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1
교랑의경 31화
불과 며칠 사이에 정교랑의 몸종이 셋이나 바뀌었다. 주씨 가문으로 도망친 몸종 외에 나머지 둘은 팔려갔다.
정씨 가문은 가풍이 엄하고 선조의 유훈을 따라 아랫것에게 관대했다. 부리던 사람을 연달아 파는 일은 요 몇 년간 전례가 없었는데 불과 한 달 만에 두 번이나 일어나니 집안 전체가 뒤숭숭해져 다들 몸을 사렸다.
하인을 두 번이나 팔았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 나갔다. 전부 정씨 가문 이방의 그 바보와 관련된 일이었다. 다른 집 바보들은 외모가 추하고 희로애락을 몰라 누군가를 때리고 욕하는 일이 없다던데, 정씨 가문의 바보는 아랫것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에 능했으니 하인들과 몸종들로서는 두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바보의 뒤엔 든든한 외가가 버티고 있어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됐다. 정씨 가문 바보의 시중을 들려면 따돌림을 당하는 건 물론이요, 엄청난 심리적 부담과 함께 일가 전체의 앞날을 짊어지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언니, 언니. 일찍 왔네. 우린 무서워서 시중들러 못 들어가겠어.”
“언니, 우리 언니는 아직 젖먹이도 딸려 있어. 팔려가면 못 살아.”
겁에 질린 얼굴로 애원하는 새로 온 두 몸종의 말에 원래 있던 몸종은 난감했다.
“사실 아씨는 그런 분이 아니야.”
그 몸종은 억울한 일을 당해 팔려 간 게 아니야. 그 계집이 먼저 아씨를 우롱했으니 그런 일을……. 사실 다른 아씨를 윗전으로 모셨다 해도 그런 짓을 했으면 무거운 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다른 아씨를 모셨다면 목숨이 백 개라 해도 그런 짓은 감히 못 했겠지. 남을 무시하고 깔보다가 되레 자신이 당한 것이다. 그런데 우롱을 당했다는 걸 바보가 어떻게 알았지? 혹시 바보가 아닌가? 몸종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언니, 언니. 언니는 보살이잖아. 우리 집 식구들은 언니만 믿을게.”
두 몸종이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걸복걸하자 몸종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에 들어가서 시중드는 일은 너희가 안 해도 돼. 물청소 깨끗이 하고 물 끓여서 부뚜막도 닦아. 아씨 시중은 내가 들게.”
몸종의 말에 나머지 두 몸종은 무슨 사면이라도 받은 듯 연신 감사를 표했다. 몸종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조롱의 대상이었다가 이제는 두렵고 피해야 하는 대상이 된 그 바보가 여느 때처럼 조용히 앉아 손에 든 책을 넘겨 보고 있었다. 몸종이 끓인 물을 따르고 꿇어앉아 잔을 건넸다.
“아씨, 물 드세요.”
정교랑은 응 하고 손을 뻗어 물잔을 받았다. 몸종은 팔걸이 책상 위에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몸종이 처음 왔던 날 펼쳐 놓았던 책장과 같은 부분이었다. 아씨의 희고 가느다란 손이 같은 줄 글자를 계속 만진 탓에 그 부분은 마모가 되어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아씨, 오수에 드시겠어요?”
몸종의 물음에 정교랑은 몸종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일어나게 부축해 줘.”
몸종이 얼른 손을 내밀며 정교랑을 부축했다.
“나가서 좀 걸어야겠어.”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정교랑을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모여 떠들고 있던 몸종들은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가 어두운색 치마에 푸른 비단 윗옷을 덧입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대청 중앙으로 나온 여인을 보고 멍해졌다.
잠시 후 이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몸종들은 부엌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기억에 남는 건 그 여인의 새하얀 얼굴뿐이었다. 구체적인 외모에 대해서는 미처 볼 새도 없었을뿐더러 감히 쳐다볼 담력도 없었다. 괜히 봤다가 해치려 했다며 누명이라도 씌우는 날엔 목이 달아나지 않겠는가.
몸종은 별안간 마당이 조용해지자 멋쩍어했다.
“부엌 뒷정리를 하느라 바쁜가 봐요.”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들었다. 작열하는 햇빛 아래 늦여름 매미가 이따금 울어댔다. 정교랑이 눈을 찡그리자 몸종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정교랑이 아래로 내려서도록 부축해 주었다.
“너울을 가져와. 난, 햇볕을 쬐면 안 돼. 불편해.”
몸종은 아, 하더니 불안에 떨며 말했다.
“소인이 몰랐네요. 소인의 죄를 용서하세요.”
“괜찮아. 내가 말해 주면, 다음부턴 기억할 수 있잖아.”
“네, 소인이 기억할게요.”
