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23
교랑의경 223화
“도련님들 모두 새 옷을 꺼내 입으셨네요. 저희처럼 연회에 가시는 거예요?”
시녀의 말에 사내들이 쭈뼛거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게 내가 새 옷까지 꺼내 입지는 말자고 했잖아. 우리가 무슨 선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서봉추가 낮게 읊조렸다.
유유히 흘러가는 물결 위에서 정교랑이 그들을 향해 웃으며 예를 표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무배는 빠르게 무지개다리를 지나갔다.
“도련님이 옛 연인을 만나러 가시는 게 틀림없어요.”
시녀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리 위에서 돌아선 서무수 등은 정교랑 일행을 한참 동안 눈으로 배웅했다.
“이 물길에는 총 다섯 개의 무지개다리가 있습니다. 제일 큰 건 성 밖에 있고요.”
진십삼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배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기에, 사환이 옆에서 진십삼을 부축해 줬다.
“낭자는 항상 마차를 타고 외출했지요. 오늘 배를 탄 김에 물 위의 풍경도 한 번 감상해 보십시오.”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또 다른 매력이 있네요.”
정교랑은 머리 위로 지나가는 무지개다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부터 낭자와 함께 놀러 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 다리를 이렇게 빨리 고쳐 줄 줄은 몰랐지 뭡니까. 낭자한테 잘 보일 기회를 만들기도 전에요.”
그 말에 정교랑이 진십삼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공자가 열심히 호응해 줘서 가능한 일이었죠.”
진십삼이 잠시 멈칫하다가 곧 큰 웃음을 터트렸다.
강변의 길가에서는 웬 마차 행렬 때문에 행인들이 길을 터주느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멈춰라.”
마차 안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훈련을 받은 말들은 곧장 멈춰 섰고, 앞뒤와 좌우로 붙은 호위들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와 노점상들의 호객 소리가 섞여 있었다. 호위들이 행인들을 쫓아낸 탓에 강가 쪽에는 더 이상 사람이 없었다.
마차 휘장이 올려지자, 마차 안에 있던 소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안 군왕은 강가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작은 나무배를 내다보았다. 나무배가 가까워질수록, 진안 군왕의 시야는 더욱 또렷해졌다. 나무배 위의 소년과 소녀가 서로 마주 보며 웃는 모습이 보였고, 그들이 탄 나무배는 강물을 따라 금세 앞쪽으로 멀어져 갔다.
고개를 돌린 진안 군왕의 시선이 나무배를 쭉 따라갔다.
“군왕?”
마차 옆에 서 있던 시위가 조용히 진안 군왕을 불렀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차와 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주렴 사이로 소년의 옆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선상 연회는 당연히 배 위에서 열렸다. 솔솔 불어오는 강바람을 타고 감미로운 현악기 소리가 들려오니 그 음색이 더욱 아름답게 들렸다.
“어떻습니까?”
진십삼이 젓가락을 내려놓는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나쁘지 않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십삼은 비워지지 않은 정교랑의 술잔을 보고 물었다.
“낭자도 아직 회복 중이라 술을 들지 않는 건가요?”
“아니요.”
정교랑은 손 옆에 놓여 있던 술잔을 바라보았다. 술잔 안에 담긴 맑은 술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이 술은 맛이 없어요.”
한쪽에서 칠현금을 연주하고 있던 기녀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 여기서 파는 술은 경성에서 아주 유명한 술입니다. 술이 낭자 입에 안 맞는 거겠지요.”
진십삼이 언짢은 표정으로 기녀를 흘겨보자, 기녀가 얼른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러면서도 옆에 있던 다른 기녀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런 말도 못 하게 하다니, 이 공자가 저 여인을 무척 아끼나 보네.
“네, 정말 입에 안 맞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여긴 가무도 볼 만합니다. 아직 시간도 이른데, 한번 보고 가시지요.”
진십삼이 서둘러 정교랑을 붙잡았지만, 정교랑은 이미 일어서서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건 다음번에요. 이번엔 술상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진십삼도 정교랑을 따라 몸을 일으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육낭이 곧 떠납니다.”
진십삼이 불쑥 말을 꺼냈지만, 정교랑은 담담하게 네, 하고 대꾸했다.
놀잇배의 복도가 워낙 좁은지라, 정교랑과 진십삼은 앞뒤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진십삼을 옆에서 부축할 수 있는 공간도 모자라 사환은 조용히 진십삼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정교랑의 걸음걸이가 느린 편이라 진십삼이 넘어질 일은 없어 보였다.
“서북으로 간다더군요.”
정교랑이 다시 네, 하고 대꾸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놀잇배의 선실에서 걸어 나왔다. 좀 전에 타고 왔던 나무배가 한쪽에서 대기 중이었던 터라, 시녀가 바로 정교랑을 부축하며 나무배에 옮겨 타려고 했다.
“정 낭자.”
진십삼이 뒤에서 외치자 이미 나무배로 발을 옮긴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주육이 낭자한테 술을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진십삼의 물음에 정교랑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죠. 난 그 사람이 아닌걸요.”
진십삼은 정교랑을 보며 실소를 짓더니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나무배가 노를 저으며 천천히 움직이자, 여인이 저쪽에서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진십삼도 서둘러 예를 표하고는 멀어지는 나무배를 눈으로 배웅했다.
마차가 저택에 다다르자, 진십삼은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손을 내저으며 계속해서 부축해 주려는 사환을 물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십삼.”
