없거나 포기할 때 쓰는 말이 이 여인의 입에서 나오자 주 노야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시선이 절로 정교랑을 향했다.
이 강주 바보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집에서 유명한 스승을 청해 가르치고 훈육한 여식들보다 훨씬 품위가 있어 보였다. 외모는…… 점점 누이를 닮아가는군. 아니지, 누이와는 별로 안 닮았어. 훨씬 날카로운 얼굴이야. 정씨 가문의 피가 섞여서겠지. 그렇다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저 기개는 어디서 왔으려나?
어젯밤 밤새 한숨도 못 자며 일을 반복적으로 곱씹어보았다. 흉악하고 독한 놈들을 숱하게 봤지만 이렇게 독하고 기민하게, 흔적도 남기지 않고 피도 안 보며 사람을 죽이고,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는 이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아직 소녀가 아닌가. 아직 이렇게 어린데. 어떻게 그런 일을?
패배를 인정하고 공손하게 사죄하는 일만으로 한 사람을 풍질에 걸리게 할 수 있나? 그렇다면 이제부턴 만사 내팽개치고 눈에 거슬리는 놈들을 찾아가 비위를 맞추며 살갑게 굴 테다.
의술에 정통한 여인이니 혹시 독을 썼으려나? 하지만 태의들이 진단한 바에 따르면 유 교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기혈이 막힌 것이라고 했다. 판단력 상실은 풍질의 증세였다.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풍질에 걸리게 하는 독이 있나?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녔으니, 제아무리 불가능한 일도 이 여인에겐 불가능이 아닐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 노야의 시선은 찻잔으로 향했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빼게 됐다. 아무 흔적도 없이, 언제 어디서나…….
“교교, 염려 마라. 나머지 일은 나한테 맡기고, 신경 안 써도 된다.”
주 노야가 급히 덧붙였다.
“물론 잘못된 게 있으면 얼마든 얘기하고. 어쨌든 한 가족이니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야지. 남한테 무시받는 건 절대 안 돼. 우릴 해치려던 놈들한텐 인정사정을 봐주지 말아야지.”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부님.”
“당치도 않아.”
주 노야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네가, 네가 늘 수고가 많구나.”
대청의 문 근처에 앉아 있던 시녀는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주 노야가 적잖이 놀랐나 보네.
“그리고 교교, 정씨 가문에서 네 혼사를 정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거기 맞서 싸우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그러다 경성에서 전갈이 와서 하는 수 없이 부랴부랴 돌아왔지.”
주 노야는 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을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교교, 걱정 말거라. 이 일은 염려 안 해도 돼. 내가 있는 한 저들 뜻대로는 안 될 거야.”
“그 일은 상관없어요.”
정교랑이 대꾸했다.
“그래, 다 네 뜻대로 해. 우린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주 노야가 얼른 말을 받자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예는 그만 됐다, 예는 됐어. 내가 응당 해 줘야 할 일이야.”
서둘러 일어서던 주 노야는 또 무언가 생각났는지 도로 앉아서 정교랑을 쳐다봤다.
“교교, 뭐 당부할 일은 없고?”
“없어요, 별말씀을요.”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한 후 일어서자 주 노야도 그제야 일어섰다.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
밖으로 걸어 나가던 주 노야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봤다.
“교교, 집으로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와. 다 네 뜻대로 하거라. 절대 어려워하지 말고.”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 노야는 그제야 따라 웃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첫 방문이라 아직 익숙하지 않아 그랬는지 주 노야는 하마터면 대문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시녀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교랑은 시녀와 함께 대문까지 나와 마차를 타고 떠나는 주 노야를 배웅했다.
“공자님.”
시녀의 시선이 옆쪽을 향했다. 삿갓을 쓴 주육낭이 채찍을 들고 서 있었다. 이슬비에 몸이 젖은 걸 보니 한참 동안 서 있었던 듯했다.
“공자님, 왜 안 들어오셨어요?”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아버지가 무서워서요?”
주육낭이 시녀를 보며 대답했다.
“그래.”
