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92
교랑의경 292화
“너 미쳤어? 잘 곳이 있는데 뭣 하러 야외에서 자! 누가 바보 아니랄까 봐. 난 야외에서 자다가 늑대 먹잇감 되기 싫다고!”
“굳이 가서 입 아프게 말할 필요 있나요. 그리고 어떤 때에는 늑대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걸요.”
누가 여인네 아니랄까 봐! 괜히 일 만드는 거 싫어서는!
왕십칠이 침을 뱉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내 말대로 해! 난 역참에서 잘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싫으면 너 혼자 가든가.”
이 여인을 데리고 오는 게 이렇게나 성가신 일일 줄 알았으면, 애초에 데려오지도 않았지!
왕십칠의 말을 들은 노복은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행히도 눈앞의 여인은 마차를 움직이지 않았다.
“같이 가기로 했으면서, 어쩜 그렇게 말에 신용이 없어요?”
얼씨구, 지금 애원하려는 거지? 인지상정을 들이밀면서 압박하려고?
널 데려가겠다고 큰소리쳐 놓고, 왜 이제 와서 버리고 가냐는 거지?
하여간 그림 같은 미인은 이런 게 마음에 안 들어. 애원하려면 좀 그럴싸하게 해야지, 이렇게 무뚝뚝하게 애원해서 어디 쓰겠냐고. 눈물도 좀 글썽이면서 매달려야 될 거 아냐.
“이번은 특별히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하지만 네가 또 이렇게 말썽을 피우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나중에 나 원망하지 마!”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들던 왕십칠은 조 집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쳐다보긴 뭘 쳐다봐?”
왕십칠이 언짢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쳐다보긴 뭘 쳐다봐! 눈빛은 또 왜 저렇게 이상해?
조 집사는 말없이 왕십칠을 향해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아녀자가 마차 행렬의 맨 앞에 있으면 쓰나. 가는 길 내내 고집이나 부리고 말이야. 넌 뒤로 가. 내가 앞에서 갈 테니까.”
말을 끝낸 왕십칠은 자신의 마차를 앞쪽으로 이동하라고 마부에게 명령하고는 곧장 정교랑의 마차를 추월해 갔다.
반근이 마차 밖에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무슨 큰일이라고.”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고는 반근에게 올라오라고 눈짓했다. 반근이 웃으면서 마차에 올라탔다.
노복은 어색하고 당황한 기색으로 왕씨 집안의 시종들을 이끌고 왕십칠의 마차 뒤를 쫓아갔다.
“앞에 있다고 한들, 아무나 길을 이끌 수 있나.”
노복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저 모자란 놈이 웃기긴 하네.”
“아씨께서 저놈을 너무 봐주시는 거 아냐?”
노복은 묵묵히 조롱을 듣다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뒤에 있던 시종을 노려보았다. 그의 분노 가득한 눈빛에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시종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노복을 똑같이 흘겨보았다.
마차 행렬은 대열을 재정비하고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노복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우리도 호송할 사람들을 좀 구했어야 했는데. 그래야 길 위에 버려져도 두렵지 않지.”
노복의 혼잣말을 옆에서 들은 시종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노복을 쳐다보았다.
“어르신, 누가 누구한테 버림받는다고요?”
노복은 시종의 놀란 얼굴을 흘깃 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씨, 너무 친절하신 거 아닙니까. 저라면 저런 놈을······.”
입을 삐쭉이면서 투덜거리던 조 집사는 순간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무리 그래도 저놈은 아씨께서 직접 동의한 혼사의 정혼자인데, 그런 사람을 놈이라고 지칭하는 건 도리어 아씨를 욕보이는 것 아닌가?
조 집사가 당황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참, 기억력도 나쁘지. 이 낭자 앞에서는 적게 말하고 많이 듣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뭣 하러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거야!
“아니, 저런 작은 역참이라면 말 꺼내기도 쉽겠네요. 제가 먼저 가서 분위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조 집사가 말했다. 그는 정교랑이 마차 안에서 짧게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채찍을 휘둘러 마차 행렬을 앞질러 갔다.
