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28
교랑의경 228화
대청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본 주육낭과 진십삼은 하던 대화를 멈추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비록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사낭은 진십삼과 주육낭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주육낭은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진십삼은 웃으며 정사낭에게 답례를 했다.
“혹시, 어느 분이?”
진십삼이 불쑥 물었다. 정사낭과 왕십칠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왕십칠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몸을 올곧게 폈다. 그러고는 진십삼을 향해 득의만면한 미소를 보냈다.
“어떠시오? 만족스럽습니까?”
진십삼이 호기심 담긴 말투로 이어서 물었다.
“그럼요, 만족하고 말고요.”
왕십칠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서 가자.”
주육낭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둘 다 주씨 집안의 아들들이라지만, 어찌 성격이 이리 다를 수가 있나. 하나는 백옥과도 같이 부드러운 성품인데, 다른 하나는 저리 거칠고 포악해 보이다니.
정사낭과 왕십칠은 주씨 저택에서 당한 수모를 떠올리면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어찌 됐든 정교랑을 만나긴 했으니, 두 사람 모두 원하던 바를 이룬 셈이었다. 주씨 가문과 더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마차에 올라탔다.
주육낭이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으로 가자, 진십삼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시녀는 찻잔과 주전자를 치우고 있었고, 정교랑은 이제 막 대청 밖으로 나오려던 참이었다.
“너, 어떻게 할 생각이야.”
주육낭이 묻자 정교랑이 반문했다.
“뭘 어떻게 해요?”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정교랑을 쳐다보자, 진십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낭자, 어떻습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요.”
주육낭이 앞으로 한걸음 내디디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나쁘지 않다는 건데?”
“저 사람이요.”
정교랑이 태연하게 손으로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가 괜찮다는 거야?”
주육낭은 답답하다는 듯 다시 한번 물었다.
“집안도 괜찮고, 사람도 괜찮고. 다 괜찮다고요.”
정교랑이 하나씩 말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육낭은 어금니를 꽉 물고 정교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진심이야?”
“혼사는 인륜지대사인데 당연하죠.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난 거짓말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저런 사람에, 저런 집안인데 네, 네가…….”
주육낭은 또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손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말을 더듬었다.
“좋긴 어디가 좋아? 정교랑. 넌 이제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남들은 아직 너를 바보로 알고 있어! 바보를 데리고 살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좋은 사람이야? 저자들이 무슨 꿍꿍이속일지 누가 알아! 네가 저런 집안에 시집가면, 좋은 날이 있긴 하겠냐?”
주육낭의 외침에 차를 새로 우려 온 시녀가 멈칫했다. 저런 사람에, 저런 집안에, 좋은 날이 있긴 하겠냐고?
“살아 보지도 않았는데, 좋을지 나쁠지 어떻게 알아?”
시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때 방 안에서 똑같은 말이 들려왔다.
“살아 보지도 않았는데, 좋을지 나쁠지 어떻게 알아요?”
사각사각 옷자락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정교랑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미소 띤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웃고 있는 정교랑의 얼굴은 예전처럼 이상하지 않고 퍽 아름다웠다. 하지만 주육낭은 순간 오싹했다.
문득 저 여인이 위아래로 왕십칠을 훑어보던 모습이, 이것저것 상세하게 집안에 관해 묻던 모습이, 꼭 제 발로 걸어온 먹잇감을 보는 호랑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깟 왕십칠이 뭐라고? 그깟 왕씨 가문이 뭐 대단하다고? 저 여인이 마음만 먹으면, 왕씨 성 따위는 언제든 정씨 성으로 바꿀 수 있어.
가엾다고? 긴장된다고? 불안하다고? 걱정된다고?
누가 그래야 하는데? 저 강주 바보가?
아니, 여전히 자신들이 이득인 줄 착각하는 안일한 왕씨 가문이 그래야지!