솔직하고 명쾌한 대답에 도리어 시녀가 머쓱해졌지만 곧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부친은 아들의 눈에 경외감이 드는 존재인데, 지금 주육낭의 부친은 어린 낭자한테 놀라 겁을 먹고 있지 않은가. 마음속으로는 이해한다지만 차마 그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하나. 공자님, 남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도 실은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에요.”
헌신짝처럼 버림받던 존재에서 이제는 독사를 보듯 무서워하는 존재가 됐다. 이 세상에 그런 대우를 원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대문 앞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슬비만 소리 없이 내렸다. 정교랑은 둘의 대화를 신경 쓰지 않은 채 벌써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마당으로 들어간 정교랑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촉촉이 내리는 이슬비가 좋은지 손을 뻗고 고개를 살짝 들어 비를 맞았다.
“이 일을 부모님께 말씀드린 게 적절치 않았던 것이냐?”
따라 들어온 주육낭이 물었지만, 정교랑은 대답 대신 자기 얘기를 했다.
“내가 보기엔, 남들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남들한테 멸시받는 존재보단 나은 것 같아요. 아무리 무서워도, 어쨌든 혈육이잖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괜한 생각 마요. 처음부터 숨길 생각 없었으니까. 알아도 좋고, 몰라도 상관없어요. 적절치 않을 게 뭐 있어요.”
멸시든 공포든 그녀에게는 별일 아니었다. 주육낭은 한숨을 토했다.
자리에 앉자 시녀가 차를 올렸다. 반근이 깨끗한 수건으로 정교랑의 손을 닦아 주었다. 주육낭도 수건을 들었지만 시녀가 따로 시중을 들진 않았다. 주육낭은 대충 두어 번 쓱쓱 닦은 후 수건을 던졌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별거 안 했어요. 다 봤잖아요.”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혀를 찼다.
“그럼 네가 좋은 걸 갖다 주며 패배를 인정하고, 십삼이 소식을 알려 준 일로, 그자가 너무 기뻐서 풍질을 얻었다고? 그자는 바보가 아니야!”
“그자는 바보가 아니죠. 똑똑하고 신중하며 성실한 사람이죠. 늘 삼가고 조심하는 사람이고요.”
“언제 독을 쓴 건데?”
주육낭은 정교랑의 말을 받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
일이 발생한 후로 주육낭은 줄곧 생각해 왔다. 독을 쓰거나 약을 넣으려면 접촉이 있어야 한다. 유 교리와 만날 때는 항상 주육낭도 함께 있었고, 언제나 유 교리의 공간에서 만났다. 먹고 마시는 것에 손을 쓰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혹시 형태도 없고 무색무취한 것인가?
주육낭은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 반근이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흰 목이 가늘고 길어 보였다.
주육낭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 여인은 향을 쓰지 않는다. 실내에서도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았다. 형태로 보이지 않는 접촉. 대체 뭘까?
“난 독을 쓰지 않았어요. 의술은 사람을 구하고 돕는 데 써야지, 어떻게 사람을 해쳐요?”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차에서는 맑은 향이 났고 목으로 넘어가자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주육낭의 머리에 번뜩 생각이 스쳤다.
“처방전이구나!”
주육낭은 찻잔을 손에 꽉 쥔 채 정교랑을 봤다. 비밀을 푼 희열이 얼굴에 드러났다.
“넌 그자에게 비술을 건넸어. 향낭 말이다. 향낭에 독을 썼지?”
“공자님, 아둔하시네요. 그때 유 대인은 그 향낭에 손도 안 댔잖아요. 그 신중한 사람이 남이 준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겠어요?”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으면서 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비술! 그 비술이 쓰여 있던 종이! 종이엔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먹물이구나!”
주육낭이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날, 글씨를 쓰면서, 아랫것이 먹을 갈 때 뭘 넣은 거지?”
그 말에 정교랑이 머리 빗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정교랑의 표정을 보며 주육낭은 확신했다.
“별건 아니었어요.”
정교랑의 시선은 주육낭이 여전히 손에 꽉 쥐고 있는 찻잔으로 향했다.
“방금 마신 그런 차죠.”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남아 있던 찻물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