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0
교랑의경 30화
“아씨, 저녁에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반근이 또다시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은 반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반근은 시선을 내리깔고 정교랑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냉면.”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정교랑의 말을 들었다.
“네, 바로 만들러 갈게요.”
몸을 일으킨 반근이 막 섬돌로 내려서려는데 밖에서 여종이 들어왔다.
“반근 낭자, 중문에서 주 공자의 사람이 다 됐냐고 묻던데?”
순간 몸이 경직된 반근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주머니, 공자께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아씨한테 냉면부터 만들어 드려야 한다고요.”
정교랑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반근 언니, 바쁘면 가서 일 봐. 부엌일은 내가 할게.”
몸종이 옆에서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반근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치자 몸종은 화들짝 놀라 반근을 바라봤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반근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근은 뒤돌아 고개를 숙인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됐어. 가거라.”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뒤돌아 꿇어앉으며 대성통곡을 했다. 문밖에 있던 여종과 회랑에 있던 몸종은 영문을 몰랐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씨, 아씨.”
반근은 흐느껴 우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며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다가갔다.
“저 안 갈래요, 안 가요. 가서 여섯째 공자께 말씀드릴게요.”
반근이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달려갔다. 몸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게 무슨 일이지?”
몸종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반근은 어느새 멀리 뛰어갔고, 문밖에 있던 여종이 그 뒤를 따랐다. 몸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머리를 풀고 품이 큰 어두운색 비단옷을 입은 여인은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변함없는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 있었다. 먹고 입고 싸고 잘 줄 알면 충분하지 뭐. 희로애락이니 뭐니 바보는 그런 거 모르나 보네.
“부엌에 전해. 난 냉면을 먹고 싶다고.”
정교랑이 말했다. 거봐, 맞잖아!
“네.”
몸종이 대답했다. 이 바보는 대소변을 못 가리는 것도 아니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도 아니야. 사람을 패거나 소란을 부리지도 않지.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니 먹고 마실 것 챙겨 주고 옷 갈아입는 시중이나 들면 그만이야. 이렇게 모시기 편한 윗전이 있나. 몸종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정교랑은 커다란 방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손에 찻잔을 꼭 쥐고 미동도 하지 않는 채로.
울고불고하는 반근을 보며 주육낭은 인상을 썼다.
“연지분을 바른 영웅인 네가 아까운 마음이 들어 데려가겠다고 한 것인데 이리 울고불고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주육낭은 고삐를 잡고 말 위로 올라타며 말했다. 영웅? 나를 말하는 건가? 공자께서 날 이렇게 높이 보셨어? 하지만…….
“그래도 저희 아씨는 어쩌고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네가 없으면 정씨 가문엔 다른 아랫것이 없다더냐?”
주육낭은 우스운 듯 말했다. 똑똑하고 영리하긴 한데, 너도 여인이라 성가신 건 어쩔 수 없구나.
“하지만 저희 아씨는 어릴 때부터 저와 함께하셨거든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너와 함께했다고 다른 사람이랑은 같이 못 살아? 네가 없으면 살 수 없느냔 말이다.”
주육낭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 세상에 누가 떠나면 못 사는 사람이 있기나 하다더냐? 네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그건 자기기만이야!”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난 정씨 가문 사람도 아니잖아. 주씨 가문에서 샀으니 주씨 가문 사람이지. 그럼 돌아가야 해.
“갈 것이냐, 말 것이냐? 난 길을 서둘러야 한다. 가기 싫으면 관둬라. 네가 아쉬워서 이러는 줄 아느냐? 널 이런 곳에 버려두는 게 아까웠을 뿐이야!”
반근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어 말 위에 앉은 소년을 바라봤다. 높은 곳에서 반근을 내려다보는 그 소년은 석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반근은 고개를 돌려 문 안을 바라봤다. 아씨는 이제 많이 좋아지셨어. 하지만 옆에서 일깨워 주지 않으면 사나흘 내의 사람과 일밖에 기억 못 하시지. 그렇다면 사나흘 후엔 반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 하실 거야.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았다.
“네.”
반근은 목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인은 공자의 말씀을 따를게요. 소인은 아무것도 없어서 챙길 짐도 없어요.”
마침내 석양이 지자 저녁 빛이 대지를 덮었다.
몸종은 실파와 두부를 고명으로 올린 냉면을 청자 면기에 담아 팔걸이 책상 위에 차려 놓고, 간단한 반찬 접시 두 개와 빈 그릇, 젓가락까지 올린 후 정교랑 앞으로 들고 갔다.
