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22
교랑의경 222화
왕십칠은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벌써 몸이 녹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옆에 있던 정사낭이 서둘러 팔을 붙잡아 주며 부축했다.
방문이 열리자 춘령이 웃음을 머금고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왕십칠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내디디자, 정사낭도 어쩔 수 없이 뒤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화장기가 거의 없는 청초한 모습의 여인이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교방사의 관기가 평상시에 입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기에 앞가슴이 훤히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모습은 조금도 속돼 보이지 않았다.
“소녀 주형(朱衡)이 공자님들을 뵙겠습니다.”
소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예를 올렸다.
“주 낭자의 이름이 형이었군요.”
왕십칠은 녹아내리듯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공자님이 보기엔 이 이름이 어떤가요?”
주 낭자가 고개를 들어 놀란 듯도 하고 기쁜 듯도 한 표정으로 왕십칠을 쳐다봤다.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눈빛에는 대답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가슴이 어찌나 쿵쾅대는지 머리까지 어질어질해진 왕십칠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왕십칠의 정신이 맑았더라도 이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찾긴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아첨의 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미인 앞에서 실례를 범할 수 없는 법. 왕십칠은 재빨리 옆에 있던 정사낭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어떤 것 같아?”
왕십칠의 얄팍한 수는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주 낭자는 정사낭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미소를 지었다.
“소녀, 농을 던져 봤을 뿐이에요. 비웃지 마셔요.”
정사낭은 귀까지 새빨개졌다.
“아닙니다, 어찌 감히요. 이름에 ‘저울대 형(衡)’자를 쓴 것은 그만큼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요.”
“덕담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 시는…….”
“언니, 이쪽이 정 공자예요.”
춘령이 옆에서 말했다.
“정 공자께서 지으신 시군요.”
주 낭자는 웃으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종이를 들고는 정사낭을 향해 감탄과 공경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공자께서는 시를 정말 잘 쓰시네요.”
정사낭은 순간 온몸에 가시가 돋은 듯 좌불안석이었다. 정사낭은 칭찬 한번 들은 적 없는 사람도, 이런 칭찬에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는 가난한 집안 출신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절세미인이 자신의 시를 보며 공경의 눈빛을 보내자, 수백 마리 고양이가 정사낭의 마음을 마구 긁으며 간지럼을 태우는 느낌이었다.
“아닙니다, 당치 않습니다.”
정사낭은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주 낭자가 다시 시선을 왕십칠에게 옮기자 춘령이 서둘러 소개했다.
“이쪽은 왕 공자세요.”
여태 넋을 놓고 미인을 감상하고 있던 왕십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네, 맞습니다.”
주 낭자의 뒤에 앉아 있던 몸종 둘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주 낭자는 진지한 얼굴로 왕십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춘령한테 듣자니 절 보고 싶다고 하신 분이 공자님이고, 이 시도 공자님이 정 공자께 부탁해서 쓴 거라지요? 소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이 시에 공자님의 이름을 남기지 않고 정 공자의 이름을 남기셨어요?”
주 낭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보았다.
“하하. 본래 내 것이 아닌 것을, 굳이 내 것인 척할 필요 있겠습니까? 이런 일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내가 차지하고 싶다고 해서 차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시를 빌미로 낭자를 볼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낭자의 눈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나인 것을, 남인 척할 필요가 있나요.”
왕십칠이 말을 끝내고 호탕하게 웃었다.
“공자께서는 정말 사내대장부시군요!”
주 낭자가 왕십칠을 보며 감탄과 놀라움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눈빛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존경의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왕십칠은 무릉도원에 온 듯 황홀해져 몸이 붕 뜨고 사리 분별이 불가능해졌다.
두 몸종이 술상을 내오려고 밖으로 나갔다. 방문을 닫으며 몸종 하나가 실소를 터트렸다.