옥대교 저택의 대문이 닫히자, 주육낭은 말고삐를 쥔 채로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봤다. 이미 마차에 올라탄 진십삼이 주육낭을 재촉했다.
“걱정 그만하고 가. 정 낭자는 괜찮을 거야.”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진십삼을 흘겨보았다.
“누가 걱정한다고 그래? 자네는 여기까지 쫄래쫄래 뭐하러 왔어?”
“난 걱정하는 게 아니야. 마음이 안 놓이는 거지.”
말을 마친 진십삼은 씩 웃고는 채찍을 휘둘러 출발했다.
진십삼이 집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모친과 우연히 마주치는 대신 곧장 불려 가게 됐다. 진 부인이 또 어디서 의원을 데려왔기 때문이다.
진십삼은 의원에게 검진을 받으며 무얼 먹어도 되고, 무얼 먹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 한참이나 당부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약을 한 사발 들이켜고 나서야 겨우 진료가 끝났다.
한바탕 진료가 끝난 뒤, 진십삼이 진 부인을 쳐다봤다. 진 부인은 눈웃음을 지으며 진십삼을 빤히 바라봤다.
“어머니, 다 보셨습니까?”
진십삼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니, 아직.”
“십육 년이나 보셨는데, 아직도 부족하세요? 그런 말은 믿는 사람도 없을걸요, 아버지한테나 통하지.”
진 부인이 깔깔 웃었다.
“네가 기분 나빠 하는 걸 십육 년 만에 처음으로 보고 있는데, 당연히 부족하지.”
“제가 기분 나빠 하다니요?”
진십삼이 씁쓸하게 웃어 보이자 진 부인이 손가락으로 진십삼의 이마, 눈썹, 가슴팍을 가리켰다.
“여기, 여기, 여기.”
“어머니, 그만하십시오. 제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진십삼이 몸을 일으키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소심하게 목청을 높였다. 대청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진십삼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다들 처음 본 터였다. 진 부인도 깜짝 놀랐는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진십삼을 가리키던 그녀의 손은 허공에 멈췄고, 옆에 있던 여종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십삼, 성질도 부릴 줄 아네?”
진 부인이 금세 웃음을 보이며 부채질을 하자 대청 안의 분위기는 다시 평온해졌다. 진십삼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예전에는 제 몸이 정상이 아니다 보니, 정상인 흉내를 냈던 것뿐입니다. 이젠 정상이 됐는데, 계속 연기할 필요 있겠습니까? 기분이 좋지 않으면 성을 낼 수도 있는 거죠.”
진십삼이 옷소매를 뿌리쳤다. 진 부인은 그런 진십삼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래, 그래. 피치 못할 때에 피치 못할 상황에 처했을 땐,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에 따라야만 하지. 역시 우리 십삼은 똑똑해.”
진 부인이 진십삼을 향해 손을 뻗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자, 가까이 와 보거라. 이 어미가 정상인 십삼을 좀 봐야겠다. 아무리 봐도 충분하지가 않단 말이야.”
진십삼은 어이가 없다는 듯 소매를 다시 한번 뿌리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을 부축하려는 사환에게 오지 말라는 손짓을 하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진십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사실, 처음부터 괜한 고민을 했던 거야.”
진십삼은 입꼬리를 올리고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는 그러지 않았던가. 화를 내는 것도, 걱정하는 것도 다 남이지. 정작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그 여인은 이 모든 것을 그저 연극 보듯이 즐기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도대체 누가 연극을 하고, 누가 그걸 보고 있는 건지 원.
다른 여인들한테는 시집갈 집안과 남편을 고르는 게 일생일대에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만, 이 여인은 생명을 다루는 일조차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일인데, 혼사쯤이야 무슨 대수라고.
심지어 그녀는 어렸을 때 병을 앓고, 모친을 여의고 부친에게서도 버림받았지만, 그래도 지금껏 잘 살아오지 않았던가.