방 안은 어느덧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날아드는 날벌레는 아래로 내려뜨린 대나무 문발이 막아 주었다. 정교랑은 눈앞에 차려진 식탁을 보고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밥을 혼자 먹을 줄은 아나 모르겠네. 몸종이 잠시 머뭇거리며 옆에 있는 여종을 바라보자, 여종이 몸종에게 눈짓을 했다.
몸종이 손을 뻗어 젓가락을 집어 들으려 할 때였다. 정교랑이 한발 먼저 손을 뻗어 젓가락을 들더니 한 손으로는 소매를 잡고 한 손으로 천천히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몸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여종을 향해 뿌듯한 듯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문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네다섯 명쯤 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곽 낭자가 어쩐 일이에요?”
몸종과 여종이 웃으며 맞이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인이 웃으며 뒤에 있는 이를 가리켰다.
“저 아이도 앞으로 여기서 지낼 거예요.”
몸종 하나가 굳은 얼굴로 서서 건성으로 예를 표했다.
“웬 사람을 또 보내요?”
“아, 아씨랑 같이 왔던 그 애가 떠났거든요. 부인께서 둘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할 것 같다며 하나를 더 보내 주셨어요.”
곽 낭자가 대청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인은 어두운 등불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식사 중이었는데, 식사를 멈추고 이쪽을 쳐다볼 기미는 전혀 없었다. 바보 노릇도 나쁠 건 없지, 성가신 일이 없으니까.
곽 낭자는 오래 있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바로 뒤돌아 나갔다. 남아 있는 몸종과 여종은 여전히 놀란 상태였다.
“그냥 가 버렸다고?”
새로 온 몸종은 입을 삐죽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더니 그 말에 쉿 소리를 냈다.
“안 가면요? 평생 여기서 지내라고요? 좋은 곳으로 갔어요. 공자가 직접 와서 데려간다는데 안 가는 게 바보죠.”
몸종과 여종은 어떻게 된 일인지 그제야 이해했다. 실망스럽기도 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냥 가 버리다니.”
몸종은 고개를 돌리고 대청 안에 있는 정교랑을 힐끔 바라봤다. 등불 아래의 여인은 여전히 느릿느릿 식사 중이었다.
“그래도 오래 모신 분인데 와서 고개 숙여 인사라도 한마디 하고 가지.”
몸종이 투덜거렸다.
“했어요. 문밖에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는걸요.”
새로 온 몸종이 말했다.
“그렇게 인사하면 뭐 해요. 바보가 뭘 안다고.”
주씨 가문 공자가 밤길을 재촉해 떠나며 몸종까지 데려갔다는 소식은 금세 안채로 전해졌다.
“자기 아씨를 끔찍이도 챙기더니? 부엌에 와서 간식을 만들래도 싫댔잖아. 더군다나 여긴 같은 집이고. 근데 뭐야, 이번엔 냉큼 가 버려? 천 리도 넘은 길을 이렇게 그냥 간다고?”
정육랑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쉬울 게 뭐 있어. 그 계집이 영리한 거지. 사람은 다들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하는걸. 바보의 시중을 들어 봤자 평생 그 모양 그 꼴일 테지만, 그 공자를 따라가면 앞으로의 삶이 달라지잖아.”
정오랑이 천천히 말했다.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파악한 정육랑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주위에 있는 몸종들을 분노 어린 눈으로 쓱 훑었다.
“너희들 중에 그따위로 바람이 나서 주인을 버리고 가는 계집이 나오기만 해 봐라. 누굴 따라가든 내 기필코 쫓아가 요절을 내겠다.”
정육랑이 고개를 쳐들고 앙칼지게 말하자 몸종들은 놀라 얼른 무릎을 꿇으며 당치도 않은 말씀이라고 빌었다.
“바람나는 게 뭐야?”
정칠랑이 궁금한 듯 물었다.
“바람이 나면 왜 주인을 버려?”
참, 8살짜리 아이가 한 방에 있었지. 자매들은 부채를 들고 얼굴을 가리며 부채질을 했다.
“따분해 죽겠다. 연못에 가서 놀자.”
정육랑이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다른 자매들은 따라서 일어섰지만 정칠랑은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긴 귀신이 있잖아.”
“없어, 넷째 오라버니는 병에 걸렸던 거야.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근심이 쌓였던 차에 연못에서 바람을 쏘다가 병에 걸렸던 거라고. 료 의원이 그랬어!”
정육랑은 눈썹을 치켜뜨며 정칠랑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한 번만 더 우리 오라버니에 대해 허튼소리 지어내 봐. 너랑 안 놀 줄 알아!”
정칠랑은 억울하기도 하고 열이 받기도 했다.
“나도 너랑 안 놀아!”
