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39
교랑의경 239화
“향칠, 같이 좀 가야겠다.”
사내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향칠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리자 낯선 사내가 보였다. 사내 옆으로도 장정 두세 명이 있었는데, 다들 무거운 표정으로 향칠을 노려보고 있었다.
“뉘시오? 왜들 이러는 거요?”
향칠은 놀라 소리쳤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들의 손아귀에 잡혀 다짜고짜 마차에 실리는 신세가 됐다.
향칠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끝났구나, 끝났어. 그 노인네가 사기꾼이 아니었구나. 정말 재액이 닥칠 운수였어.
“벌건 대낮에 뭣들 하는 짓이오! 사람 살려······.”
향칠의 고함 소리와 함께 마차는 시끄러운 거리를 내달렸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마차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놀란 향칠이 거의 정신줄을 놓을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떠밀리다시피 내린 향칠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황량한 들판이거나 버려진 폐가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저자의 한 골목이었다. 게다가 향칠이 전에 와 본 곳이기도 했다.
“손님, 이쪽으로 드세요.”
입구에 있던 점원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마침 식사 시간이었다.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는 아니었지만 손님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었다. 신선거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들어가자.”
사내가 뒤에서 향칠을 밀며 말했다. 향칠은 시선을 거두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왜들 이러시오? 대로변에서 사람을 잡아가다니, 댁들은 국법도 없소?”
소리치던 향칠은 어느 별실로 떠밀려 들어갔다. 별실 안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향칠은 그중 한 여인을 대번에 알아봤다.
“당신이었군!”
향칠이 소리쳤다.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되자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겁낼 게 뭐 있어? 다들 수군거렸잖아. 태평거가 이번엔 빠져나가기 힘들 거라고.
“이보시오, 낭자. 이게 무슨 짓이오?”
향칠이 분기탱천하여 소리치자 정교랑이 향칠을 빤히 쳐다봤다.
“당신이 한 짓이었군요.”
“내가 뭘 했단 거요?”
향칠은 버럭 소리를 지으며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태평거를 노린 음모인가 싶어 저 어린 계집이 날 떠보는 것이렷다? 날 잡아 온 것도 일단 저지르고 보잔 생각이었겠지.
“이보시오, 낭자.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이제 향칠은 분노가 치밀기보단 성가시단 생각이 들었다.
“말 안 하면 방법이 없을 줄 알아요?”
정교랑이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시선을 돌리자 그 위에 놓인 종이가 향칠의 눈에 들어왔다.
“이것들은 내가 관부에서 가져온 익명의 투서예요. 이건 당신이 오늘 아침에 쓴 문서고.”
정교랑이 탁자에 놓인 종이를 앞으로 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죠?”
향칠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가소롭군! 이런 게 무슨 주인장이라고! 태평거와 신선거의 주인장은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이렇게 어린 계집을 내세워 뭘 어쩌자는 건지! 이제 보니 태평거 뒤에 있는 진짜 주인이 정말 며칠 못 버틸 거 같군.
“낭자, 난 정말 모르는 일이요.”
향칠은 탁자 위를 쳐다보며 웃음까지 지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낭자. 가각고(架閣庫: 문서를 보존, 관리하던 관청)의 송 대인이 안 계셨나 본데, 그 밑에 있는 말단 관리들은 아주 영악하기 그지없어요. 그 사람들한테 속아 뭘 잘못 가져온 거 아니오?”
“이제 보니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군요.”
정교랑이 불쑥 말했다.
뭐라고? 그걸 어찌 알았지? 웃고 있던 향칠의 표정이 움찔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겁이 없구나.”
정교랑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손에 쥐었다. 조용한 별실 안에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따라 향칠의 마음도 쭈글쭈글 구겨졌다.
이건 속임수야! 증거가 없는데 겁낼 게 뭐 있어!
“낭자,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뭡니까?”
향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 고집 한번 세구나!”
지금껏 옆에서 잠자코 앉아 있던 소년이 버럭 호통을 쳤다.
“네놈의 입을 못 열 성싶으냐?”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마음은 약한 자로군. 시정잡배나 쓰는 공갈 협박이라니, 큰일을 할 놈은 아니야.
향칠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집이 센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진짜 몰라서 그럽니다.”
“범강림 형제가 경성에 와서 맨 먼저 만난 게 당신이죠? 그 사람들이 탈영병인 건 당신만 알고 있고요.”
“낭자, 또 넘겨짚는 겁니까? 강림 형님네한테 물어보긴 했고요?”
향칠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지며 냉소까지 지었다.
“그래요. 병부에서 그들을 데려갔으니, 아무도 만날 수 없단 사실도 알고 있군요.”
향칠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시답잖은 소리. 어린 계집이 으름장을 놓는다고 겁낼 줄 알고? 내가 말단 관리라고는 하나 말단 관리들 사이에도 나름의 연줄이 있는 법이야.
“아주 똑똑히 알고 있네요. 주도면밀하게 준비했고요. 그러면서 내가 뭘 묻는지 모르겠단 거예요?”
향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당신을 부른 건, 뭘 묻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인정하라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뭘 알고 있는지, 알려 주려는 것뿐이죠. 잘 들어요. 당신이 범강림 형제의 일을 밀고한 걸, 내가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말뿐이고 증거는 없단 소리잖아. 당황스러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걷혔다.
“낭자, 사람 좀 잡지 마시오.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림 형님네가 왜 잡혀갔는지는 나한테 물을 필요 없이 거리에 나가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알 거요.”
향칠이 손을 내저었다.