몸종은 기쁘게 대답하고 얼른 들어가 너울을 가져와 정교랑에게 조심스레 씌워 준 다음 정교랑을 부축해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 깜짝 놀랐네.”
“대낮에 밖에는 왜 나와? 괜히 여러 사람 마음 졸이게.”
두 몸종은 그제야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정교랑은 멀리 나가지 않고 자신의 마당만 한 바퀴 빙 돈 다음 문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시겠어요?”
옆에서 조심스레 부축하던 몸종은 정교랑이 더 이상 걷지 않자 얼른 물었다.
“응.”
정교랑이 대답했다. 몸종은 무어라 더 묻지 못하고 정교랑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있던 몸종들은 이번에도 얼른 몸을 숨겼다.
그 후로 정교랑은 매일 산책을 나왔는데 멀리 가지는 않고 집 주변만 빙 돌았다. 날이 지나자 몸종들도 익숙해져서 매번 놀라 피하지는 않았다. 정교랑은 한 바퀴에서 두 바퀴로, 두 바퀴에서 세 바퀴로 차츰 걸음을 늘려갔다. 보름쯤 지나자 무더위가 물러가고 초가을이 왔다.
“아씨, 피곤하시죠? 쉬시겠어요?”
몸종이 물었다. 이제는 정교랑을 부축하지 않고 조심스레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됐다. 벌써 세 바퀴를 돈 정교랑은 문 앞에 서더니 너울의 가리개를 들어 얼굴을 드러냈다. 희고 고운 피부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안 힘들어, 더 걸을래.”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네 하고 뒤를 따랐다. 정교랑은 네 바퀴를 돈 다음에야 걸음을 멈추고 피곤한 듯 몸종에게 몸을 기댔다.
“아씨, 뭘 이렇게까지 하세요. 피곤하면 쉬시죠.”
몸종이 말했다. 한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몸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조용한 아씨를 좋아하게 됐다. 변덕이 죽을 끓는 다른 아씨들의 시중을 드는 것에 비하면 소문은 좀 무섭게 났지만 이 아씨를 모시는 게 훨씬 쉬웠다. 아씨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정교랑은 멈춰 서서 뒤를 힐끔 돌아봤다.
“안 힘들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다. 느리고 더디지만 보답은 있기 마련이다. 계속 이렇게 단련해 나가다 보면 곧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도로는 안 힘들지. 몸종은 잠시 기다리다가 정교랑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이것으로 대답이 끝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얼른 정교랑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준비해 둔 뜨거운 물로 정교랑의 목욕을 돕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몸종이 정교랑의 머리를 말려 주는 동안 정교랑은 계속해서 책을 들여다봤다.
정교랑의 뒤에 서 있던 몸종은 정교랑이 예전 그 줄의 글자 위에 왼손을 올리고 조금씩 이동하는 한편 팔걸이 책상 위에 올려 둔 오른손으로 천천히 따라 쓰는 것을 지켜봤다. 시간이 지나자 정교랑은 두 손을 바꾸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이게 책을 보는 건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방 안은 조용했다. 정교랑은 조용히 앉아 글자를 어루만지며 따라 쓰는 동작을 했다. 몸종은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씨는 말씀을 잘 안 하셔. 먹고 마시고 옷을 갈아입는 듯 꼭 필요한 일 외에는 말을 아끼시지.
몸종은 반근을 떠올렸다. 반근이 있었을 땐 아씨와 반근이 수시로 마당에 나와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엔 반근이 말했지만 말이다. 반근이 떠난 후 아씨는 훨씬 조용해졌다. 조용히 산책을 나와 마당을 돌고 조용히 책을 보며 손가락으로 따라 쓰는 게 전부였다.
반근이 떠난 걸 알기는 아는 건가? 혹시 슬퍼하는 건가?
“아씨, 아직 반근을 기억하세요?”
불쑥 질문을 던진 몸종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겁을 먹었다. 듣자니 바보는 사람을 잘 기억 못 한다던데. 정교랑의 손이 멈췄다.
“기억해.”
정교랑은 뚜렷하진 않지만 알아볼 수는 있을 정도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얼굴에 한층 생기가 돌았다. 그 모습을 보며 몸종은 멍해졌다. 웃는 건가? 옅은 웃음으로도 이렇게 아름답게 웃을 수 있구나. 그런데 왜 웃는 거지?
“아씨, 저기, 그러니까 반근은…….”
정신을 차린 몸종이 우물쭈물 말을 더듬자 정교랑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반근이라는 계집이 다른 사람을 따라 떠나 버린 것을.
그 순간 정교랑은 자신이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렇다면 예전에 기억할 수 없었던 건 병 때문에 기억력이 안 좋아서인가, 아니면 믿을 구석이 있기에 기억하기 귀찮았던 것인가. 순간 정교랑은 병이 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정교랑은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었다. 머리는 물론이고 몸에도 병은 없었다. 그저 조화가 잘 안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 점을 깨닫자 정교랑의 몸 회복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어찌 잊겠는가.
