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78
교랑의경 278화
옥대교 저택을 떠난 뒤, 마음이 심란해진 이 태의는 진소 부인의 초대를 마다했다.
“정 낭자가 나아졌는지, 나아지지 않았는지는 부인께서도 충분히 알아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굳이 제가 진 노태야께 가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진소 부인은 멋쩍어하며 알겠다고 하고 이 태의를 보냈다.
도대체 어떻게 깨어난 거야? 도대체 어떻게?
내가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진단을 내릴 때마다, 그 낭자는 번번이 거짓말처럼 환자를 고쳐냈어. 이번에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 진단했더니, 그 낭자가 무려 스스로 자신을 고쳐내기까지 했다고!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어찌 이리 기묘한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야! 분명 그 낭자의 맥이 끊길 것이라 단언했는데,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싹 나아서 깨어날 수가 있지?
설마 저 낭자가 정말 소문대로 신선을 만난 건가.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마음의 병을 어떻게 고친 거야?”
이 태의의 중얼거림을 들은 누군가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신을 차리자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있는 소년이 이 태의의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제가 어쩌다 전하의 궁까지 들어왔지요?”
“난들 압니까. 가만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태의께서 무작정 들어와서는 좌선을 하시지 뭡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하자 이 태의는 그제야 생각난 듯 아, 하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나은 겁니까?”
진안 군왕은 이 태의를 보면서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다 이 태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태의께서 고칠 수 없다고 진단을 내리셨으니, 분명 나을 병인 거지요.”
진안 군왕은 자신의 손으로 허벅지를 때려 가며 더 크게 웃었다.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을 흘겨보며 소리쳤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도대체 그 낭자는 어떤 내력이 있는 사람입니까?”
정말 소문대로 도교 이 진인의 제자인가? 그 낭자가 다 죽어갈 때 즈음, 이 진인이 직접 와서 명줄을 이어준 건가?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낭자 때문에 정신이 나가 있다 보니, 이런 별 황당한 생각까지 다 하는군!
“이 대인, 이 대인.”
진안 군왕이 하하 웃으면서 손을 뻗어 이 태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사실 병을 치료한 건 정 낭자 본인이 아니라…….”
이 태의가 의아한 얼굴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납니다.”
이 태의가 놀란 눈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내가 정 낭자를 깨웠다고요.”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득의양양한 눈빛이었다.
“전하? 전하께서 어떻게요?”
이 태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간단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려주기만 하면 되죠.”
진안 군왕의 대답을 들은 이 태의가 멈칫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려준다고요? 대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고요? 이 태의, 정말 의원 맞습니까? 환자가 병환이 뭔지도 몰라요? 정 낭자의 병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거잖습니까. 그럼 그 여인이 왜 그렇게 묻는지는 알고 있어요?”
진안 군왕이 묻자, 이 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진안 군왕은 일어서서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낭자는 바보로 태어나 병을 앓았어요. 병이 나은 뒤로는, 예전의 기억이 전혀 없었죠.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만큼 말입니다. 자고로 사람은 태어난 지 석 달이 지나면 이름을 얻고, 이름을 얻은 뒤에야 영혼이 모여 사람으로 깨어날 수 있게 됩니다. 낭자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니, 당연히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 수도 없었겠죠. 그러니 누군가가 당신이 누구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막막하기만 할 뿐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거고요.”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정교랑이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또 무슨 이름이 있다고요?”
“교랑은 외조모가 부르던 아명일 뿐이지, 정씨 가문에서 준 이름이 아닙니다.”
진안 군왕이 말하자 이 태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씨 집안에서는 바보로 태어난 아이를 익사시키려는 데에 혈안이 올랐을 텐데, 정식 이름을 지어 족보에 올렸겠습니까!”
“아니요. 정씨 집안에서는 낭자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단호한 진안 군왕의 말에 이 태의는 할 말을 잃었다.
“정 노태야는, 정 낭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기대에 부풀어 미리 이름을 지어 놓았습니다. 딸아이가 태어나긴 했지만 정 노태야는 매우 기뻐했지요. 아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아이가 한 살이 지난 뒤였으니, 석 달이 되었을 때 지어준 이름은 그대로 있을 수밖에요.”
진안 군왕은 천천히 편전 안을 거닐며 말을 이어갔다.
“주씨 집안에서도 정 낭자를 교랑이라 부르는 걸 보아하니, 정식 이름을 모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부(吏部)로 가서 낭자 부친의 신상을 알아보았지요.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문서라 그런지,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더군요. 정씨 집안을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사람을 시켜 정씨 집안의 족보를 알아 오라고 시켰죠. 그랬더니 역시…….”
“역시 뭐요?”
이 태의가 물었다.
“낭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그래서요?”
이 태의가 또 물었다.
“그래서, 낭자에게 이름을 알려 줬더니 깨어난 거죠.”
진안 군왕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자,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을 흘겨보면서 소리쳤다.
“지금 무슨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쉬울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쉬운 걸 어떡합니까?”
진안 군왕도 똑같이 눈을 부릅뜨고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태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밀어붙였다.
어디 그런 병이 있다고! 이름을 알려 줬더니 고쳐졌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진안 군왕이 하얀 이를 보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제가 이름을 외쳤더니, 바로 깨어나지 않았습니까?”
진안 군왕이 손바닥을 펼치면서 말했다.
