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93
교랑의경 293화
왕십칠에게는 그게 무엇이든 중요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옆에 있던 노복이 황급히 왕십칠을 붙잡은 덕에 왕십칠이 그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는 불상사는 면했다는 점이었다.
“나리, 관고가 있다면 더 좋은 방도 얻으실 수 있을 테지요. 모두 바깥에서 고생하는 처지인데, 굳이 서로 곤란한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노복이 돈주머니 하나를 남자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남자는 웃으면서 돈주머니를 거절했다.
“공자님이 무언가 오해하셨나 봅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인데?
왕십칠이 미간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공자님도 숙식에 불편함을 느끼시는 것 같은데, 같이 협업 한번 하는 건 어떻습니까?”
협업? 뭘 어떻게 협업하자는 거야?
“저희 대인께서 경성에서부터 여기까지 쉬지도 않고 달려오고 계십니다. 피로가 잔뜩 쌓이셨을 텐데 하필이면 이 자그마한 역참이 꽉 찼지 뭡니까. 저희가 강제로 이 사람들을 내쫓을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차마 마음이······.”
남자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차마 못 할 게 뭐 있나? 여기는 역참이지 객잔이 아니지 않소. 빨리 안 내쫓고 뭐 해? 저 사람들을 내쫓는다면, 내 자네들에게 돈을 주고 상등 방 두 개를 사겠소.”
왕십칠이 남자의 말을 끊고 재촉하자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공자님, 저희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노약자와 아이들이 있는데, 너무 불쌍하잖아요.”
“불쌍하다고? 그럼 자네들은 밖에서 가서 자든가!”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기에는 저희 대인께서 불편하시지요.”
“그럼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데?”
“말하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저희는 관고가 있지만 돈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가 관고로 방을 얻을 테니, 공자님은 쫓겨난 사람들에게 돈을 쥐여 주세요. 그럼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고, 서로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남자의 말에 왕십칠은 눈빛을 반짝였고, 노복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 괜찮은 방법이네. 합리적이고,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고.
“그럼 상등 방 두 개를 나한테 내주게. 동행한 규수가 있으니.”
남자가 아, 하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원칙적으로 상등 방은 관리 어른들에게만 내어주게 되어 있어서 말입니다. 대신 일반 방 두 개는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군. 적어도 마룻바닥에서 자는 건 아니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왕십칠이 노복에게 기쁘게 손짓했다.
“좋아. 아범, 가서 저 사람들이랑 일 봐.”
노복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웃으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외람되지만, 혹시 어느 관청에서 일하시는지요?”
“부끄럽소. 태창로(太倉路) 전운사(戰運司) 아래의 하급 관리일 뿐이오.”
남자가 겸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전운사라고?
노복은 남자의 소속을 듣고 흠칫 놀랐다. 전운사는 한 지역의 자금과 곡식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조정의 명맥과 직결된 곳이었다. 그렇기에 정무 능력이 출중한 관원들이 임직했다. 전운사에서 서리(胥吏)를 하고 있다는 건, 당연히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노복은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강주로 돌아가는 길에 이런 인맥을 쌓다니. 수로를 통해 장사하는 왕씨 가문이 자금과 곡식을 관리하는 곳과 연이 트이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대인, 너무 겸손하십니다.”
노복은 남자를 일부러 더 치켜세웠지만, 남자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가볍게 목례했다.
“그럼 돈 좀 써 주시길 부탁하겠소.”
남자가 뒤에 있던 병졸 한 명에게 눈짓하고 지시했다.
“저 어르신을 모시고 일을 보러 가거라. 대인께서 곧 도착하시니, 서둘러.”
병졸들이 이구동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노복과 함께 자리를 떴다.
왕십칠은 싱글벙글하며 바깥으로 뛰어나가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향해 외쳤다.
“아, 그리고 숙수한테 주안상을 준비해 달라고 전해 주시오.”
남자는 대꾸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왕십칠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역참 밖 길가에서는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천막을 다 치고 모닥불을 피워 놓았다. 몇몇 시종들은 부엌에서 사 온 고기와 채소, 그리고 술 두 단지를 들고 왔다.
“이런 조그만 역참에 이렇게 좋은 술이 감춰져 있었네요.”
조 집사가 정교랑에게 말했다.
“많이 마시지는 말게. 밤의 한기를 내쫓을 정도면 충분해.”
정교랑의 말에 조 집사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 멀리서 거만하게 흔들거리며 걸어오던 왕십칠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외쳤다.
“저 봐, 저 봐. 야외에 있으면 술도 마음껏 못 마시잖아.”
“집을 떠나 먼 길을 나서야 하니, 뭐든 마음껏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조 집사가 왕십칠의 말에 대꾸했다.
저 아랫것은 왜 저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어!
“어느 안전이라고 자네가 끼어들어?”
왕십칠은 조 집사에게 성질을 부리고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됐고, 방을 얻었으니까 얼른 짐 챙겨서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너희는······.”
왕십칠이 조 집사를 포함한 다른 시종들을 쓱 둘러보았다.
“흥, 마룻바닥에 자리가 모자라니 너희는 그냥 여기서 자라. 천막 친 것도 아까울 텐데.”
“어디서 방을 얻었어요?”
두봉을 걸치고 커다란 두모를 쓰고 앉아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왕십칠은 더욱 의기양양하여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흠흠, 이 몸한테 다 방법이 있지.”
왕십칠과 정교랑이 대화하는 사이, 역참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
“꺼져, 썩 꺼지라고! 귀먹었어?”