“아씨, 요즘 성격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반근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은 팔걸이에 기대어 반근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예전엔 안 좋았어?”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아씨는 정씨 가문이나 주씨 가문이 아씨를 어떻게 대하든, 주육낭이 무슨 난리를 피우든, 항상 담담하게 대처하셨네. 예전 일을 생각해 보고 다시 지금의 왕 공자를 보니, 저건 별일 축에도 못 낄 것 같아.
반근이 무안한 듯 히죽 웃었다.
아씨를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없었기 때문에, 왕 공자가 아씨를 대하는 태도가 익숙하지 않은 건가.
“네가 저 사람이 밉고 화가 나는 건, 저 사람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야. 저 사람이 어떤 건 해도 되고, 어떤 건 하면 안 된다는 기대를 품고 있는 거지. 하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너에게 선의만 가지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잖아?”
반근이 정교랑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난 왕십칠이 아씨를 좀 더 잘 대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긴 해.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아씨께 좋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왕 공자는 아씨와 아무 연고도 없고, 확정되지 않은 혼약만 하나 있을 뿐이잖아. 주씨 가문이나 정씨 가문에 비하면, 딱히 아씨께 빚진 것도 없고.
“실상은 정반대야. 세상은 타인에게 악의를 품는 게 일반적이지. 그러니까 남이 널 어떻게 대해 줬으면 하는 마음은 가지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해. 남이 나를 좋아하지 않든 막 대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말을 끝낸 정교랑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해를 끼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반근이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께서는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네요.”
정교랑은 책을 손에 쥔 채 잠시 머뭇거렸다.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은, 아마 피눈물로 바꿔온 거겠지.”
정교랑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자신이 뭘 겪었었는지는 기억해낼 수 없지만,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정교랑은 추측했다.
꿈에서 봤던, 피눈물을 흘리던 시신······.
– 잊어라, 그게 좋아.
“아씨, 물 좀 드셔요.”
물잔을 건네는 반근 때문에 회상이 끊겼다. 정교랑은 물잔을 건네받고 천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얼마 가지 않아 마차 행렬은 어느 역참에 도착했다.
아주 작은 역참이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소리가 끊이지 않는 탓에 비가 올 것을 염려하여 몰려든 사람이 많다 보니 역참 안은 인산인해였다. 몸을 누일 잠자리는커녕, 당장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다.
“우리가 돈 줄 테니까, 저 사람들한테 나오라고 해.”
왕십칠이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외치자 주위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노복은 다급하게 왕십칠을 저지하고는 역승(驛丞: 역참을 관장하는 관직)을 찾아 뛰어다녔다.
이 역참에서 돈이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제일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가장 유용한 것은 바로 관고(官誥: 관리의 사령장)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관고가 있으면 돈이 없어도 방을 얻을 수 있지만, 돈만 있고 관고가 없으면 때에 따라 단칸방조차도 구하기 어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복이 고개를 숙인 채 돌아왔다.
“마룻바닥 자리는 몇 개 얻을 수 있지 싶습니다.”
마룻바닥? 왕씨 가문 말단 하인들도 거기서는 안 잔다!
왕십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 외에는 없습니다. 그 자리도 돈을 많이 써서 열댓 명 정도 내보낸 겁니다.”
이쪽에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는 사이, 정교랑은 이미 사람을 시켜 야영용 천막을 치게 했다. 그 모습을 본 왕십칠은 영 체면이 서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시켜서 마룻바닥 자리를 청소하게 하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천막 그만 쳐도 돼. 방 있어.”
마차 안에 앉은 정교랑은 화로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반근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지 모를 맛있는 냄새가 주위에 퍼졌다.
“그런 방은 불편해요.”
정교랑이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성질을 부려!
왕십칠이 눈을 흘겼다.
“방이 불편하니까 야외에 천막을 치고 자겠다고?”
