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71
교랑의경 271화
장부를 손에 든 시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이나 쳐다봤다.
“또 모르겠어?”
반근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붓을 들어 옆에 표시를 몇 개 해 두었다.
“아휴,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 관리인한테 좀 더 배워야겠어.”
시녀는 미소를 지으며 침상을 쳐다봤다.
“아씨께서는 장부를 볼 줄 아시려나?”
침상 위의 여인은 조용히 누워 있었다. 옷은 반근이 방금 갈아입혀 준 것이었다. 반근이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주었다.
“분명 아실 거야.”
반근이 우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아씨께서 그러셨잖아. 시 짓는 것 외엔 다 할 줄 아신다고.”
시녀는 정교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씨께서 가르쳐 주지 않으셔도, 배울 수 있어.”
시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밝게 웃었다.
“아, 반근. 아씨께서 깨어나셔도 내가 장부 볼 줄 안다는 건 일단 비밀로 해.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 드릴 거야.”
반근은 풉 웃음을 터트리며 정교랑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아씨를 놀라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세상에서 아씨를 놀라게 할 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언제나 한결같은 정교랑의 그 무뚝뚝한 모습이 두 사람의 눈앞에 떠올랐다. 아마 하늘이 무너져도 아, 하는 소리를 내는 정도에서 그칠 것 같네.
두 사람은 침상 위에 누운 정교랑을 쳐다봤다. 눈을 감고 있으니 도리어 온화해 보였다.
시녀는 장부를 들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반근은 시녀가 눈물을 닦으러 나가는 걸 알았다. 반근 역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툭 떨어뜨리고는 심호흡을 하고 계속해서 머리를 빗겼다.
마당에서 금가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 누나, 반근 누나. 오 관리인이 빨리 좀 와 보래. 누가 점포에서 소란을 피운대.”
둘 다 반근이었지만, 반근은 지금 금가아가 찾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회랑 아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옆방에서 시녀가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으며 단장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녀는 서두르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은 채 담담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금가아, 집 잘 보고 있어.”
잠시 후, 시녀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금가아의 대답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는 멀어져 갔다.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빗을 내려놓은 다음, 정교랑의 몸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이 태의가 당부하고 간 덕분이었다. 병상에 누운 사람은 욕창이 생기기 쉽다며 때맞춰 자세를 바꾸고 주물러 줘야 한다고 했다.
반근은 다른 일을 할 줄 몰랐다. 할 줄 아는 건 아씨의 시중을 드는 일뿐이었으니, 기필코 잘 해내야 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느냐? 어디서 시치미를 떼!”
늘 조용하던 신선거에 갑자기 시끄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별실 안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정도면, 안에서는 얼마나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가히 짐작이 갔다.
“주 노야.”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는 분기탱천한 주 노야를 쳐다봤다.
“그래, 마침 잘 왔다. 네가 말 좀 해 봐라. 내가 누구더냐”
주 노야는 오 관리인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누군지 알면, 냉큼 꺼져야 할 거다.”
“주 노야, 여긴 뭐하러 오셨어요?”
시녀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점포를 지키러 왔지.”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허벅지를 쳤다.
“냉큼 장부부터 가져오너라. 교교가 며칠째 병석에 누워 있으니, 점포가 제대로 돌아가나 확인해야겠다.”
주 노야는 고개를 돌려 노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장부를 꼼꼼히 살피게.”
노인은 네 하고 대답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 노야, 여기 장부는 보실 수 없어요.”
시녀가 말했다.
“내가 왜 못 본다는 게야?”
주 노야가 시녀를 보며 물었다.
“이건 우리 아씨 거니까요.”
시녀가 대답했다. 주 노야는 초조해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아씨 거지. 그럼 너희 아씨가 누구네 사람인지도 알지?”
시녀는 표정이 싹 변한 채 말없이 있었다. 주 노야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우리 가문 사람이다!”
주 노야는 시녀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우리 집 여식이 병을 얻었는데, 우리 집 여식의 재산을 나한테도 안 보여 주고, 아랫것인 너희들끼리 독차지하려고? 대체 저의가 뭐냐? 못된 것들이 윗전의 재산을 노려? 아주 겁대가리가 없구나!”
그래, 옳은 말이지.
시녀의 낯빛은 창백해졌고, 한쪽 옆에 있는 오 관리인 역시 뾰족한 수가 없다는 듯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하긴, 세상 이치가 그러한데 별수 있나. 아씨는 엄연히 주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아씨가 없으면, 아씨의 재산을 관리할 자격이 친척에게 주어지는 건 당연했다.
아씨가 병으로 쓰러진 후 어려운 일이 많이 닥치리라 예상은 했지만, 가장 먼저 닥친 일이 주씨 가문에서 재산을 빼앗으려 드는 일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빼앗으면서도 저리 당당하니 할 말이 없네. 아씨의 것을, 아씨께서 심혈을 기울여 이뤄 놓은 사업을, 내가 아씨를 대신해 지킬 방법은 없을까? 아씨께서 안 계시면, 난 아무것도 아닌 거야?
시녀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는 주 노야를 빤히 바라보다가, 심호흡을 하고 예를 표했다.
시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노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주 노야는 흠칫 놀란 표정으로 시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아씨는 정씨 성을 가지셨어요. 주씨가 아니고요. 장부를 봐야겠다면, 소인으로서는 정씨 가문에 보여 드리는 수밖에 없어요.”
