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64
교랑의경 264화
“바둑 구경 좀 하다 가시오. 조용하니 좋잖소. 적어도 웃긴 이야기니 뭐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진 노태야가 웃음 지으며 정교랑에게 말했다.
“각자의 즐거움이 있는 거지요.”
정교랑이 말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정 낭자는 한 번도 원한을 품은 적이 없어 보입니다.”
“원한을 품을 만한 게 없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항상 원하는 대로 일이 풀렸기도 하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어쩜 저리도 솔직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냐는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 여인의 말이 맞긴 하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남에게 원한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저 말은 지금 날 두고 하는 말인가?
처음에는 다들 정 낭자가 더는 우리 집에 발을 들이지 않을 거라고 걱정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 낭자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정 낭자는 나에게 도움을 거절당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않았던가. 저 여인은 위로를 필요로 하는 가엾은 패자가 아니라, 경이로운 승리자인걸.
수많은 생각이 찰나에 스치는 바람에 진소의 손이 살짝 떨리면서, 바둑판에 내려놓던 흰 돌의 위치가 조금 틀어졌다.
정교랑의 대답에 진 노태야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잠깐 말없이 바둑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좀 전에 정교랑이 천막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둑판 위의 상황은 이미 교착 상태에 이르렀기에, 진 부자는 한 수씩 둘 때마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검은 돌을 손에 쥔 진 노태야는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내젓고는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 바둑 두는 법은 생각이 났소? 낭자가 보기에 내가 아직 승산이 있소이까?”
바둑판 위를 잠시 쳐다보던 정교랑은 검은 돌 하나를 집어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자리에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이겼어요.”
정교랑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진 노태야와 진소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정교랑의 둔 신의 한 수는 지금까지의 판국을 뒤엎었다. 그녀의 한 수로 승자는 패자가 되고, 패자는 승자가 되었다.
진소가 바둑판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낭자, 다음번에 수를 둘 때는 미리 귀띔 좀 해주면 안 되겠소?”
진소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덧붙였다.
“내가 반나절 동안 노력했던 게 싹 다 무용지물이 되었잖습니까.”
“그건, 제 탓이 아니죠.”
정교랑은 진소의 말뜻을 알아챘는지 똑같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진 노태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만하면 됐다. 진 거면 진 거지. 자기 자신을 탓하지 못할망정, 남 탓을 하면 쓰나.”
진 노태야가 시녀들에게 손짓하여 차를 올리라고 했다.
“자자, 차나 마십시다.”
시녀들이 바둑판을 치우고 향긋한 차를 우려왔다.
“자, 한번 마셔 보시구려.”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정교랑에게 차를 권했다. 정교랑은 감사하다고 말한 뒤, 차를 한입 머금더니 멈칫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어차(御茶)라오.”
진 노태야가 말했다.
“폐하요? 황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교랑이 진 노태야를 향해 물었다.
“맞습니다. 황궁에 새로 들어온 향차지요. 내가 남겨둔 게 좀 있으니, 마음에 든다면 좀 가져가시구려.”
진소의 말에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전 차를 자주 마시지 않거든요.”
이어 정교랑은 찻잔에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머금은 채 정교랑을 눈으로 배웅했다. 몸을 일으켜 천막을 나가려는 정교랑을 진소가 불러 세웠다.
“정 낭자.”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진소를 쳐다보았다.
“선행을 많이 베풀고, 정도(正道)에 어긋난 일을 하지 마십시오.”
진소가 말했다.
“선행이요? 정도요?”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대인께서 조정에 계신 이유가 그 때문인지요? 어쩐지 대인의 운이 썩 좋진 않다고 생각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낭자가 정도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낭자가 그 반대의 편을 들었다면, 결과가 어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진 대인, 자신이 뭘 하는지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시는 건가요?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 이게 바로 진 대인께서 아셔야 할 정도입니다.”
정교랑의 말을 들은 진소는 정교랑이 천막을 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저 여인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 말하는 건가?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고?
그건 고씨 패거리들이나 하는 짓이잖아. 아무나 걸리는 대로 물어뜯고, 일부러 모함에 빠트리고, 자신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조정의 사람들을 해치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짓거리들.
저 여인이 감히 그런 짓들을 정도라고 말하다니!
“어찌 저럴 수가 있습니까!”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외치자 뒤에 서 있던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정 낭자는 항상 저렇지 않았느냐.”
힘을 빌려 무뢰배를 활로 쏴 죽이고, 위협을 받으면 조정의 관리를 해치우고. 남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거나, 몸 사리기에 바쁠 일들을 그녀는 단 한 가지의 방법으로 해결했다.
그녀의 방법은 방어도 아니었고, 인내도 아니었다. 정교랑이 택한 방법은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 진격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정교랑은 진소를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이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녀는 상대방이 어떤 이유로 도움을 거절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용감히 나아갔다.
정 낭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행동한다. 나 또한 원하는 게 있긴 하지만.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어린 낭자가 지금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건지…….”
진소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병을 치료할 줄 알고, 살인도 할 줄 안다는 것 외에, 진소는 정교랑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지자,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전하.”
선덕문 위로 다가간 내시가 커다란 모피 두봉을 건넸다.