“그럼요. 내 천막이 얼마나 좋은데요.”
정교랑의 말에 왕십칠은 짐을 실은 마차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시종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물건을 내리고 있던 마차는 정교랑이 경성에서 가져온 특산품으로 가득 채운 짐차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 야영 용품이었다.
깔개, 팔걸이 책상, 발 받침대, 향로, 등불. 낮은 침상 하나, 천막 하나, 밥상 하나······.
더욱 놀라운 건, 시종들이 마지막으로 병풍까지 내렸다는 것이다.
병풍!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온 집안의 가구를 다 챙겨 온 거야? 애초부터 야외에 천막을 칠 생각이었어?”
왕십칠이 눈을 부릅뜨면서 외쳤다.
“그럴 리가요. 습관일 뿐이에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이건 정교랑의 오랜 습관일 뿐이다.
지금은 차치하고, 정교랑과 반근 두 사람이 돈 한 푼 없이 병주 도관에서 떠나왔을 때부터 정교랑은 단 한 번도 먹고 자는 일에 아쉬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대충 때워야 했던 때는 정교랑도 잘 참아냈지만, 여건이 된다면 결코 타협하는 법이 없었다.
“아씨, 간식 좀 드세요.”
반근이 네모난 접시를 들고 왔다. 새하얀 백자 접시 위에 올려진 노란색 경단이 매우 먹음직스러웠다. 접시를 건네받은 정교랑이 왕십칠에게 양해를 구했다.
“힘들어서 뭐 좀 먹어야겠어요. 양해 부탁드려요, 공자.”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었다.
먹을 걸 달라는 말을 이렇게 가식 떨면서 해야 해?
“기다려. 밥을 준비하라고 할게.”
왕십칠이 몸을 돌리고는 원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이러니 여인네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는 게 성가시다고 하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왕십칠의 뒷모습을 본 조 집사는 속으로 왕십칠을 바보라고 욕했다.
“아씨, 왕 공자의 분부를 기다려야 할지요? 아니면······.”
조 집사가 정교랑에게 공손히 물었다.
“여기 숙수는 요리하기 힘들 걸세.”
정교랑의 대답에 조 집사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그럼 소인이 부엌에 가서 고기와 채소를 사 오겠습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 집사는 시종들을 시켜 땅을 파서 불을 피우고 솥을 준비하게 하고, 몇 명에게는 돈을 쥐여 주며 부엌에 가서 식재료를 사 오게 했다.
대청 안으로 들어선 왕십칠은 곧바로 문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곳은 밥상 앞에서 밥을 먹을 수 있기는커녕, 서 있기조차도 비좁아 보이는 공간이었다.
특히나 길을 서두르는 평민 백성이 많은 탓에, 노약자와 여인들, 그리고 아이들까지 빽빽하게 꾸부려 앉아 있어서 주위에 불쾌한 냄새까지 풍겼다.
왕십칠은 하는 수 없이 코를 막은 채 대청 밖으로 뒷걸음질 쳤다.
“도련님, 숙수들이 찐빵과 채소 절임 외에 다른 요리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노복이 왕십칠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설상가상인 상황에 왕십칠은 성질을 부리며 땅바닥을 발로 세게 찼다.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니. 저 여인이 얼마나 비웃겠어!
“돈을 줘! 돈을 주면······.”
왕십칠이 말을 채 끝내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공자님.”
왕십칠과 노복이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네다섯 명의 남자들이 그들 뒤에 서 있었다. 나이가 사십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부드러운 인상이었고, 다른 네 명의 사내들은 병졸 차림에 경성 말씨를 쓰고 있었다. 먼 길을 온 듯한 고생이 묻어 나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오?”
왕십칠이 묻자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듣자니 마룻바닥 자리를 얻었다지요?”
“돈 줘도 안 팔아!”
왕십칠은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무슨 말이지? 지금 나를 돈 구경도 못 해 본 거지 취급하는 건가?
왕십칠의 반응에 남자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에겐 관고가 있습니다.”
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