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7
교랑의경 27화
우리 조모님? 이 경성 말씨는? 설마…….
“방금 들어오다가 문밖에서 주씨 가문 여섯째 공자를 만났지 뭡니까. 알고 보니 두 집안이 사돈이었군요. 그래서 같이 들어왔습니다. 내 일찍이 경성 주씨 가문에서 며칠 지낸 적이 있지요.”
료 의원이 말했다.
집사 등이 난감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대문을 지키는 이들은 료 의원을 알았기에 출입할 때 검문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료 의원과 소년이 웃으며 함께 들어올 때도 료 의원의 사람인 줄 알았지 사돈댁 손님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주씨 집안 공자도 너무하는군. 한마디 말도 없이 이렇게 남의 집에 버젓이 들어오다니! 사돈댁 안채에서 벌어지는 소동까지 다 지켜보고! 자리에 있던 정씨 가문 사람들은 부끄럽고 민망했다. 무장의 가문이라 그런지 역시 거칠고 근본이 없구나 싶었다.
“공자, 노마님 댁의 분이세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주육낭은 반근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됐네요, 이렇게 오시다니요. 우리 아씨를 보러 오신 거죠?”
반근은 반색을 하며 말했지만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지금껏 눈길조차 주지 않은 정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보며 허리 굽혀 예를 표했다.
“주씨 집안 여섯째입니다. 사돈 어르신의 서찰을 받은 부친께서 직접 가서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육낭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좀 손아랫사람답군. 정씨 가문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카, 대청으로 가서 얘기하지.”
대노야의 말에 주육낭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집사의 안내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반근은 주육낭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래, 이 일은 여기까지만 하자.”
주씨 가문 사람의 등장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대노야가 말했다.
“료 의원은 사낭의 병이 그렇게 해야 낫는다고 했다. 여기 두 계집의 마음은 갸륵하나 일을 행함에 있어 온당치 못한 부분이 있었어. 공도 있고 과도 있으니 여기서 덮도록 하겠다. 그 누구도 다시는 거론치 말아라.”
“감사합니다, 노야. 감사합니다, 부인.”
춘란은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정신을 차린 반근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대부인은 어쩐지 심사가 편치 않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대노야와 의원 모두 두 계집이 넷째 공자를 구했다고 인정한 마당에, 자신만 뭔가 수상쩍다고 물고 늘어지면 아랫것들이 섭섭하게 여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들 가서 일해라.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었다간…….”
대부인은 절대 용서치 않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두 계집이 나서지 않을 경우 아들이 목숨을 잃지 않겠는가.
“먼저 내게 고하도록 해라. 아무리 황당한 방법이라 해도 너희가 좋은 뜻에서 한 말인 걸 알면 노야와 난 너희를 믿어 줄 것이다.”
대부인이 천천히 말했다. 대부인의 말에 춘란은 죽었다 살아나기라도 한 듯 안도하며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대부인. 감사합니다, 대부인.”
춘란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인사를 올렸다. 반근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예도 표하지 않고 총총 가 버렸다. 이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아씨에게 알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모친을 여읜 딸에게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는 외가가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이던가.
몸종들이 모두 물러가자 대노야와 이노야는 주씨 가문에서 온 사돈 조카를 보기 위해 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부인과 이부인은 후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주씨 가문에서 갑자기 사람을 보낸 의도에 대해 추측했다.
“자네가 전에 귀띔을 해 줬으니 망정이지, 그 애를 도관으로 보냈으면 어쩔 뻔했나.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그 애를 보자고 했으면 둘러대느라 골치 아팠을 거야.”
대부인이 정말 다행이라는 듯 말하자 이부인은 빙긋 웃었다. 이부인으로서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낼 줄 알았으면 대부인이 아이를 도관으로 보내도록 내버려 둘 걸 그랬다.
같은 시각 정교랑 역시 주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흥분하는 반근에 비해 정교랑은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물론 흥분했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긴 힘들었겠지만. 반근이 정교랑 앞에 엎드려 정교랑의 팔을 붙잡았다.
“아씨, 이제 됐어요. 노마님은 안 계시지만 외숙 어르신 쪽에서 아직 아씨를 기억하고 계셨네요. 아씨를 외면하지 않으실 거예요.”
반근이 기쁘게 말하자 정교랑은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여섯째 공자가 오신 거래요.”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여섯째 공자는 전에 뵌 적이 없거든요. 노마님께서 절 사셨으니 주씨 가문 사람인 셈이지만 전 여섯째 공자를 알지도 못해요.”
정교랑이 반근을 쳐다봤다. 주씨 가문 사람이라고 했지.
“여섯째 공자는, 몇 살이니?”
정교랑이 물었다. 반근이 돌아온 후 정교랑이 말한 첫마디였다.
“한 열여섯쯤 돼 보였나? 아니다, 아니다, 한 열일곱쯤이요?”
반근은 그 젊은 공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지하게 가늠해 보았다.
“소리 소문 없이 들어와서는, 여기서 일어난 일을 한참 동안 잠자코 지켜봤다고?”
정교랑이 물었다. 아씨는 왜 이런 걸 물으시는 거지? 반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갑작스럽게 들리던 그 목소리와 고개를 돌려 확인했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살짝 넋이 나갔다.
“여섯째 공자께서 정말 때마침 오셨어요. 소인은 바로 겁이 달아나더라고요. 뭐랄까, 노마님께서 생전에 계실 때처럼요.”
반근이 감상에 젖어 말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있었다. 정교랑은 계속해서 팔걸이 책상에 기댄 채 병풍에 있는 글자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왼손으로 글자를 써 보았다.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연습하니 두 손 모두 제법 말을 잘 들었다.