피치 못할 때에 피치 못할 상황에 처했을 땐,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에 따라야만 하지.
진십삼은 발걸음을 멈췄다. 정 낭자는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괴로울까.
“공자님?”
사환이 제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진십삼을 불렀다. 사환은 진십삼이 걷다 지쳐 멈춰 선 줄 알고 가까이 다가가서 부축하려 했다.
진십삼이 갑자기 몸을 휙 돌렸다. 사환은 깜짝 놀라 자신의 윗전을 쳐다보았다.
“그래서는 안 되지.”
진십삼이 대뜸 말했다.
“공자님, 뭐가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의아한 표정의 사환이 진 공자에게 물었다.
“맞아, 그래서는 안 돼.”
진십삼은 혼잣말을 하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전보다 빨라진 걸음걸이였지만, 여전히 비틀거렸다. 뒤에 있던 사환은 영문도 모른 채 진십삼을 따라나섰다.
같은 시각, 주육낭이 주씨 저택에 도착했다.
“어떻더냐?”
목이 빠져라 주육낭을 기다리고 있던 주 노야가 서둘러 물었다. 주육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네, 하고 대답했다.
“‘네’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주 노야가 즉시 되물었다.
“그러니까, 괜찮다고요. 별일 아닙니다.”
말을 끝낸 주육낭은 곧장 목례를 하고 물러나려 했지만, 주 노야가 손짓을 하며 불러세웠다.
“기다려라, 기다려. 들어와서 이야기 좀 해 봐. 뭐가 괜찮다는 건데?”
주육낭은 고개를 들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다 괜찮다고 하니, 별일 아닌 거죠.”
주 노야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옆에 앉아 있던 주 부인은 재빨리 주육낭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아이고, 설마 교교가 그 왕씨 공자를 마음에 들어 한 거야?”
주 부인이 놀란 듯이 묻자, 주 노야는 그제야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교교가 이 혼사에 동의했다고?”
뭘 보고 동의한 건진 모르겠지만.
주육낭이 다시 네, 하고 짧게 대꾸하자 주 노야는 놀란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뭐라 말해야 할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왕씨 가문이, 그리 대단한가?”
주 노야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주 부인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몹시 기뻐했다.
“교교가 마음에 든다니까, 우리는 더 이상 관여하지 말아요. 내가 보기엔 왕 공자, 생긴 것도 괜찮던데요. 어딘가 얼빠진 모습이긴 했지만, 집에서 오냐오냐 기른 게 틀림없어요. 왕 공자가 그런 사람이라면, 교교가 더욱 쉬이 쥐락펴락할 수 있을 테고, 그럼 왕씨 집안도…….”
주 부인은 말하다 말고 손뼉을 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딱 알맞은 혼사네. 그럼, 교교가 얼마나 똑똑한 아이인데, 이런 혼사를 마다할 리가 없지.”
무엇보다도 왕씨 가문은 남쪽에 있으니, 혼례를 올리려면 곧 경성을 떠나겠네.
주 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참으로 아깝구나.”
“아깝긴 뭐가 아까워요? 여인이라면 누구나 다 시집을 가잖아요.”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는 미간을 좁힌 채 무의식적으로 주육낭을 쳐다봤다.
“그렇게 유능한 여인을, 다른 가문으로 시집보내라고?”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무릎 위에 놓였던 손에도 힘이 들어가면서 주먹이 꽉 쥐어졌고, 심장은 요란하게 쿵쾅댔다.
주 부인은 주 노야의 시선을 따라 주육낭을 쳐다보다가 화들짝 놀라 주 노야의 팔을 툭툭 쳤다.
“어쩔 수 없잖아요. 교교가 좋다는데.”
주 노야가 주육낭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못 참고 내뱉었다.
“왜 넌 교교의 눈에 안 찼지? 네가 그 왕씨 놈보다 못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왕씨 가문과 우리 가문은 비할 바가 아닌데. 왜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