“뭘 어쩔 수 있겠어요, 일이 본디 그리 이상한 것을.”
이 태의만 이 병을 이상하다고 여긴 게 아니었다. 당시 진안 군왕 본인도 정교랑이 눈을 뜬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 내가 정방이라고요?
여인은 눈을 떴을 뿐 아니라, 분명 입술을 움직여서 말을 했었다. 힘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진안 군왕은 그녀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 네, 낭자의 이름은 정방이에요.
등불 아래 비친 정교랑의 눈빛은 별처럼 총총히 빛났다. 죽기 직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병세를 너무 과장해서 말한 건가? 내가 이 여인의 이름을 불러서 깨어난 건가? 아니면 혹시, 이 여인을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 건가?
이 생각이 스치자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말이 되는 생각을 해야지! 내 목소리가 그렇게 좋을 리가 있나. 아니 뭐, 사실 못 들어줄 정도까지는 아니지.
문밖에 있던 내시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환한 실내에서는 백발의 노인이 머리를 긁으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 있던 소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하께서 저리 웃으시는 건 오랜만이네.
내시도 진안 군왕을 따라 조용히 미소지었다.
어둠이 짙어지자,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던 옥대교 저택의 마당은 드디어 고요를 되찾았다. 반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 힘들어 죽겠어.”
반근이 회랑 아래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고작 하루야. 진소 부인과 진 부인께서는 차도 한잔 안 드셨는데, 힘들긴 뭐가 힘들어. 어서 일어나, 아씨께 차 한잔 우려 드려야지.”
시녀가 웃으면서 반근을 살짝 밀었다.
“안 해. 정말 힘들어 죽겠다니까. 나도 좀 쉬어야겠어. 아씨께는…… 드시지 말라고 해.”
반근이 아예 난간에 몸을 기대며 대꾸했다. 시녀는 그런 반근의 모습에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정말 대담해졌네? 무려 아씨까지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겠다 이거지?”
“몰라, 상관 안 해. 난 다시는 상관하고 싶지 않아.”
반근이 울음을 터트렸다. 시녀도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녀는 반근을 툭 치면서 뭐라 말을 붙이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 괜찮아졌잖아.”
시녀가 끝내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며 반근의 옆에 앉았다. 반근이 울며 시녀를 돌아보았다.
“왜 앉아? 방에 사람이 없으면 안 되잖아. 아씨께서 뭐 필요하신 거 없나…….”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챙기시겠지.”
시녀는 울먹거리는 반근의 말을 자르고 반근을 따라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힘들어 죽겠네. 그래도 이젠 하늘이 무너져도 막아 줄 사람이 생겼으니, 나도 같이 좀 쉬어야겠어.”
반근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다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밤하늘의 색이 더욱 짙어지자, 반근은 등불을 하나하나 끄고 방 안으로 들어와 침상을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옆으로 누운 채 반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씨, 아직 안 주무셨어요? 혹시 목이 마르세요?”
반근이 얼른 가까이 꿇어앉으면서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내젓고는 일어나 앉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반근은 이 광경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번개가 내리친 뒤 폐허가 된 도관에서 정교랑이 깨어났을 때, 그때도 정교랑은 같은 얼굴로 반근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씨, 기억이 좀 나세요?”
반근이 주춤하다가 먼저 물어보았다.
“조금 생각나.”
“노마님이랑 유모는 기억나세요? 제가 어렸을 때 사탕을 먹여드린 기억은요?”
반근이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정교랑은 반근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강주 정씨라는 게 기억나.”
반근이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굳이 기억해야만 생각이 나는 건가?
“강주 정씨는 촉주(蜀州) 출신이다. 위로는 검문(劍門), 아래로는 횡강(橫江)에 이르렀으며, 선조는 사람들이 저속하다 여기는 점괘 보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점을 칠 때 사악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물어오면, 가새풀과 거북점에 기대 대답하되, 그 이해관계가…….”
이어진 정교랑의 말에 반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 하시는 거지.
반근이 눈을 크게 뜨며 끔뻑거리는 것을 본 정교랑이 미소 지었다.
“가서 자.”
반근은 네, 대답하고는 자신이 혹시 좋지 않은 질문을 했나 싶어 불안해했다.
바보로 지냈던 과거에, 좋은 일이 있었을 리가 있나.
“아씨,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반근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반근의 말이 끝나자마자, 희미한 등불 아래 보이는 정교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 잊어라, 그게 좋아.
떠오른 기억은 극히 일부였다.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집안인지, 조상이 누군지 떠올랐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텅 빈 공간에 덩그러니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떠오른 것은 오직 무미건조한 이름 두 글자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일 뿐, 희로애락이나 이전에 겪은 고통과 같은 것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반근, 거울을 가져와.”
정교랑이 말하자 반근이 침상 옆에서 구리거울을 가져왔다.
거울 속에는 등불에 희미하게 비추어진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낯선 여인의 모습이.
정교랑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똑같은 강주 정씨에 똑같은 정방인데, 왜 또 다른 것 같지? 이 정씨 가문과 나의 정씨 가문은 무슨 관계인 거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혹시 그 남자 때문인가? 내 마음을 가져간 남자.
눈을 떴지만, 마음은 여전히 없어. 그러니 난 완전하지 못한 거야.
그 남자는 누구일까? 그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그는 누구지? 왜 하필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