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06
교랑의경 306화
대청에는 다시 한씨 가문의 세 식구만 남았다. 세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돈은 우선 아버지께서 쓰십시오.”
한원조가 비전을 부친에게 쥐여 주었다.
“땅을 팔지도, 어머니의 혼수를 팔지도 마세요.”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한원조의 부친이 머뭇거렸다.
“그럼요. 좀 전에 곽자균이 여기서······.”
한원조가 말하던 도중에 한씨 부인이 기분 나쁘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
“곽후라고 불러라. 자균은 무슨.”
한원조는 아차 싶은 마음에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전에 곽후가 제가 돈을 받은 것을 보고 갔습니다. 며칠만 지나면, 곧 숙주성 전체에 제가 경성에 점포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질 겁니다. 그러니 이 돈은 아버지께서 쓰시는 게 가장 바람직합니다. 이 돈은 저희 한씨 가문의 돈과 무관할뿐더러 가산을 팔아서 마련한 돈도 아니니까요. 외부인이 이걸 가지고 트집 잡을 수도 없을 겁니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너무 술술 풀리니, 한원조의 부친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네가 경성에 한 번 다녀온 일로 이렇게 운 좋은 일이 생기다니. 아 참, 그 아씨라는 이는 누구더냐?”
한씨 부인이 웃으면서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한원조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확실치가 않아서요. 제가 직접 그 숙수를 도왔다기보다는, 제가 그 숙수를 도울 수 있게 다른 사람이 절 도와줬어요.”
한원조는 심호흡을 하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 생각에, 그 사람은······.”
한원조는 뜸을 들였다.
“그 사람은 뭐?”
한씨 부인이 진지한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추궁했다.
“진소 상공 댁의 사람입니다.”
진소!
한씨 부부는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이는 일만 관의 배당금보다도 훨씬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지방의 현령으로 십수 년을 지낸 한원조의 부친조차도 폐하를 알현할 수 있는 지체 높은 관리를 본 적 없는데, 과거 시험을 치르러 경성에 한 번 갔다 온 그의 아들이 무려 상공 어른댁의 사람을 알아 오다니!
“누군지 생각났어!”
한편 동강현의 장씨 가문에서는 여종 하나가 다리고 있던 옷을 내팽개치고 소리를 지르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방 안에서 옷을 다리고 있던 다른 여종들이 화들짝 놀라 바닥에 내팽개쳐진 옷가지를 주웠다. 여종들은 혹여나 옷이 망가지지는 않았을까 조심히 만져보고는 뛰쳐나간 여종을 몇 번 불러봤지만, 그 여종은 벌써 저만치 뛰어가 버린 뒤였다.
“부인, 부인. 그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요!”
여종이 무릎을 꿇어앉은 채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본 한운랑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옆에 앉아 있던 장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듯 말했다.
“버릇없는 것. 운랑, 아랫것들을 너무 풀어 줘서는 안 된다.”
한운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네, 어머님. 염려 마세요. 이 며느리가 알아서 할게요.”
한운랑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장 노부인의 기세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 장 노부인은 입술을 삐죽이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장 노부인은 눈앞의 며느리를 질책할 수 없었다. 그때처럼 죽은 며느리를 다시 살려낼 정 낭자가 없으니, 한 번이라도 더 며느리를 분통 터트려 죽였다가는 정말로 큰일이 날 것이다.
“노부인, 부인. 그 시녀요. 그 시녀가 바로 예전에 부인의 병을 고쳐줬던 그 시녀예요! 어제 그 사람이 바로 그 시녀였어요! 어쩐지, 원아 아씨의 키가 컸다고 하더라고요. 아씨를 아는 사람이니 그런 말을 한 거였네요!”
여종이 다급하게 외쳤다.
뭐라고?
장 노부인과 한운랑은 여종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그 정 낭자 말이냐?”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네, 네. 왜 그 집을 보러 가나 했는데, 집을 빌리려는 게 아니라 전에 머물렀던 집을 둘러보러 가는 거였어요. 아이고, 아이고. 그 낭자가 아씨께 간식도 한 주머니 줬는데. 아이고, 아이고. 그 시녀가 분명히 아씨를 아는 눈치였는데 제가 그 자리에서 알아보질 못했네요! 아이고, 이를 어째.”