병졸 두 명이 손에 쥔 채찍을 매섭게 내리쳤다.
아이를 안고 있던 노인 하나는 병졸들의 채찍질을 피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자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뒤돌아서서 등으로 채찍 두 대를 버텨냈다.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고, 여인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안 그래도 복잡했던 대청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나리, 이곳은 이 사람들의 자리인데요.”
역승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병졸들을 제지했다.
“자리 좋아하네. 썩 꺼지거라! 여긴 이 몸들이 차지해야겠다.”
다시 채찍을 든 손을 높이 치켜든 병졸들이 한쪽을 쳐다보았다.
“자네들, 어서 저 사람들한테 돈 줘. 냉큼 꺼지고 다른 곳 찾아보라고 해.”
노복과 노복을 따라온 시종 몇 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병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일제히 노복 일행을 노려보았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아니, 아니, 이러려던 게 아닌데······.”
노복의 이마에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가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외쳤다.
일이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군.
사람들은 아무도 노복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돈 같은 거 필요 없소! 우리도 여기 묵을 거란 말이오!”
채찍질에 떠밀려 바깥으로 내쫓긴 한 사내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한 명이 앞장서서 목청을 높이자, 다른 이들도 소리치기 시작했다.
“맞아. 우린 돈 필요 없어.”
“누가 그깟 돈 필요하대?”
“권력이 있다고 백성을 업신여기면 되나! 이 나라엔 국법도 없냐고!”
주위 사람들이 봇물 터트리듯 한꺼번에 외치자, 병졸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손에 쥔 채찍을 바닥에 힘껏 휘갈겼다.
“지금 뭣들 하는 거냐? 반란이라도 일으키려고? 내 똑똑히 말하지. 우리 대인께서 어명을 받들어 태창으로 오고 계시다. 썩 꺼지지들 못해? 대인의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여기 있는 누군가가 책임질 테냐?”
조정일을 하는 관리라고?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주춤했다. 불공평한 상황이 한탄스럽지만,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라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분노를 삼켰다.
복잡한 표정의 역승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사람들을 내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죄다 노약자와 아이들, 그리고 여인네들뿐인데, 이 한밤중에 어디 갈 곳이 있다고요.”
병졸이 언짢은 표정으로 노복 일행을 노려보았다.
“내가 보상도 없이 이러는 것도 아니지 않나. 어서 사람들에게 돈을 주라니까!”
노복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거, 눈 질끈 감고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여기, 돈을 좀 준비했는데, 가져가서 다른 곳을 찾아보심이······.”
노복이 돈주머니를 내밀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지만, 그 돈주머니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노복을 향해 침을 뱉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부축하고, 여인들은 아이를 들어 품에 안은 채 제각기 대청 밖으로 걸어갔다. 질서 없이 우르르 몰려나갔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뒷마당에서는 몇 사람이 쫓기다시피 떠밀려 나오면서 거친 욕을 내뱉었다.
“이건 권력 남용이오!”
“어떤 개 같은 관리 새끼가······.”
역참 앞에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채찍을 휘두르던 병졸과 옷차림이 비슷한 병졸들이 마차 한 대를 호위하면서 역참 앞에 멈춰 섰다.
“풍(馮)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역참 안에 있던 병졸들이 크게 외치고는, 사람들을 향해 더 거세게 채찍을 휘둘러 길을 비키게 했다.
“풍 대인께서 쉬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 썩 나가거라!”
채찍 때문에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내몰리면서 대청 안팎은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이제 막 울음을 그쳤던 아이는 다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보던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설마 이런 식으로 방을 얻은 건 아니죠?”
“그냥 쫓아내는 게 아니라, 돈을 줬잖아.”
왕십칠은 시끄러워진 역참을 보고 잠깐 놀란 듯했으나, 금세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다.
돈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다 내쫓을 수 있다니!
“흠, 나는 너희 같은 소인배가 아니다. 이왕 같이 길을 떠나게 된 거, 너희도 안에 들어가서 자거라.”
왕십칠이 턱을 치켜들고 조 집사와 시종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양 말했다. 정교랑이 왕십칠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마당에 있는 병졸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은 누구죠?”
“아, 같은 편이야 같은 편. 우리를 도와준······.”
왕십칠이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지만, 정교랑은 뒷말을 다 듣지도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어이, 어이. 뭐 하게?”
왕십칠이 정교랑을 향해 의아한 얼굴로 외쳤지만, 정교랑은 그를 무시한 채 역참 대문 앞 길가로 가서 섰다.
“여봐라.”
정교랑이 말하자 조 집사가 즉시 대답했다. 조 집사는 정교랑이 무서워 바로 옆에 서 있지는 못하면서도, 항상 근처에서 정교랑의 명을 기다렸다.
“겁도 없이 백성에게 행패를 부리는 저놈들을 매우 쳐라!”
정교랑이 마당 안을 가리키며 외쳤다.
조 집사가 바로 분부를 내리자,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제각각 곤봉을 손에 쥐고 역참 안으로 돌진했다.
“감히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히다니, 맞아도 싸지!”
조 집사의 호통과 함께 채찍을 쥐고 있던 병졸들은 주씨 가문의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먼지 나게 얻어맞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병졸들은 어리둥절했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주 노야가 세심히 고른 자들이라 모두 무예에 능했다. 시종들은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병졸들을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노복의 젊은 시종들 또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순간 넋이 나갔다.
“꼴 좋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릴 즈음,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잘했다며 하나둘 호응하기 시작했다.
왕십칠은 눈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