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12
교랑의경 312화
춘란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양쪽으로 세워진 등롱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싱긋 웃는 여인의 미소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반근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간식을 소중히 품에 안은 춘란을 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러고는 문 앞에 서서 연신 고개를 돌리며 감사 인사를 올리는 춘란의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이 큰 저택 안에서, 아씨의 나아진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오직 저 몸종 하나뿐이라니. 다른 사람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거나, 나아진 아씨의 모습을 보고도 쉬쉬하는 분위기야.
아씨께서는 타인이 악의를 보이는 것이야말로 정상이니, 타인의 악의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아씨께서는 선의의 미소나 물 한 방울의 은혜에도 넘치는 샘물로 갚아 주시는 거겠지.
“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가라.”
반근이 말하고는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정주(汀洲),
왕씨 가문의 저택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왕 부인은 저녁 식사도 뒤로 한 채, 대문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왕십칠의 거처로 직행했다.
“왜 그래? 왜 그러니? 설마 병이라도 난 게야?”
왕 부인이 치맛자락을 든 채 왕십칠의 방문 앞에 걸음을 멈추고 다급하게 물었다.
왕십칠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회랑 아래에 일렬로 서 있던 몸종과 미비(美婢: 어여쁜 시녀)들이 울먹거리거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울긴 왜 울어!”
왕 부인이 호통을 치자 이들은 서둘러 훌쩍거림을 멈추었다.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간 왕 부인의 눈에 침상 위에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왕십칠이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힘들어서 그래?”
침상 앞으로 다가가 앉은 왕 부인은 이불을 아래로 내리려 손을 뻗었다.
“이 어미에게 얼굴 좀 보여다오.”
왕십칠이 이불을 꽉 쥔 채 놓아주지 않자, 왕 부인은 다급한 마음에 손바닥으로 이불을 때렸다.
“어서 말해 보거라. 네 조모님은 널 기다리다가 혼절하셨어. 이젠 이 어미까지 혼절하게 둘 셈이야?”
왕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어머니, 소자는 불효자예요. 조모님과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소자가 먼저 가게 되었습니다.”
이불 안에서 왕십칠의 암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십칠의 말을 들은 몸종과 미비들 때문에 밖은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도련님, 도련님. 저 효란을 두고 가시면 아니 되어요.”
“도련님, 소낭이 도련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냉큼 꺼지지 못할까!”
시녀들의 우는 소리에, 왕 부인이 못 견디겠다는 듯 소리쳤다.
문밖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십칠, 걱정하지 말거라. 정말로 너에게 무슨 불상사라도 생기면, 이 어미가 먼저 가마.”
왕 부인이 침상 옆에 앉아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어머니, 저를 살려 주셔야 해요.”
왕십칠이 이불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 부인은 다급히 왕십칠의 손을 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살려야지.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너를 살려내마. 어서 무슨 일인지 이 어미에게 말해 다오. 무슨 일이든 어미가 해결해 줄게.”
“퇴혼할래요.”
왕십칠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왕 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퇴혼?
“네가 퇴혼할 게 뭐 있어? 아직 혼례를 올리지도 않았는데.”
왕 부인은 말하다가 멈칫했다.
“그 정 낭자 말이더냐?”
왕 부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퇴혼?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혼례를 올린다는 걸 잘못 말한 거겠지?
긴장이 풀렸는지 왕 부인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것 때문에 이래? 걱정하지 말거라. 어미가 이미 동의하지 않았느냐. 혼사는 네가 원하는 대로 올릴 거야. 나도 그 낭자 얼굴을 보고 왔는데, 역시 우리 아들의 안목이 뛰어나더구나. 해가 바뀌기 전에 식을 올리자. 아니, 이번 달, 이번 달은 어떠니?”
왕십칠은 비통한 듯 소리를 내지르면서 침상 위에 고꾸라졌다.
“어머니, 그 여자랑 혼례를 올리면, 저는 죽은 목숨이라고요!”
왕 부인이 흠칫 놀랐다.
“갑자기 싫어진 게야?”
“싫어요, 싫어요.”
왕십칠은 베개 위에서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며 울먹거렸다.
“그 여자랑 혼사를 치르게 되면, 저는 죽게 될 거예요.”
왕 부인은 같이 지내보지 않는 한,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다는 속담을 속으로 떠올렸다.
그 낭자, 겉으로 보기에 괜찮던데, 정말 아직 머리가 멀쩡하지 않은 건가?
하긴, 바보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병을 앓았으니, 아무리 겉으로 괜찮아 보인다 해도 실상은······.
“싫다면 관두자.”
왕 부인이 웃으면서 왕십칠을 토닥였다.
“정말로요?”
왕십칠이 기쁜 얼굴로 몸을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런 왕십칠의 모습을 보며 왕 부인은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괜히 화가 나기도 했지만, 기뻐하는 아들의 모습에 그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고작 이런 일 가지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 거야? 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왕 부인이 웃으며 아들의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
같은 시각. 노복은 왕 노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번 일은, 생각보다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노복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단순하지 않다는 거야? 혼사 하나가 무슨 대수라고.”
왕 노야가 언짢은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대꾸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죽겠다고 난리를 피워 집안이 발칵 뒤집힌 탓에 왕 노야는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식을 들은 어머니까지 혼절하셨는데, 이 모든 게 고작 혼사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왕 노야는 어이가 없었다.
애초부터 터무니없는 일이었으니, 없던 일로 치면 더 좋지.
“노야, 일단 제가 정 낭자에 관해 올리는 이야기를 들어보시고, 이 혼사를 신중하게 결정하십시오.”
성가시다는 듯한 왕 노야의 모습에도, 노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엄숙하게 말했다.