익숙한 목소리에 잠시 넋을 놓은 채 걷고 있던 진십삼이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안뜰까지 걸어와 있었다. 부채를 살살 흔들고 있던 진 부인의 눈가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이게 무슨 우연이람. 네가 돌아오는 것도 마주치고. 어디 가서 놀다 왔니?”
진 부인이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머니, 이런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은 언제쯤 지겨워지실는지요?”
진십삼은 진 부인을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잘 놀았는지 궁금하신 거죠?”
진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깔깔 웃으면서 옆에 있던 여종에게 말했다.
“아이고, 우리 똑똑한 십삼이 또 다 알아챘나 보네.”
“그럼요, 부인. 우둔한 저희도 알아차릴 정도인데, 도련님은 오죽하시겠어요.”
여종이 웃자, 진 부인은 더욱 크게 웃었다. 진십삼은 그런 진 부인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더욱 시원스러워졌다는 거야. 그래, 변했어, 다 변했지.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그 낭자와는 잘 놀다 온 게야?”
진 부인이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럼요.”
진십삼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진십삼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오늘 오찬 연회는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간 것 같지?
오찬을 마친 후, 서무수 형제는 겨우 대문 밖으로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 노야께서 예의를 너무 차리셨어. 이게 배웅이야? 몸싸움이지.”
서봉추가 말하면서 이리저리 잡아당기는 바람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했다.
“동 노야께선 우릴 정말 살뜰히 대해 주시네.”
범강림이 감탄했다.
“특히 셋째 형님을요. 간다니까 셋째 형님 손을 꼭 붙잡고 안 놔주시던데요.”
한 형제의 말에 다른 형제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서무수가 굳어진 얼굴로 노려봤다.
“헛소리하지 마. 그런 농담은 이제 조심해야 해.”
형제 몇이 입을 삐쭉였다.
“셋째 형님은 너무 고리타분하다니까.”
“고리타분한 게 아니라, 그, 그 뭐라고 해야 하나. 눈에 차지 않는다?”
“눈에 차지 않는다는 말은 글을 모르는 나도 할 줄 알아.”
“셋째 형님은 원대한 포부를 가졌으니, 데릴사위로 들어가 그 덕 보고 살고 싶지 않은 거겠지.”
“내가 보기에 셋째 형님은 동 낭자가 눈에 차지 않은 거야. 셋째 형님의 책에서 튀어나온 듯 백옥 같은 얼굴을 가진 여인은 아니잖아…….”
서무수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농담은 더욱 짓궂어졌다. 서무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형제들에게 외쳤다.
“허튼소리 그만하라니까!”
서무수가 놀림을 당하는 사이에 그들은 벌써 큰길가 쪽으로 들어섰다.
“참, 근데 가장 중요한 얘길 우리가 하고 나왔나?”
갑자기 범강림이 걸음을 멈추고는 물었다. 다른 형제들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췄다.
“제일 중요한 일이 뭔데 그러시오?”
서봉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범강림이 대답했다.
“앞으로 왕래하지 않는다는 거 말이다.”
서무수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차마 입을 못 뗐습니다.”
정겹고 따뜻하게 맞이하던 동 노야와 자리를 함께해 준 향칠 부부 앞에서 앞으로는 서로 왕래하지 않고 지내자라고 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제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강림 형님.”
범강림을 부르는 소리에 형제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향칠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쫓아왔다.
“아버님께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이 돈을 꼭 가져다주라고 하셨습니다.”
향칠이 비전 한 장을 꺼내며 말하자 범강림은 뒷걸음질까지 치며 거절했다.
“말했잖아, 우리도 돈 있다니까.”
향칠이 웃었다.
“형님들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아버님께선 걱정하실 겁니다. 그리고 객잔에서 소일거리나 하는 처지에 벌어 봐야 얼마나 번다고요. 집으로 들어와 점포 일을 돕는 게 내키지 않는다니, 아버님께서는 도저히 마음이 안 놓이신답니다. 그러니 이 돈은 가져가십시오. 경성에서 돈은 아무리 많아도 많은 게 아니에요.”
거기까지 말한 향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했다.
“이건 아버님께서 주시는 돈입니다. 제가 그때 드린 몇 푼 안 되는 돈이 아니니 가져가세요. 제가 달리 도울 건 없고, 이 돈을 받아두라는 말씀밖엔 못 드리겠네요. 지난번 일을 꺼내지 않은 것도 고맙고…….”
향칠의 얼굴에는 자책과 창피함이 뒤섞여 있었다.
“강림 형님, 그리고 형님들, 절 원망하시죠?”
“아니야. 도리어 고맙지.”
서무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당초에 향칠이 넓은 아량으로 서무수 형제들을 받아주었더라면, 그날 밤 길을 잃은 금가아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며, 금가아도 정교랑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서무수 형제가 경성으로 온 이유는 정교랑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큰 경성 바닥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적잖이 힘을 들여야 했다. 그런데 일이 수월하게 풀린 덕에 경성에 오자마자 정교랑을 만났고, 엉겁결에 돕기까지 했다.
사소한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은인이었던 정교랑은 어마어마한 보답을 안겨 주며 조금의 의심도 없이 이들을 믿고 의지했다.
그리 대단한 여인에게 ‘의지’라는 단어를 쓰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여인이 정말로 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요즘의 나날은 꼭 꿈을 꾸는 것만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