이 계집이! 정씨 가문에서 데려온 애 아니랄까 봐!
욱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주 노야는 곧 노기를 거두고 미소를 지었다.
“정씨 가문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느냐. 일단 내가 확인하고, 나중에 그 사람들이 오거든 다시 얘기하자.”
주 노야가 손을 내밀었다.
“어서 장부를 내놓아라.”
시녀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야, 정씨 가문 사람은 멀리 있지 않아요.”
멀리 있지 않다고? 멈칫했던 주 노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정씨 가문의 사공자께서 경성에 계시거든요.”
시녀도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어린애 아니냐. 그 애가 뭘 안다고!”
주 노야가 인상을 썼다.
“노야, 저희 아씨도 아직 어리신걸요. 이런 걸 남한테 맡길 순 없죠.”
“그건 교랑의 것이다!”
주 노야는 분을 참지 못했다.
“사공자는 아씨의 오라버니고, 똑같이 정씨 성을 가지셨어요. 그러니 차이가 별로 안 나실 거예요.”
시녀의 말투는 단호했다.
똑같이 정씨 성을 가졌으니 차이가 별로 안 난다고?! 저리 뻔뻔한 소리를 늘어놓다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게야?
주 노야가 눈을 부릅떴다.
서원 안.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던 학생들의 목소리가 뚝 끊기더니, 하나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린아이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쭈뼛쭈뼛 들어왔다.
수업 시간에 매우 엄격한 장강주 선생은 수업의 맥이 끊기는 걸 가장 싫어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 아이를 쳐다보는 장강주 선생의 표정엔 이미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안에 있던 학생들도 덩달아 긴장한 채로, 선생이 분노를 쏟아내길 가만히 기다렸다. 아이는 눈 딱 감고 앞으로 가서 장강주 선생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소곤거렸다.
서원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정문유.”
장강주 선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생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다 멈칫했다.
정문유? 아이를 혼내는 게 아니었어?
맨 뒤에 앉아 있던 정사낭도 어리둥절했다.
“강주 정문유.”
장강주 선생은 목청을 높여 다시 한번 호명했다. 정사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네.”
정사낭이 영문도 모르는 채로 대답했다.
“가 봐.”
장강주 선생의 말에 정사낭은 깜짝 놀랐다.
“스승님, 스승님. 제, 제가 뭘 잘못했기에 내쫓으시는지…….”
정사낭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정사낭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혼란스러워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장강주 선생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널 찾는단다. 냉큼 꺼지라고!”
장강주 선생이 마침내 모두의 기대 속에 노기를 분출했다. 허둥지둥 튀어 나간 정사낭은 밖으로 나오자 머리까지 어질어질했다.
누가 날 찾아왔다고?
“공자님, 공자님.”
시녀가 한쪽 옆에서 손짓을 하며 불렀다. 정사낭은 시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애였구나. 그럼 그렇지. 장강주 선생의 분노를 겁내지도 않고 사람을 불러내다니. 게다가 장강주 선생 역시 화를 안 내시다니.
정사낭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누이가 온 것이냐?”
정사낭이 좌우를 살피며 물었다.
아씨는 못 오세요……. 시녀는 마음이 시큰해졌지만,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아니요. 아씨는 못 오세요.”
여인의 몸이니 외출이 쉽지 않을 터. 딱히 이상할 게 없는 시녀의 대답에 정사낭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시녀가 말했다.
“부탁은 무슨. 무슨 일인지 말해 봐라.”
정사낭은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지 얼른 전대를 풀었다.
“돈은 여기…….”
시녀는 손을 들어 정사낭을 막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자님, 돈은 부족하지 않아요. 저희는 지금 사람이 부족해요.”
사람이 부족하다?
정사낭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차는 질풍처럼 달려 태평거 앞에 멈춰 섰다.
“반근 낭자, 여긴 왜 데려온 거야?”
정사낭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태평거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마침 식사 시간인지라 드나드는 마차도 많았고, 점원들은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느라 분주했다.
“공자님, 여길 아세요?”
시녀의 물음에 정사낭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창들한테 들었어. 여기에 보물이 세 개나 있다며 경성에 명성이 자자하잖아.”
정사낭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난 아직 못 와 봤지만.”
우선은 시간이 없어서였고, 두 번째로는 집을 떠나 외지에서 생활하다 보니 돈이 아쉬워서였다.
“공자님, 절 따라오세요.”
시녀가 말했다.
지금 여기서 밥을 먹자고 데려온 건가? 정사낭은 주저하면서도 발을 들어 걸음을 옮겼다.
“이게 그 무명씨의 글씨로구나.”
문가 앞에 다다른 정사낭은 고개를 들어 현판을 쳐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사한 글씨는 봤다만, 역시 진품이 훨씬 훌륭하네.”
고개를 돌린 시녀는 정사낭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 어서 들어오세요. 글씨는 앞으로 얼마든지 보실 수 있어요.”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누가 쓴 건지 알아낸 것이냐?”
정사낭이 물었지만, 시녀는 대답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사낭은 급히 시녀의 뒤를 따랐다.
시녀는 별실로 들어가지도, 탁자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정사낭을 데리고 식당 안을 한 바퀴 쭉 돌았다. 지나는 길에 마주친 점원들은 시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고, 시녀는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답례를 대신했다.
“반근 낭자, 어찌…….”
정사낭이 못 참고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 이곳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시녀가 대답했다.
보여 드리려고? 정사낭은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시녀는 정사낭이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