“저 촌뜨기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거야? 창피한 줄도 모르네. 인사치레로 하는 말에 저리 넋 놓고 헤실거리다니. 언니도 참, 뭐하러 저런 이들한테도 아첨을 하시는지.“
“언니는 저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선의로 그러시는 거야.”
다른 몸종이 고개를 돌려 방문을 흘깃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게 다 춘령을 위해서지. 고향 사람 때문에 춘령이 울었다 웃었다 하면서 언니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니, 언니도 춘령을 기쁘게 해 주고 싶으신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쓸데없이 저런 이들을 왜 만나 주시겠어.”
앞서 입을 열었던 몸종이 감탄했다.
“언니도 정말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시는구나. 춘령도 운이 참 좋네. 언니를 도왔고, 언니 또한 그걸 잊지 않고 보답하시니 말이야.”
“우리도 운이 좋지.”
두 몸종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들 뒤로 비파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즐거워지는 가볍고 경쾌한 곡조가 딩딩동동 울려 퍼졌다.
날이 막 밝아지기 시작할 때 즈음, 남쪽 성문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서서 대기 중이었다. 사람들뿐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로 울고 있는 가축들도 있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아침인데도 공기가 썩 상쾌하진 않았다.
“향칠!”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문의 감문관(監門官: 문을 지키는 관리)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성문 옆에서 몇 사람과 잡담을 나누던 젊은 사내가 감문관을 맞이하러 달려왔다.
“정 대인, 오셨습니까.”
사내가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말을 타고 있던 호리호리해 보이는 남자가 눈썹을 치켜들고 채찍으로 사내를 가리켰다.
“이쪽은 왜 아직도 청소를 안 한 게야?”
향칠은 뭐라 변명도 없이 즉시 예, 하고 답하고는 몸을 돌려 근처에 있던 다른 이를 불렀다.
“네가 직접 치우면 될 것 아니냐. 성문이 크지도 않은데, 굳이 저자들을 불러야 하겠어?”
정 문관이 향칠을 향해 호통을 치고는 곧바로 향칠이 손짓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세금을 걷으러 다닐 때는 그렇게 부지런히들 뛰어다니더니, 성문에 할 일이 쌓여 있는 건 어째 하나같이 못 본 척하는 게야? 아주 한가해 죽겠지?”
그들은 잠자코 꾸중을 들은 후 허둥지둥 성문 위로 올라갔다.
말을 타고 있던 남자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며 향칠을 노려봤다. 향칠은 벌써 빗자루를 손에 들고 청소 중이었다.
“이런 게으름뱅이들 같으니라고!”
남자가 큰 소리로 외치고는 채찍을 휙 휘둘러 자리를 떴다. 성문 위로 올라갔던 이들은 남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는 부랴부랴 다시 내려왔다.
“왜 또 저렇게 심기가 뒤틀린 거야?”
“또 기생집 아가씨한테 쫓겨났나 보지.”
그들이 흉을 보며 분풀이를 하는 동안에도 향칠은 한쪽에서 빗자루질을 멈추지 않았다.
“향칠, 그만 쓸어. 어차피 이따가 또 똥이며 오줌이며 할 것 없이 사방에 널릴 텐데, 언제 그걸 다 치우고 있어.”
모여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향칠을 향해 외쳤지만, 향칠은 못 들은 척 묵묵히 비질을 했다.
“향칠도 참, 뭐하러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해.”
“그러게. 장인어른한테 부탁해서 다른 곳에 뒷돈을 좀 찔러주면, 어느 성문을 가도 가축 천지인 이 남문보다는 나을 텐데.”
“맞아. 그런 장인어른을 두고 왜 이런 말단 관리를 하겠다고. 집에서 복이나 실컷 누리지.”
“무슨 장인어른이야, 아버지라잖아.”
“그럼 더 좋은 거 아냐? 장인어른보다도 가까운 사인데.”
