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47
교랑의경 247화
시녀는 서원 밖으로 나와서야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시녀는 놀라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불쑥 튀어나온 이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맞았구나. 누이, 여긴 어쩐 일이야?”
정사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일이 있어서요.”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무슨 일?”
정사낭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별일 아니에요.”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기에 정사낭은 대충 눈치를 챘다. 말하기 싫다면 굳이 캐묻지 않아야겠지.
입으로는 누이라 하지만, 사실 누이를 본 일은 다 합쳐도 서너 번밖에 안 됐다.
정사낭은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잠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정사낭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몸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얼마 안 되는데, 누이가 가져가서 써.”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돈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정사낭이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딱히 할 말이 없다 보니 더는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정교랑의 말에 정사낭은 얼른 길을 열어 주고, 정교랑의 마차까지 직접 데려다주었다.
“왕십칠이 찾아가서 귀찮게 한 건 아니지?”
정사낭이 물었다.
“아니에요.”
“그 녀석 집에서 사람이 왔어. 보아하니 데려간 모양이야. 귀찮게 할 일 없을 테니 안심해.”
정사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본인도 긴가민가하고 있었던 눈치였다. 정교랑은 네, 하고 짧게 대답한 후 계속 앞으로 걸었다.
“혹여, 혹여 왕십칠이 잘 대해 주지 않으면, 나한테 얘기해.”
따라 걷던 정사낭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말하면 어쩔 건데? 죽일 수라도 있어? 시녀가 곁눈질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우리 아씨는 하실 수 있어.
정교랑은 미소로 감사 인사를 전한 후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고 한참 후에 고개를 돌렸는데도, 정사낭은 서원 입구에 그대로 있었다. 정사낭은 차츰 작아져 까만 점이 될 때까지 서 있었다.
휘장을 내린 시녀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든 돈주머니를 쳐다보았다.
“필요 없는 건 주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정작 필요한 건 돕겠다는 사람이 없네요.”
시녀가 중얼거렸다.
“각자 자기 능력에 따라 움직이는 거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할 순 없어.”
정교랑이 말했다. 물론 시녀도 이치는 잘 알았다. 시녀가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께서 말씀하신 이치는 저도 알아요. 다만······.
“아씨, 아씨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시녀가 불쑥 물었다.
“뭘 어떻게 해?”
정교랑이 되물었다.
“전엔 노태야도 그러시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말해서, 저 스스로도 제가 똑똑하고 영리하다고 생각했어요. 세상 이치를 잘 아는 줄 알았죠. 무슨 일이든 훤히 알고, 어떤 어려움에 처하든 똑같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냥 착각이었어요. 괜히 우쭐했던 거죠.”
시녀가 말했다.
“전엔 이런 일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잖아.”
정교랑이 대꾸했다.
“아씨도 이런 일을 경험하신 건 아니잖아요. 태평거의 일이며 혼사에 관한 일, 그리고 지금은 또······.”
그중 어느 하나만 해도 평범한 이들에겐 크나큰 난관이었을 것이다. 초조해 어쩔 줄 모르며 좌불안석이겠지. 더구나 열댓 살밖에 안 된 어린 낭자라면 더더욱.
“아씨께선 대체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전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어요. 가슴도 두근두근하고 좌불안석인데, 아씨께서는 당황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으시잖아요. 아씨를 오래 모셨지만, 여전히 배울 수가 없네요.”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이런 건 안 배워도 돼. 딱히 좋은 일도 아니고.”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씨, 이게 어떻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이렇게 침착하고 대범한 건, 평생을 들여 수양해도 이를 수 없는 경지인데······.”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난 아니야. 내가 이러는 건, 내게 마음이 없기 때문이지.”
시녀가 멈칫했다. 또 이렇게 말씀하시네.
“난 그저 내 일을 할 뿐이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야.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 건, 그들을 위해서라기보단, 날 위해서라고 하는 게 맞아.”
그들은 그녀가 구한 사람이었고, 그녀가 오라버니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잡혀가 목숨을 잃는다면, 자업자득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떠올릴 때마다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다.
사실 대부분의 일이 그랬다. 남들이 도움을 청할 때 인정과 도의를 위해 그들을 돕는다 해도, 그 안에는 자신의 체면과 우쭐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담기기 마련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일이 뜻대로 안 됐을 때는, 체면이 깎인 것 같고 망신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인정하고 싶지 않아진다. 부처님은 향불 덕에, 사람은 체면 덕에 사는 법이다.
시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씨, 뭐하러 자기 비하를 하세요. 다들 그러려니 하는 일인데, 그리 딱 잘라 말씀하실 것까진 없죠.”
“나 스스로 똑똑히 기억하려는 거야. 내가 이 일을 하는 건, 나 자신을 위해서라고. 누가 내게 빚을 진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랬다. 남이 그녀를 박대할 때에도 그녀는 딱히 원망하거나 실망하고 슬퍼하지 않았다.
정교랑이 손을 들어 가슴에 가져다 댔다.
이 세상에,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이는, 그녀가 바라고 원하는 사람뿐이리라.
시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아씨가 의지할 사람은 없단 말이구나.
“그럼 이제 어쩌죠? 또 누굴 찾아가야 해요?”
시녀가 물었다.
“다 찾아갔잖아. 더 찾아갈 필요 없어.”
정교랑이 대답했다.
“하지만 노야께선 아무 응낙도 안 하셨잖아요.”