“두툼한 두봉으로 갈아입으시지요.”
진안 군왕은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조용히 선덕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밤새도록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괜찮다. 이제 곧 끝나.”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덕문 아래에서 내시 몇 명이 긴 채찍을 들고 나왔다. 곧이어 맑고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은 채찍 소리를 듣자 선덕문을 향해 예를 올리고 어가 밖으로 물러났다.
밝고 화려한 등롱들도 하나둘씩 꺼졌다. 밤은 마치 하늘에 도사리고 있는 한 마리의 거대한 괴물처럼, 거리의 불빛을 한 입 한 입 집어삼켰다. 꽃등 놀이로 환했던 경성은 점차 짙은 어둠에 덮였다.
“전하.”
내시가 나지막이 불렀다.
선덕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고, 오직 거리를 청소하는 잡부들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가자.”
진안 군왕이 두봉을 여미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문에서 쾅 소리가 나자 연못가에서 물고기에게 밥을 주고 있던 금가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 열어!”
밖에서 왕십칠의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도련님들도 안 계시고 불안해 죽겠어요.”
시녀가 회랑 아래에 서서 근심했다. 도련님들도 떠나고, 짜증 나게 굴던 주육낭까지 떠나 아씨는 또다시 혼자가 되셨다.
“아씨, 우리 차라리 다시 주씨 저택으로 들어가 살아요.”
시녀가 고개를 돌려 대청 안을 보며 말했다.
“필요 없어.”
정교랑은 손에 든 서책을 내려놓았다.
“신선거에 가서, 오 관리인한테 뭐 필요한 거 없나 보고 와.”
또 그 심부름이네. 시녀는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들이 떠난 건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네,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
대문에서는 아직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교랑이 금가아를 부르자 금가아가 얼른 대답하고 대문을 열었다. 왕십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넌 문 안 열고 뭐하는 거야!”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고, 다들 쳐다보기만 했다. 다른 때였다면 별 생각이 없었겠지만, 어제 천가에서 여인이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본지라 왕십칠의 시종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씨, 저희 도련님께서 아씨를 걱정하셨어요. 어젯밤에 혼자 가 버리셔서…….”
시종의 말이 왕십칠을 자극했다. 어젯밤 받은 수모가 떠오르자 대문을 왜 냉큼 열지 않았는지 따질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혼자 어디 갔던 거야?”
“왕 공자님, 혼자 먼저 간 게 누군데 이러세요?”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따졌다.
“난 일이 있었고.”
왕십칠이 언짢은 투로 대꾸했다.
“화괴를 보러 가는 것도 일인가 보죠?”
시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왕십칠한테는 미인을 보러 가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뭐야? 질투라도 하는 건가?
“내가 일이라고 하면 일인 거지, 네가 어쩔 건데?”
그러자 잠자코 있던 정교랑이 시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넌 어서 네 일이나 하러 가.”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왕십칠을 째려본 다음 걸음을 옮겼다.
“어젠 바빠 보여서, 방해하지 않았어요. 마침 아는 사람을 만나서, 먼저 나왔고요.”
정교랑이 왕십칠을 보며 말을 이었다.
“덕승루 점원한테 말도 하고 나왔어요. 돌아왔을 때 내가 안 보이면, 걱정하고 물어볼까 봐요.”
어쨌든 말은 잘 듣는단 말이지. 윽박을 질러도 울지도 않고, 화를 내거나 토라지지도 않아. 차분히 말하는 것만 봐도 걸핏하면 눈물을 보이며 미안하다고 하거나 울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던 여인들과는 다르단 말이지. 이런 느낌도…… 나쁘진 않군.
“알면 됐어!”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고 회랑 아래에 앉았다.
“내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거기서 기다렸어야지.”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다음부턴 명심해. 혼자 도망쳤다간, 다신 너 안 볼 줄 알아.”
왕십칠의 경고에 정교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외숙부는 또 왜 그래? 어제 거기까지 찾아갔더니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왕십칠은 분을 못 참고 씩씩거렸다.
“해도 너무하잖아!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앞으로 그 집이랑 왕래하지 마!”
옆에 있던 나이 든 시종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아씨, 외숙부님 댁에서 천가에 자리를 잡으셨던데요? 거긴 조정의 고위급 관료만 갈 수 있는 곳 아닙니까.”
시종이 웃으며 떠보듯 말을 걸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 천가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 아니었나?”
정교랑이 말했다.
하긴 물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주씨 저택에 살지도 않는데, 그 집안 사정을 알 리가 있나. 아니, 근데 주씨 저택에 살지도 않는데 어젯밤엔 왜 그리 여러 사람한테 둘러싸여 있던 거야?
“경성에서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경성 사람들과는 꽤 가까워 보이시던데요?”
시종이 또 떠보듯 물었다.
“그 몇 가문만 아는 거야. 가깝다고 할 수도 없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시종은 무언가를 더 물으려 했지만, 왕십칠이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가깝든 말든 알 게 뭐야. 우리 집은 남쪽에서 사업하니까, 외숙이란 자는 필요 없어. 그 사람한테 수모당할 필요도 없고. 앞으로 외숙네 집안이랑 멀리해.”
왕십칠의 말에 정교랑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