* * *
서늘한 밤바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시녀는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부인, 이부자리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칠랑 아씨의 이불도 다 가져왔고요.”
여종이 가까이 와서 말했다. 정 이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칠랑을 쳐다보았다.
“딱 이번 한 번만이다.”
목욕 후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흩트린 정칠랑이 배시시 웃었다.
“그럼 어머니도 앞으로 다른 사람 때문에 저를 때리지 마세요.”
정 이부인은 말없이 탓하는 눈빛으로 정칠랑을 흘겨보았다.
문이 열리자, 두 여종이 찬합을 들고 들어왔다.
“칠랑 아씨, 밤참 가져왔어요.”
여종들이 웃으면서 말했다.
맛있는 향이 실내에 풍겼다.
“어머니, 여전히 저를 제일 아끼시는 거죠?”
수저를 들고 밤참을 먹으려던 정칠랑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등불 아래, 팔걸이 책상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정 이부인이 피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정칠랑의 코끝을 콕 찍었다.
“여전히가 아니야. 언제나, 항상 너를 제일 아낀단다.”
정칠랑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찡해졌다. 정칠랑이 코를 몇 번 훌쩍이고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냠냠 먹기 시작했다.
“칠랑, 지금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어미가 이러는 건 다 널 위해서야.”
정 이부인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저를 위해서 다른 사람한테 잘 해주는 거라고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칠랑이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으이구, 이 바보야.”
정 이부인이 정칠랑의 이마를 손끝으로 쿡 찔렀다.
“내가 그 아이한테 잘해 주는 것처럼 보였어? 집을 지키는 개도 잘 먹이고, 잘 재워주잖아. 개를 잘 대해 주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 집을 더 잘 지켜 주기 때문이야. 내가 개를 위해서 너를 혼낸다고 한들, 이 어미가 너를 버리고 개를 딸로 삼겠다는 뜻이 아니잖니.”
정칠랑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을 잘 지키게 하려고 어머니가 그 바보한테 잘해 주시는 거예요? 집 지키는 개는 이미 우리 집에 많이 있는데.”
정칠랑이 뾰로통 입술을 내밀고 말했다. 정칠랑의 말에 정 이부인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정 이부인은 다시 정칠랑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바보야.”
정칠랑은 정 이부인을 향해 입술을 삐쭉이고는 손으로 그릇을 들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넌 이제 겨우 아홉 살이라 이해가 안 가는 일도 있을 거야.”
등불에 비친 정칠랑의 오목조목한 얼굴을 바라보며, 정 이부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 어미는 나중에 네가 좋은 집에 시집가게 할 거란다. 요즘은 좋은 집안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구나.”
“어머니랑 안 떨어지고 평생 같이 살 건데요!”
정칠랑이 음식으로 가득 찬 입을 웅얼거렸다.
“어미는 그런 창피한 꼴은 당하기 싫구나.”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 어미의 말을 잘 들어라. 너는 네 바보 언니에게 잘해 줘야 해. 잘 구슬려서 즐겁게 해 줘야 하고, 네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동생이라고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 애한테 제일 잘해 주는 사람이어야 해.”
“왜요?”
정칠랑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정육랑보다 더 예쁜 옷을 입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좋은 것을 쓰고 싶지?”
정 이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연히 그러고 싶죠!”
정칠랑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꼭 이 어미 말대로 해야 한다. 네 바보 언니를 잘 구슬려야 해.”
정칠랑이 또 입술을 삐죽이는 것을 본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쳐다보았다.
“우리 똑똑하고 예쁜 칠랑, 설마 그 바보가 너를 좋아하도록 만들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사람들은 다 칠랑을 좋아해야 하는걸요!
입안의 음식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던 정칠랑은 갑자기 그릇을 내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았다.
“어서 먹으렴. 우리 칠랑이 최고야.”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정칠랑의 코끝을 톡, 하고 눌렀다.
“자, 일어나서 뭐 좀 먹으렴.”
한편, 또 다른 어머니인 왕 부인도 여종이 가져온 쟁반을 쳐다보며 말했다.
집에서 입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왕십칠이 책상다리로 앉은 채 허겁지겁 젓가락과 그릇을 들고 입안으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천천히 먹어. 도대체 몇 끼를 굶은 거야?”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짠해진 왕 부인이 물었다. 왕십칠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으며 뭐라 대답했지만, 왕 부인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몇 끼라고?”
왕 부인이 다시 물었다.
왕십칠이 입안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목을 길게 뺐다. 옆에 있던 예쁘장한 미비 하나가 속상한 얼굴로 왕십칠의 팔을 쓰다듬자, 다른 쪽에 앉아 있던 미비는 직접 수저와 그릇을 들고 왕십칠에게 탕을 떠먹여 주었다.
“모르겠어요. 한참 동안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왕 부인은 왕십칠의 대답을 듣고는 눈물을 훔쳤다.
“어리석은 것.”
왕 부인이 눈물을 닦은 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정 낭자가 보기에는 꽤 괜찮던데, 오는 길에 네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했니?”
오는 길에 네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했니?
왕십칠이 돌연 음식을 씹던 일을 멈췄다.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창문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왕십칠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몸을 떨고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커먼 밤하늘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등롱 때문에 불빛이 어지러웠다.
– 이리 와!
갑자기 왕십칠의 귓가에 어떤 목소리가 폭음처럼 들려왔다. 여인이 성큼성큼 문턱을 넘고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자신에게 활시위를 겨누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 말을 안 듣네?
긴 화살이 서늘한 빛을 내뿜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왔다.
왕십칠이 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손에 쥐고 있던 그릇과 젓가락을 내팽개치고 머리를 싸매며 뒤로 고꾸라졌다.
방 안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