“내가 장 선생을 찾아온 건, 무슨 대답을 받아내기 위해서가 아니야. 내 말을 들어달란 거지. 진 대인은 내 말을 조금도 안 들으려고 했어. 내 말을 들으려 하는 사람은 장 선생뿐이었지. 봐, 들어주셨잖아. 충분해.”
충분하다고? 시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그럼 이제 뭘 하죠?”
“이젠, 운에 맡겨야지.”
정교랑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결국 운에 달린 거구나.
시녀는 멍한 눈빛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아씨의 웃음이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표정이 단조롭던 정교랑이었다. 무뚝뚝한 표정을 짓거나, 살짝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웃음은, 뭐라고 해야 하나. 냉소?
서재 안. 장순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다시 내려놓았다.
“사람이 사물에 동화되면, 천리는 소멸하고, 인욕을 끝까지 추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제 욕심은, 나라에 아무런 해가 안 됩니다. 하지만 저들의 욕심은, 탈영병을 죽이거나 죽이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죽이려는 이면에 진짜 목적이 있죠.”
여인의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오만한 것 같으니라고! 장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붓을 들었다.
“군에 관한 일엔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기 마련이다. 집에 들어앉아 태평성대를 누리는 이가 인간사의 질곡을 어찌 안다고, 군사 일에 이래라저래라해?”
“소녀가 잘못했습니다. 선생의 가르침이 맞아요.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고 묻는 꼴이니 우스울 따름이지요.”
장순은 결국 손에 든 붓을 무겁게 내려놓았다.
“이 강주 바보가!”
장순이 무겁게 말했다.
* * *
“다시 찾아오진 않았고?”
진 노태야의 물음에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탈영병의 처벌에 관해선 결론이 났느냐?”
진 노태야의 물음에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진작 결론이 났습니다. 양측 모두 이견이 없고요.”
이견을 보이는 부분은 탈영병을 죽인 후의 일이었다. 진 노태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여인이, 또 다른 이를 찾아가진 않았고?”
노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그러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장강주 선생의 서원에······ 다녀오긴 했습니다.”
장순? 그래, 그러고 보니 둘 다 강주 사람이었군. 설마 아는 사이였나?
장순이 나선다면······. 하지만 그 꼬장꼬장한 유학자 선생이 죄를 지은 게 분명한 탈영병을 편들고 나설 리가?
“듣자니 넷째 오라비가 그 서원에서 공부한답니다. 남매가 이야기를 나눴고, 오라비가 누이에게 돈을 챙겨 주기도 했대요.”
이어진 노복의 말에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찾아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겠지.
경성에 명성을 떨친 여인이라고는 하나, 치료 조건이 워낙 까다롭고 매정하게 거절하는 통에 부잣집 권세가들과 연을 맺을 기회가 없었다. 최근에는 기적 같은 치료 성과로 경성을 뒤흔든 일도 없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경성에서 지금 정교랑의 명성은 반년 전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의술을 빌려 연을 맺고자 한다면, 그 결과는 더 안 좋겠지.
영민하고 지혜로운 여인이니 그 점은 똑똑히 알고 있을 터였다.
“사실 정 아씨께선 그 일곱 명한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 일이 정 아씨께 불똥이 튈 일도 없을 뿐더러 아무 영향도 없을 테니, 정 아씨도 그만 포기하시겠지요.”
노복의 말에 진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않을 게다.”
영민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자존심도 대단한 여인 아닌가. 자존심이 센 사람은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지.
“경성에 새로운 소식은 없고?”
진 노태야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거 누가 자빠져 죽었다나 뭐라나 하던 건?”
“아, 신선거 앞 거리에서 사내 하나가 도망을 치다가 자빠져 죽었대요.”
경성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루하루 수없이 많았다. 그나마 진 노태야가 정 낭자와 관련된 사람과 점포를 예의주시하라고 명한 덕에 알게 된 정보였다.
거리에서 사람이 자빠져 죽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 일이 마침 신선거 앞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면, 노복은 신경도 안 썼을 것이다. 진 노태야한테 말을 전한 후, 노복 본인도 잊고 있던 일이었다.
진 노태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빠져 죽었다는 사람이 그 여인과 관련된 건 아니겠지?
“성문을 지키는 말단 관리였는데 노름에 빠져 지냈답니다. 데릴사위로 들어간 자인데, 제 장인한테 놀라 달아나다가 발을 헛디뎌 자빠져 죽었대요.”
노복이 부연 설명을 했다. 진 노태야는 노복의 말을 듣고 자조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래서 선입견이 무섭다니까. 이러다 경성에서 사람만 죽었다 하면 그 여인부터 떠올리겠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여인의 성격은 진 노태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진 노태야는 고개를 돌려 병풍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 해 두었던 표시는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여전히 눈에 띄었다.
“사실 그 탈영병들을 죽이지 않아도, 노야께는 별 영향이 없지 않습니까.”
노복이 나지막이 말하자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영향이 없지. 하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느냐.”
진 노태야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저들은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어쩔 수 없지. 인간사가 그런 법이야. 장수를 지키려면 병졸을 버릴 수밖에 없는 이치지. 그러니 다들 병졸이 아니라 장수가 되고 싶어 싸우는 거고.”
노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경성에서 사는 건 쉽지 않아. 인간사도 뜻대로 이루어지지만은 않지.”
진 노태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젊은 사람이니 이번 기회에 단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야.”
진 노태야가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노복이 얼른 뒤를 따랐다.
“노야는 입궐했느냐?”
진 노태야의 물음에 노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사흘이니, 승부가 갈릴 때가 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