정칠랑은 발을 구르며 소리친 후 신도 신지 않은 채 가 버렸다. 유모와 몸종들은 늘 있던 일이라는 듯 나막신을 들고 얼른 뒤쫓아갔다. 정육랑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가자. 그 바보가 이젠 연못에 안 나오니까 안심하고 놀아도 돼.”
어느새 날이 밝았다. 대나무 문발 밖에 있는 간이 침상에서 자던 몸종은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얼른 일어나 물었다.
“아씨, 일어나셨어요?”
문 안에서 응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종은 몸을 일으켜 얼른 머리를 빗질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벌써 침상에 앉아 있었다.
“아씨, 옷을 갈아입혀 드릴게요.”
몸종이 말했다. 정교랑의 시중을 드는 일을 시작한 건 이제 겨우 사나흘밖에 안 됐지만 몸종은 능숙하게 움직였다. 너무나도 단순한 일이었으니까. 아씨는 떼도 안 쓰고 조용해서 시중들기가 너무 편하네. 아, 밥 먹는 것만 빼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끓인 물을 마시고 나자 몸종이 정교랑 앞으로 음식을 가져왔다.
“아씨, 어떠세요?”
몸종이 조심스레 묻자 정교랑은 눈으로 쓱 식탁을 훑더니 잠시 침묵했다. 이젠 모든 음식을 안채 부엌에서 가져왔지만 여기 있는 작은 부엌을 없앨 순 없었다. 왜냐하면…….
“이 생선은 참기름에 좀 더 지져. 밥은 국에 말아 끓이고.”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식탁에 있는 음식들을 찬합에 넣어 들고 나갔다. 마당에 있던 다른 몸종은 머리를 감는 중이었다.
“물부터 길어 오고 씻어. 아씨께 밥을 새로 지어 올려야 해.”
몸종이 말하자 머리를 감던 몸종은 성가신 듯 대꾸했다.
“밥 다 됐잖아? 뭘 더 해?”
“안 드시겠다고 이렇게 저렇게 다시 해 오래.”
머리를 감던 몸종은 머리를 털며 다가와서는 찬합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바보가 뭘 알아, 대충 달래서 먹이지. 진짜 아씨 모시듯 시중을 드네.”
이어 손을 뻗어 찬합을 받으며 말했다.
“나한테 맡겨.”
머리를 감던 몸종은 젓가락을 들어 생선을 뒤집고 옆에 있던 국에 밥을 말아 두어 번 아무렇게나 뒤적였다.
진한 머릿기름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정교랑이 창가에서 고개를 들자 낯선 몸종이 보였다.
“아씨.”
몸종은 정교랑을 부르다 말고 창가에 단정히 앉아 있는 아씨를 보며 흠칫 놀랐다. 이 방 안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고 아씨를 제대로 본 것도 처음이었다. 바보인 게 아까운 미모네.
“아씨.”
몸종은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꿇으며 찬합에 있는 생선과 음식을 차려 놓았다.
“말씀하신 대로 생선을 지졌어요. 국도 끓였고요.”
정교랑은 식탁에 있는 음식을 쓱 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그 몸종을 쳐다봤다. 편하게 행동하던 몸종은 정교랑의 눈빛에 어째서인지 긴장이 됐다. 역시 바보는 사람을 겁먹게 한다니까. 몸종이 정교랑을 보며 미소를 짜냈다.
“소인이 먹여 드릴까요?”
몸종이 쭈뼛거리며 말하자 정교랑은 몸종을 힐끔 보고 입을 삐죽거리며 피식 웃었다.
“난 바보가 아니야. 바보는 너지.”
몸종은 실소했다. 진짜 바보잖아. 정교랑이 손을 뻗어 식탁 위에 있던 그릇을 엎어 버렸다. 국에 만 밥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바닥과 식탁, 맞은편에 있던 몸종의 몸으로 음식이 튀었다.
“앗, 뜨거워.”
몸종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겨우 며칠 마음 편히 지내던 대부인은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교랑 아씨 말씀으로는 그 아이가 밥을 먹다가 덴 거라고 하셨어요.”
여종이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몸종은 교랑 아씨께서 엎으신 거라고 하고요. 나머지는 전부 밖에 있어서 본 사람이 없어요. 부인, 누구 말을 믿으시겠어요?”
“누구 말을 믿냐고?”
대부인이 자세를 고쳐 똑바로 앉으며 여종을 바라보더니 돌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주씨 가문 사람이 떠났다고 평생 안 올 줄 아느냐? 그저 먹고 마실 줄밖에 모르는 아이 시중이 그리 힘들어? 누굴 바보로 아는 게야! 어딜 감히!”
여종은 얼른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네, 네. 고정하세요, 부인. 고정하세요. 알겠습니다. 소인이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여종은 얼른 일어나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