여종은 계속 떠들어 댔지만, 장 노부인과 한운랑에게는 여종의 말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 어머니, 그 낭자는 그림에 있던 미인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한운랑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정말로 그 여인인가? 정말로 그 여인이었던 건가?
“빨리, 빨리 가서 찾아!”
한운랑이 외쳤다. 곧이어 한운랑은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아예 자신도 문을 나섰다.
“어서 찾아라!”
장 노부인도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신의를 찾으면, 이번에는 비방이라도 얻어와야지. 다음에 또 며느리가 죽네 사네 하면 그걸로 막게.
동강현은 그다지 큰 고을이 아니었지만, 이름도 모르고 외모도 모르는 외지인을 찾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사흘이 지난 뒤에야 정교랑 일행이 묵었던 객잔을 알아냈지만, 일행은 이미 동강현을 떠난 지 오래였다.
“아마 경성에서 왔을걸요. 시종들의 말투를 들어보니 전부 경성 사람 같더라고요. 근데 어디로 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나흘 전, 동이 트기도 전에 떠났어요.”
객잔의 점원이 말했다.
또 이렇게 됐네. 아니지, 적어도 지난번보다는 나아. 적어도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는 알게 됐으니까.
도대체가 이걸 인연이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볼 수 있는 것 같다가도 왜 자꾸 못 보는 건지!
한운랑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곧 눈이 내릴 듯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눈이 내릴 것이야. 다들 조금만 더 빨리 움직이세나. 십 리만 더 가면 강주 경계에 도착하네.”
한참을 달린 끝에 마침내 목적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모두 큰 소리로 기합을 외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모두가 환호하는 이 순간에도 오직 한 사람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공자님, 왜 또 그러십니까?”
마차에 올라탄 노복이 두봉을 두른 채로 마차의 구석에서 미동도 없는 왕십칠을 보고 난감해하면서 말했다.
“곧 집에 도착합니다.”
왕십칠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건, 내가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야.”
왕십칠이 쉰 목소리를 쥐어짜고는 울먹이며 말했다. 노복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퉤 하고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멀쩡하신데 죽는 날이라니요.”
“아범, 나 저 여자랑 혼례 안 올릴래!”
왕십칠이 노복의 팔을 덥석 잡고는 소리쳤다. 반쯤 말하던 왕십칠은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싶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이 나머지 말을 뱉었다.
노복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새까만 먹구름이 강주의 하늘을 뒤덮었다. 서늘한 초겨울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지나다니는 행인들은 옷깃을 여미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강가에서 방망이를 들고 빨래를 하던 여인은 찬물에 꽁꽁 언 손을 입가에 대고 호호 불며 손을 녹였다. 여인이 고개를 들자 여종들 무리가 다리 위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오늘 북쪽에 손님이 왔나?”
여인이 옆에 있던 다른 여인에게 물었다.
“응,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더구먼. 손님들 대접하느라 매일 연회를 연대.”
다른 여인이 부럽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럼 이따가 우리도 거기 한 번 가 볼까? 도울 게 좀 있나 보고 말이야.”
입김으로 손을 녹이던 여인이 말했다.
북정(北程)에는 하인들이 넘쳐났기에 실상 이들이 가서 도울 것은 없었다. 북정 가문이라고 해야 기껏해야 두 형제의 식구가 다였고, 아이들을 합친다 해도 열댓 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연회를 열어도 먹는 입이 몇 되지 않으니, 연회에 사용된 음식이 상에 올려진 그대로 내려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숙수나 부엌 어멈들과 친하게 지낸다면 남는 연회 음식들을 조금 얻어 올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얻어 온 음식들은 온 가족이 족히 이틀은 먹을 양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여인들은 손에 쥐고 있던 방망이를 내려놓고 서둘러 빨래를 정리하여 강가를 따라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쪽문을 지나면 넓은 길이 나왔다. 하늘에서 이곳을 내려다본다면, 강가 일대는 이 큰길을 중심으로 정확히 남과 북, 두 구역으로 나뉘었다.