“당신네 태평거가 누굴 잘못 건드려 보복을 당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소. 왜 굳이 날 잡고 늘어지는 거요? 이러면 뭐 좋은 거라도 있소?”
정교랑은 향칠을 빤히 보며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하던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은 범강림 형제와 의형제를 맺었어요. 당신은 동씨 가문의 낭자를 좋아했지만, 그 여인은 서무수를 마음에 뒀죠. 서무수가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걸 거절하는 바람에 동씨 가문에서 당신을 데릴사위로 들인 거고요.”
향칠이 무어라 반박하려고 입을 움찔거렸지만, 정교랑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동씨 가문은 계속해서 서무수를 대우했고, 동 낭자 역시 옛정을 잊지 못했죠. 일 년 전, 경성으로 온 서무수 형제는 당신을 찾아갔고, 탈영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요. 도움을 청하러 갔던 건데, 물론 당신은 거절했죠. 관아에 발고하는 대신, 서둘러 떠나라고 했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경성에서 재회했죠. 동씨 가문에서 귀빈으로 대접하니, 울분이 차올랐겠죠. 그래서 익명의 투서를 썼고요. 당신이 그들 형제를 해친 거예요. 이게 내가 말하려던 거고요.”
향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낭자의 말일 뿐이죠. 그렇게 우기겠다면, 나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요. 이게 내가 하려던 말이에요. 당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난 신경 안 써요. 난 내가 확신하는 일만 신경 쓰죠.”
“그렇다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군요. 이만 가도 되겠소이까?”
항칠은 냉랭하게 쏘아붙이고는 곧장 뒤돌아 나가려고 했다. 문가에 다다랐을 즈음, 정교랑의 말이 향칠을 불러세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했죠?”
향칠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난 조용히 사는 말단 관리입니다. 낭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래도 난 말해 주고 싶네요.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의가 작년에 경성으로 온 일은 알고 있죠? 진 노태야를 살리고, 금석을 먹었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동 내한도 구한 사람이요. 다들 도교 이 진인의 제자라고 하죠.”
갑작스러운 말에 향칠은 멈칫했다.
그 놀라운 일은 경성 바닥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과장도 적잖이 섞였겠지만, 성문을 지키는 향칠도 일찌감치 소문을 들은 터였다.
근데 그 얘길 왜 꺼내는 거지? 향칠은 잠자코 정교랑을 쳐다봤다.
“내가 그 신의예요.”
정교랑이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도교 이 진인이 직접 사사한 제자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녔죠. 염라전에 가서 사람 목숨을 구해 올 수도 있고요.”
옆에 있던 주육낭과 반근까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교랑이 신선에게 비술을 전수받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본인은 시종일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놀랄 수밖에.
그럼, 설마 그 소문이 진짜였다고?
향칠도 낯빛이 변했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 그래서 뭐요?”
“당연히 당신 목숨도 가져갈 수 있죠.”
“아, 아니, 내 목숨을 가져가서 뭐하려고! 뭔데 당신 맘대로 추측이야?”
“맞아요. 내 맘대로 추측한 거예요. 당신이 그 사람들을 해쳤고, 우리 태평거를 노렸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내 원수죠. 내가 원수를, 은인 대하듯 떠받들기라도 할까요?”
추측이라면, 증거가 없단 거잖아. 이 여인의 공갈에 걸려들면 안 돼!
“난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이런 식으로 사람 모함하지 마시오!”
“그래도 억지를 부리네. 저런 자와 무슨 말을 더 섞어!”
주육낭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대체 뭐하자는 거야?”
향칠이 두려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 소년이 오늘 아침 감문관 내실에 앉아 있었단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문서를 작성하러 불려갔을 때, 차를 들여가는 사이 잠깐 들어 올린 문발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던 소년이었다.
감문관을 움직일 정도라면 감문관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겠지.
“뭘 어쩌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말해 주려는 거죠. 당신 명줄은 오늘까지라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겠다니!”
향칠은 소리를 지르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지만, 밖에 있던 사람에게 막혔다.
“난 돈이 있어요. 병을 치료하고 받는 거금의 치료비 외에 태평거도 있죠. 태평 두부도 있고 신선거도 있고요. 내가 가진 돈은 당신이 평생 가도, 아니 동씨 가문이 평생 가도 못 벌 액수죠.”
향칠이 문에 기대섰다.
“난 권세도 있어요.”
정교랑은 주육낭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내 외숙 댁의 오라버니예요.”
오라버니······. 이 여인이 주육낭을 오라버니라고 부른 건 거의 처음이었다. 주육낭은 온몸에 가시가 돋친 듯 좌불안석이었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은, 당신도 알 거예요. 권세가 대단한 건 아니지만, 당신 같은 말단 관리나 분뇨를 치우며 가업을 이룬 동씨 가문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죠. 날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진소 상공 댁이나, 동 내한의 가문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뿐인가요? 죽은 사람도 살리는 내 비술로, 목숨을 구하고 싶은 사람도 많아요. 당신 같은 사람은, 내 눈에, 개미 새끼 한 마리만도 못해요. 아무것도 아니죠.”
귀에 담을 일도 거의 없었던 거물급 인물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자 향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경실색한 표정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당신 같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죽이는 일에, 신경 쓰고 말고 할 게 있을까요? 내가 지금 이 신선거 대청으로 나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당신을 때려죽인다 해도, 누가 날 어찌할 수 있을까요?”
향칠은 다리에 힘이 풀려 문에 기대 주저앉다시피 했다.
“나 같은 사람이 당신이 이 일을 인정하든 안 하든, 따질 필요 있겠어요?”
정교랑은 들어올 때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사내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 목숨은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