사람들이 향칠을 주제로 잡담을 해대는데도, 향칠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비질에 열중했다. 다만 빗자루에 들어가는 힘이 점점 커지면서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성문 앞이 순식간에 뿌연 먼지로 자욱해지자 성 밖으로 나가고자 기다리던 백성들이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벼슬아치들의 눈에 이런 말단 관리는 개만도 못한 존재였다. 백성들의 눈에도 사람 취급을 받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입을 막으며 뒤로 비켜설 뿐, 향칠에게 불평을 털어놓는 이는 없었다. 향칠의 거센 비질이 몇 번씩이나 백성들의 몸에 닿았지만, 다들 찍소리도 못 내고 화를 삭였다.
얼마 안 가 성문이 열렸다. 성문 안팎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성문을 통과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온갖 가축들이었다.
향칠은 계속해서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비질만 했다. 가축들이 우르르 지나가자 땅바닥은 또다시 똥오줌 천지가 됐다. 행인들이 가축을 피해 지나가려다가 돼지나 양들을 놀라게 하는 바람에 가축들은 더욱 제멋대로 날뛰었다. 이 난리 통에 향칠도 분뇨를 밟게 됐고, 오물이 튀어 옷에도 얼룩이 남았다.
“에라이! 사람한테 모욕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짐승한테도 모욕을 당해야 해?”
향칠이 드디어 소리를 빽 질렀다. 향칠은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를 땅에 내동댕이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향칠은 대문 앞에 도착했다. 하인들은 그를 보고도 예를 올리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아예 못 본 척을 했다. 향칠은 그런 태도가 익숙한 듯,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나막신을 바닥에 벗어던지며 안으로 들어갔다.
“왜 이제야 와요?”
안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늘 이맘때 오지 않았소?”
향칠은 순간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해졌다.
“내가 그리도 보고 싶…….”
“오늘이 평소랑 같아요? 서 오라버니 형제들이 오기로 한 날이잖아요.”
내실에 있던 여인이 말을 탁 자르며 나왔다. 여인은 새로 만든 치마를 입고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을 하고 있었다. 생기 있게 연지를 바르고 버들잎같이 가늘게 눈썹을 그린 여인은 한 손으로 진주 귀걸이를 막 귓불에 꽂고 있던 참이었다. 눈가에는 웃음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향칠을 보자 웃음기를 싹 걷어냈다.
“왜 또 이렇게 지저분하고 냄새나게 하고 있어요. 누가 그런 꼴로 안에 들어오래요? 당장 나가서 좀 씻어요!”
“내가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당신이 몰라서 그러시오? 나더러 남문으로 가라고 한 게 누군데?”
향칠은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대꾸를 하면서도 차마 언성을 높이지는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얼른 씻고 서 오라버니 맞이하러 나갔다 와요. 괜히 길 헤매지 않게.”
여인이 뒤에서 소리치자 향칠은 고개를 돌려 여인을 노려보았다. 항칠의 낯빛은 붉으락푸르락했고,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물론 여인은 거울을 보느라 향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향칠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같은 시각, 벌써 출발한 서무수 형제는 경성에 있는 어느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다리 아래에서 도련님, 하고 외치면서 웃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름철인지라 강 위에는 놀잇배가 많이 떠다녔다. 사내와 놀러 나온 기녀들도 있었고, 더위를 피하러 나온 여인들도 많았다.
서무수 등은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아래를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씨, 보세요. 정말 도련님들이었어요.”
시녀가 무지개다리 위쪽을 향해 손짓하며 외쳤다.
“누이구나.”
서무수 형제들이 다리 난간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서는 몸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작은 나무배 위에 서 있는 세 여인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이는 어디 가는 길이야?”
서무수가 질문과 함께 배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소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십삼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서무수 일행에게 공수의 예를 표했다.
“선상 연회에 가는 길이에요.”
시녀가 대신 대답했다. 그러고는 서무수 등을 유심히 훑어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