북쪽에는 새까만 기왓장으로 쌓인 큰 저택이 있고, 구역이 여러 개로 나뉜 저택 내부를 구불구불 긴 회랑이 이어주었다. 구역 사이사이에 만들어진 인공 정원에는 석가산과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누각이 세워져 있어 운치가 있었다.
반면, 길의 남쪽에는 낮고 조그마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대칭이나 정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집들 사이에는 아무렇게나 쌓아 둔 볏짚이나 창고가 있어 더욱 조잡하고 비좁아 보였다.
두 여인은 잡담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큰길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쪽에는 쪽문이나 정문의 개념이 없었다. 좁고 울퉁불퉁한 길가를 따라 안쪽으로 걷다 보면 코흘리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이고, 어느 집에서 들려오는지도 모를 대화 소리와 닭이 우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 등이 들렸다.
두 여인은 앞도 안 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피하기 위해 골목 한쪽에 잠시 멈춰 섰다. 이때 갑자기 아이고 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고. 내 발 떨어져 나가네.”
두 여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스물을 갓 넘긴 듯 보이는 사내가 울부짖고 있었다.
사내는 초겨울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얇은 면으로 만든 청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얇은 옷 때문에 나뭇가지처럼 비쩍 마른 체형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청초해 보이는 사내의 얼굴에 일순간 호감이 들려는 찰나, 그의 어깨 뒤로 휘날리는 화려한 깃발을 보고 두 여인은 서둘러 손짓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사내는 한쪽 어깨에 깃발을 짊어지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연신 얼굴을 때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웠다.
사내는 힘겹게 깃발을 돌돌 말아서 정리했다.
“빌어먹을 사기꾼 놈이! 여기 숨어서 뭐 하는 거야!”
두 여인이 소리쳤다.
“거참, 욕까지 하실 건 또 뭐요. 아주머니들이 먼저 제 발을 밟아 놓으시고선.”
사내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했다. 두 여인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땅에 침을 퉤, 뱉고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아, 아 잠시만요. 아주머니들, 제가 지은 초가집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는데, 혹시 그쪽 헛간에 신세를 좀 져도 되겠습니까?”
사내가 아첨하는 미소를 보이며 부탁했다.
“퉤. 꺼져라, 꺼져. 네 놈이 거기서 살면, 우리 집 집기들은 다 어디에다 두라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여인은 사내 앞을 홱 지나갔다.
사내는 두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쯧쯧. 정말 보는 눈이 없네. 그깟 집기 따위보다 훨씬 값비싼 몸인데, 그걸 못 알아보다니. 내 언젠가는 필히 성공하여 밥 한 끼의 은혜를 몇 배로 갚아줄 날이 올 거요. 이건 그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꼴입니다요.”
사내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여유롭게 건들거리며 골목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집으로 돌아온 두 여인은 아이들의 빨래를 넌 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북정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북정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연회를 치우던 중이었다. 두 여인은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반나절 내내 설거지와 청소를 도왔다.
부엌의 작은 의자에 앉아 종일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들기만 하던 집사 부인이 몸을 일으켰다.
“도와줘서 고맙네.”
집사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고는 몸종을 향해 손짓했다. 몸종이 옹기 두 개를 들고 와서 두 여인에게 건넸다. 두 여인은 내심 무척이나 기쁘면서도 겉으로는 손사래를 치며 예의를 차렸다.
“이걸 어떻게 받아요. 다 이 댁 것인데.”
“다 한 식구인데, 못 받을 게 뭐 있어. 안 가져가면 다 상할 게 뻔한데. 괜찮으니까 어서 가져가게.”
집사 부인의 말투에서 귀찮음이 묻어났다.
한 식구라고? 정말 한 식구라면 우리를 이렇게 대할 리가 있나.
두 여인은 집사 부인이 은근히 괘씸했지만, 웃는 표정으로 재차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옹기를 받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