“아씨, 반근은 떠나기 전에 밖에서 아씨한테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렸어요.”
몸종은 아씨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걸 왜 말하고 있지? 아씨를 위로하려고? 반근이 말도 없이 아씨를 버리고 떠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응.”
정교랑이 대답했다. 기쁨이나 슬픔은 느껴지지 않는 짧은 대답이었다. 몸종은 문득 마음이 놓여 옆에 꿇어앉았다.
“아씨, 제 생각에는요.”
몸종은 무언가를 더 이야기하거나 반근이 전하는 말이라며 말을 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정교랑은 몸종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난 슬프지 않아. 슬픈 건, 그 애지.”
* * *
“반근!”
누군가가 밖에서 불렀다. 회랑 아래에 앉아 새로 나온 꽃가지를 전지하던 몸종이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부탁했던 돼지 간이랑 양 간을 가져왔어.”
어린 몸종 하나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들어와서는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로 기름종이에 싼 꾸러미를 건넸다. 몸종은 웃으며 일어나 꾸러미를 받았다.
“세상에, 언니야. 이런 걸 뭐 하려고? 무서워라.”
어린 몸종은 혐오스러운 듯 말했다.
“아씨께서 드실 거야.”
몸종의 대답에 그 어린 몸종은 입을 삐죽거렸다.
“안채 부엌에서 보내오는 멀쩡한 음식은 안 먹고 이런 걸 먹겠다니, 진짜 바보네.”
문밖에 서 있던 나이 많은 여종은 그 대화를 듣고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이름은 물론이고 대화 내용도…….
한 달 전의 이곳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몸종들이 왔다가 쫓겨가고 또 왔다가 쫓겨간 일은 아예 일어난 적 없는 듯했다.
“넌 안 무서울지 몰라도 난 무서워. 나 갈게.”
어린 몸종이 손을 흔들고는 얼른 뛰어나갔다. 몸종은 기름종이 꾸러미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불 지펴 놨어.”
부엌에 있던 두 몸종이 말했다. 두 몸종 역시 고개를 빼고 손에 든 물건을 쳐다보며 혐오스럽다는 눈빛을 드러냈다.
“정말 이걸 먹으려고?”
“그럼 네가 아씨께 다른 거 드시겠냐고 물어볼래?”
몸종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죽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됐어.”
한 몸종이 웃으며 몸을 움츠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넌 이름까지 바꿨다지만 난 내 이름 바꾸고 싶지 않거든.”
다른 몸종도 부엌으로 들어갔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내가 나이기만 하면 되지.”
몸종은 웃으며 부엌으로 따라 들어갔다.
밀가루 반죽은 잘 발효됐다. 정교하게 만든 작은 공예 화로에 불을 올려 달구고 푹 삶은 간은 잘게 빻았다. 부엌에 앉은 세 몸종 중 둘은 소를 넣어 만두를 만들고 하나는 화로에 넣어 구웠다.
“희한하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안채 부엌에서 보낸 호병(胡餅: 밀가루 안에 팥을 비롯한 각종 소를 넣어 둥근 달 모양으로 구워낸 빵)은 안 먹고 굳이 이걸 먹겠다니. 이런 건 원래 개 먹이로 주는 거잖아.”
투덜거리던 두 몸종이 돌연 말을 멈췄다. 맛있는 냄새가 부엌 가득 퍼졌다.
“앗, 뜨거워라. 뜨거워.”
몸종은 다 구워진 월병을 대나무 쟁반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후후 불었다.
“냄새 좋다.”
두 몸종은 저도 모르게 다가와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작은 월병 두 개를 바라봤다. 한 몸종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반으로 가르며 물었다.
“간 좀 볼래?”
두 몸종이 안에 든 소를 보며 머뭇거리는 동안 그 몸종은 벌써 입에 넣고 먹기 시작했다.
“오!”
몸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
몸종은 오물거리며 말하더니 얼른 또 한입 베어 먹고 뜨거운지 후후 입김을 불었다.
“나도 먹어 볼래. 내가 소를 만들었으니까 맛은 봐야지.”
한 몸종이 못 참겠는지 기름기 묻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닦고는 남은 반 개를 한입에 넣었다.
정교랑의 마당 밖에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지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이때 부득이하게 마당 밖을 지나던 몸종 두 명은 길을 재촉하다가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머, 맛있는 냄새.”
“그러게.”
한 몸종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하자 다른 몸종도 코를 킁킁거리며 마당 쪽을 쳐다봤다. 두 몸종의 눈이 마주쳤다.
“또 바보 줄 음식을 만드나 보네. 진짜 다른 아씨들보다 더 까탈스럽다니까.”
두 몸종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뭘 먹여야 입에 맞을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