“아씨, 우리 여섯째 공자 보러 갈까요?”
한쪽 옆에 있던 반근은 몸을 곧추세우며 묻다가 도로 앉았다.
“아니다, 여섯째 공자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죠.”
“올 때까지 기다리자. 분명 올 거야.”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네가 복수할 기회가 왔어.”
반근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정교랑을 쳐다봤다. 무슨 복수를?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 근처에 놓아둔 작은 공책을 꺼내 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낮, 여종이 또 싱싱한 무 한 바구니를 훔쳐 가는 바람에 아씨께서 못 드셨다.
주육낭이 이노야를 따라왔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이 많으면 놀라더라고. 그래서 여기 머물게 했지.”
이노야는 말하고 나니 이런 꼬맹이한테 내가 왜 해명을 하고 있나 싶어 후회가 들었다. 어쨌거나 자기 딸인데 어디에 묵게 하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이노야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집에 있는 거면 어디서 지내든 다 좋죠.”
주육낭이 말을 이었다.
“누이가 돌아왔으니 다행입니다. 황궁보다 좋은 게 누추한 자기 집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이노야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 자식이 면전에 대고 사람을 모욕해?
“지금껏 집에서 이렇게 멀리 나온 건 처음이라서요. 집 생각이 많이 나네요.”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이노야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모부는 어릴 때 공부하러 집을 떠나 계시고 나중엔 외지로 부임하셨으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노야는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마른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내라면 천하에 뜻을 둬야지. 너도 크면 그럴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정교랑 거처의 문 앞이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나이 많은 여종과 몸종이 예를 표하며 맞이했다. 대청 처마 아래에 서 있던 반근은 기뻐하며 노야와 공자를 불렀다. 딸이 돌아온 후 이노야가 딸의 거처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 방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방에서 나던 그 역한 냄새가 훅 끼쳐 질식할 것 같았다.
“너희 아씨는 깨어 있느냐, 잠들었느냐?”
이노야는 걸음을 멈추고 반근에게 물었다. 주육낭 역시 걸음을 멈추고 처마 아래에 선 반근을 바라봤다.
“깨어 계세요. 아씨를 모시고 나올게요.”
반근은 이노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교랑을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아씨, 아씨. 저기 좀 보세요, 사촌 공자세요.”
반근은 정교랑의 팔을 부축하며 정교랑을 주육낭에게로 안내했다. 눈앞의 소녀를 본 이노야와 주육낭은 살짝 멍해졌다. 하지만 소녀의 눈부신 미모에 대해 곱씹어보기도 전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나 배고파.”
정교랑의 말에 이노야는 멈칫했다.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표현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다 말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심한 눈빛으로 빠르게 정교랑을 훑은 주육낭은 곧바로 반근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교랑의 팔을 붙잡고 있는 반근의 손을 보며 주육낭의 입가에 설핏 웃음기가 지나갔다.
“고모부!”
주육낭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노야를 보고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정교랑은 다시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바보는 정상인의 일에 간여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정교랑은 병풍 뒤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았다. 커다란 옷자락은 바닥에 질질 끌렸고 귀밑머리는 빼져나온 상태로, 조용히 그리고 멍하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이 모습을 봤다면 그야말로 나무 인형이 따로 없다고 탄식했을 테지만 예외는 있었다.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대청을 힐끔 봤다.
“일개 바보가.”
주육낭은 씩씩거리며 손가락질을 하더니 이노야를 바라봤다.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노야는 굳은 표정이었고, 곧이어 문밖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대부인과 이부인이 급히 들어오며 물었다. 주육낭의 시종들도 달려와 부엌에서 물건을 끄집어냈다. 바닥난 쌀독과 시들시들한 무, 물에 담가 놓은 두부 반 모, 싱싱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생선이 전부였다.
허드렛일을 하는 나이 많은 여종과 몸종, 반근은 전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육낭이 앞에 있는 독을 발로 홱 걷어차자 때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대부인과 이부인은 기겁을 피하며 피했다.
“이봐요, 정씨. 그래도 고모부라고 불러 줬더니만, 우리 고모님의 딸을 이따위로 대우합니까!”
소년은 씩씩거리며 소리치더니 손을 허리춤에 대며 검을 뽑아 들 태세를 취했다. 그러더니 검이 없는 걸 발견하고 뒤돌아 시종을 발로 차며 소리쳤다.
“내 검을 가져오너라!”
무관 출신인 주씨 가문은 난폭하고 거칠었다. 주먹으로 말하는 게 그 집안 가풍이었으니, 의분에 찬 소년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부인은 얼른 주육낭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육낭, 할 말 있으면 좋게 말로 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요?”
주육낭은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누이를 이따위로 대접한 겁니까? 사지 멀쩡한 보통 사람도 아니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데다 거동까지 불편한 바보를 굶기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요?”
대부인과 이부인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대노야가 돌아서며 호통을 치자, 따라오던 집사 부인들과 여종들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무능하여 아씨를 제대로 못 보살폈어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원래는 울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바닥에 흩어져 있는 식재료를 보고 있노라니, 고생하며 힘겹게 돌아오던 여정도 떠오르고 돌아와서도 불안하게 지내던 나날들이며 영문도 모르고 따귀를 맞은 일까지 줄줄이 떠올랐다. 반근은 고개를 들고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우뚝 서 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누이의 억울함조차 풀지 못한다면, 내 어찌 사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소년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반근의 눈에선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소인의 무능 탓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